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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ntle Latte 젠틀라떼 Dec 05. 2018

[퇴사일기 #7] 안정이 제일일까

지금의 안정이 미래를 약속하지는 않는다

  K사를 퇴사할 때 주변에서는 놀라는 분위기였다. 사실 안정적인 공기업을 나온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부모님도 아무리 대기업으로 옮긴 다한들 지금보다 낫겠느냐며 걱정을 많이 하셨다. 지인들도 정년이 보장되는 직장을 나올 이유가 없다며 만류했다. 심지어 퇴직금을 찾으러 간 은행의 직원조차 그 좋은 직장을 왜 나오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웃어넘기는 말로 ‘재미가 없어서’ 라거나 ‘정년까지 직장 생활하는 건 내 목표가 아니야’라고 대답하고는 했는데, 이를 듣고는 ‘아직 전쟁터를 경험해보지 않아서 무서움을 모른다’고 받아친 친구도 있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나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안정적인 울타리를 벗어나 스스로 미지의 전쟁터로 걸어 나갔다.

  거창한 목표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보통의 다른 직장인들과 똑같은 고민을 반복하다 내린 결정이었다. K사의 홍보실에서 일한 지 2년 여가 지난 어느 날 지인들과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대부분 홍보나 마케팅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거쳐 결국은 회사와 일 이야기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대화가 깊어질수록 내가 뒤쳐져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비재 회사나 대행사에 다니는 지인들은 최신 트렌드에 민감했다. 직무와 관련한 경험이 훨씬 다채로웠고, 분석이나 전략에도 인사이트가 있었다. 공기업의 여건이나 문화적 한계 때문에 시도해보지 못한 일들을 그들은 주도적으로 하고 있었다. 회사의 네임밸류나 안정성 등을 이유로 여러 사람이 나를 부러워했지만 정작 나 자신은 한없이 부족함을 체감한 자리였다. 그날 이후로 직무 관련한 책도 많이 읽고 세미나에도 참여해봤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해를 거듭하면서 고민은 계속됐다. K사에서의 내 미래는 거의 정해져 있었다. 그대로 몇 년을 더 일하다가 승격 시험을 볼 것이고, 시험에 합격하면 지사로 발령받아 여러 행정업무를 할 것이었다. 그러다 다시 홍보실로 돌아오거나 다른 부서로 갈 수도 있겠지만 순환근무라는 제도 안에서 전문성을 갖기란 어려워 보였다. 그런 만큼 회사 내에는 한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보다 여러 업무를 두루 거친 제너럴리스트가 훨씬 많았다. 회사 입장에서는 좋은 인재 일지 몰라도 외부에서도 탐낼 만한 인재의 모습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 역시 이 회사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될 확률이 더 높아 보였다. 재직하는 동안 꾸준히 민영화 이슈가 제기되었는데, 먼저 민영화가 된 KT의 경우 대규모 구조조정이 몇 차례나 있었다. 남의 이야기만이 아니었다. 미래는 알 수 없었다. 하루빨리 경쟁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기업에서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섰다.
 
  몇몇 회사의 경력직 채용에 지원한 결과 S사에 합격했다. S사로의 이직이 최상의 선택은 아니었다. 사기업이기는 했으나 그룹의 핵심사업이 독점사업권을 가진 에너지 사업이었다. 재직 중이던 K사도 에너지기업이었기 때문에 에너지업계에서 전문성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던 반면 경력이 한정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소비재나 IT와 같은 젊고 트렌드에 민감한 업계를 희망했기에 고민이 생겼었다. 여러 고민 끝에 미래는 모르는 만큼 기회가 왔을 때 잡자는 생각으로 S사 입사를 결정했다. 회사의 인지도는 다소 낮았지만 처우나 기업문화, 위치 등 여러 면에서는 좋은 조건이었다. 특히 홍보업무를 확대해나가도록 적극 지원하겠다는 당시 CEO의 약속에 마음이 많이 기울었다.

  K사를 퇴사한 이후 지인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대부분은 내 선택을 존중하고 응원해줬지만 K사를 그만두는 게 아니었다며 나보다 더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K사의 몇몇 상사와 동료들은 나중이 힘이 들면 재입사를 제안하기도 했다. 30대 후반의 신입사원들도 종종 있었던 터라 불가능하거나 어색할 일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수년 안에 그럴 일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운이 좋아 다시 입사를 하게 되더라도 재직했을 때의 고민을 똑같이 반복하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내 고민과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먼 훗날에 증명해 보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K사는 대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기업 중 하나다. S사도 사기업 중의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곳이다. 그 안에서 일하고 있는 수많은 인재들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한 번쯤 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계속 다니고 있다면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이직과 퇴사는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나의 오판이었던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들이 여러 번 머리를 스쳐 지나간 것도 사실이다. 이상적인 생각에 갇혀 현실을 냉정하게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틀린 결정은 아니었다고 믿는다.

  인생은 길다. 당장 내일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긴 인생을 예측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직장도 그렇다. 기술이, 산업이, 정부 정책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만큼 현재의 기업과 직무가 어떻게 변할지 예단하기 어렵다. 그래서 변화에 민감한 조직과 직무에 몸담고 있어야 능동적으로 대응하며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서 안정적인 직장은 양날의 검이다. 지금 당장은 적당한 업무강도에 적당한 월급을 받으며 회사를 다닐 수 있을지 몰라도 위기가 찾아왔을 때 경쟁력을 갖기 어렵다. 수십 년 남은 정년이 언제까지 지켜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안정적인 직장이 인기다. 공무원의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정이 제일의 가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안정적인 직장에 입사해 정년퇴직하는 것이 젊은 사람들의 인생 목표는 아니었으면 한다. 물론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고 상황이 다르기에 이를 목표로 삼았다고 해서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다만 안정보다는 내가 가슴 뛰는 일과 내가 더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찾는 사람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세계적인 투자가 짐 로저스는 많은 이들이 공무원을 꿈꾸는 한국은 미래가 어둡고 투자처로도 매력이 없다고 밝혔다. 꼭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똑똑하고 능력 있는 인재들이 안정과 안주보다는 성장과 도전을 선택할 때 개인과 조직, 나아가 국가까지도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 이마저도 이상적인 발상일지 모르겠으나, 난 이런 길을 선택하고 싶다. 그래서 지금 더 고생하고 있을지라도, 비록 스트레스는 좀 더 받을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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