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일상의 기적

소소한 루틴이 삶에 생기를 불어넣다.

by 순한 사람

철없던 시절 나는 막연하게 '자유'를 갈구했다.

돌이켜보면 그냥 '회사 가기 싫다', '드러누워있고 싶다'는 말을 '경제적 자유'라는 거창한 말로 포장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매일 지긋지긋한 직장에서 내 체력과 시간을 갈아 넣지 않아도 되는, 하기 싫은 일 안 해도 되고, 보기 싫은 사람 안 봐도 되는 날은 대체 언제쯤 올까. 그 시기를 앞당기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할까. 임대 소득이나 배당 소득만으로 생활이 가능해서 여행이나 취미 생활을 하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부자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내 연봉으로 그 경지에 이르러면 주식 부동산 투자로 연 얼마씩의 수익을 올려야 하는지 매일 계산하고 또 계산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삶. 그것이야 말로 축복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아픈 할머니 곁을 지키며 점점 생각이 달라졌다.

와상으로 요양병원 신세를 지게 된 할머니에게 병고보다 힘든 것은 '무위고'(할 일이 없는 고통)였다. 점심 저녁으로 나와 부모님이 찾아가 시간을 보내드리지만, 그 외 한나절이 넘는 시간 동안 할머니는 무슨 생각, 무슨 경험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나는 직장에서 보고서를 쓰다가도 문득문득 천장만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들로 외로움을 달래고 있을 할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할머니는 '물리치료'라는 새로운 루틴을 갖게 되면서 조금씩 생활의 리듬을 찾아갔다.

어느 날, 할머니를 가만히 누워만 있게 해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한 것이 아니더라도 무언가 '할 일'을 만들어 주어야 했다. 우선, 물리치료를 일주일에 2번에서 5번으로 늘렸다. 주중 매일 오후 5시 반이면 저승사자 같은 물리치료사가 할머니를 번쩍 들어 휠체어에 태우고 6층 치료실로 향한다. 할머니는 '아파 죽겠다', '치료사가 못됐다', '몸이 더 굳는 것 같다'는 둥 갖은 핑계를 대며 물리치료를 중단시키려 했다. 하지만 어느샌가 매일 저녁식사 후 양치, 기저귀 갈기, 물리치료, 마사지로 이어지는 저녁 루틴에 점차 길들여져 갔다.


'루틴의 힘'은 실로 강력한 것이었다.

저녁 루틴이 생기고부터 할머니는 시간개념과 기억력이 한층 좋아지고, 목소리에 힘이 생겼으며 잠도 잘 잤다. '예측 가능한 하루를 산다는 것'이 사람에게 안정감과 활력을 불어넣는 듯했다. 나는 신이 나서 조금씩 할머니의 일상에 작은 루틴들을 만들어 주기 시작했다. 점심 식사 후에는 팔운동, 약 먹기, 과일 먹기, 기저귀 갈기.. 토요일 아침은 목욕 후 따뜻한 커피 한잔...


나 역시 '삶의 질서'를 찾으려 한다.

할머니의 영향으로 나 역시 출근길 영어공부, 아침 라테 한 잔, 퇴근 후 30분 운동과 같이 작은 루틴을 만들어 실천하고 있다. 모든 루틴을 완수하고 난 날에는 '잘 관리되고 통제된' 느낌이 꽤나 좋았다.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삶이란, 공허함과 혼돈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불행과 크게 다르지 않다. 거창한 무엇을 이루기보다 매일을 묵묵히 살아 나가는 것, 주어진 일들을 해 나가는 것, 그것이 인생 자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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