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지르박의 리듬에 맞춰

할머니는 젊은 시절 대단한 '춤꾼'이었단다.

by 순한 사람

오늘은 할머니가 유독 신이 나 보였다.

주말 늦잠을 자는 바람에 점심이 다 되어서야 찾은 병실. 할머니는 손녀를 기디리기는커녕 혼자 천장을 바라본 채 무언가를 열심히 흥얼거리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현 철 노래 틀어줘!! 나는 현 철 노래가 좋더라고~' 하더니 내가 노래를 틀기도 전에 손가락으로 장단을 맞추며 '봉~선화 ~~ 연~~~ 정'의 가락을 뽑아냈다. 우리는 내친김에 현 철 노래 3곡을 함께 목청을 높여 따라 불렀다. 그리고 나서 할머니는 실컷 놀았다는 듯 '휴~'하고 만족한 표정을 짓더니, 잡자기 나를 쓱 보며 '내가 노래는 잘 못 부르지마는 춤은 잘 췄어!!!' 하며 불편한 몸으로 엉덩이를 씰룩씰룩거리는 것이었다.


할머니와 아빠의 '춤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이야기는 대강 이렇다.

30대 중반의 순자(할머니)는 5번의 연속된 출산과 지독한 생활고에도 타고난 생기를 잃지 않았다. 몸매가 드러나는 검은 치마와 빨간 조끼를 입고 거리를 나서면 동네 남정네들이 '손 한번 잡아보자'며 추파를 던지기 일쑤였다. 순자는 열아홉 나이에 후처로 시집와 술주정뱅이 남편, 어린아이들과 씨름을 하는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순자의 눈에 비친 휴전 후의 서울 거리는 고도성장의 초입에 있었고, 빠르게 유입되는 외국 문화와 패션은 순자를 비롯한 젊은이들의 마음에 뜨거운 바람을 일으켰다.

때마침 미국에서 유입된 '지르박'이라는 춤이 종로 일대의 캬바레를 휩쓸고 있었다. 순자는 평소 어울리던 동네 남정네들과 함께 캬바레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원체 흥과 리듬감이 좋았던 순자는 한 달 만에 지르박을 완전히 몸에 익혔다. '돌리고 돌리는' 춤의 매력과 한 번 상대를 해보려는 사내들의 구애에 순자는 마음이 푹 빠져 버렸다. 춤출 때만은 저녁 무렵의 배고픔과 남편의 매질, 한밤의 외로움 모두가 싹 잊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몰락의 시작이었다. 순자는 저녁마다 어린 5명의 자녀들을 한 방에 가둬두고 캬바레에 출입했다. 순자는 매일 새벽이 다 되어서야 술에 절어 들어와 그대로 뻗어 잤다. 어미의 무관심과 외면에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살이는 바닥이 나다 못해 구멍이 날 지경이 되었고, 5남매는 먹을 것이 없어 이웃집을 전전하며 구걸을 해야 했다. 순자의 춤바람은 막내아들의 갑작스러운 안구파열 사고로 중단되었고, 벌써 노년에 이른 5남매의 가슴에 아직까지도 깊은 상처와 원망을 남겼다.


이야기의 아픈 결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린 나에게 보호자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던 할머니의 서툴기만 했던 젊은 시절, 그 밑에서 고되고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아빠. 이제 90대와 70대 노인이 된 모자는 서로 전하지 못한 어떤 말들을 가슴에 쌓아두고 살고 있는 걸까. 오늘따라 할머니의 손을 주무르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유난히 측은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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