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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ntlewomen Jul 29. 2021

생각이 길면 용기는 사라지는 법

이상하지. 요즘은 핸드폰을 오래 들여다보질 못하겠어. 하드디스크에 저장 가능한 용량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경고 메시지가 뜬 것 같은 기분이랄까. 젠틀우먼님, 용량부족입니다. 쓸데없는 정보들은 좀 버리세요. 삐.


어제는 퇴근길에 광역버스를 타고 한남대교를 건너다가 무지개를 봤어. 무지개를 본 건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는데 노을이 가라앉은 한강 풍경과 만나 더 아름답더라. 평소 같았으면 '정보중독자'처럼 앱 서핑하느라 창밖을 내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텐데, 잠깐의 멈춤이 가져다준 뜻밖의 황홀경이었어.


회의하다 찍어놓은 울 소재 컬러북, 모듈 수납장 광고 스크린샷, FW 제품 레퍼런스 이미지, 어제 본 무지개, 오늘 출근길에 들른 빵집과 카페. 최근에 찍은 사진과 영상들이 아이폰 앨범에 저장되어 있어. 무려 34,655장의 사진과 3,549개의 비디오와 함께 말이야. 옷장 가득 옷이 있는데도 입을 옷이 없는 것처럼 이렇게 많은 데이터 사이에서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올리고 싶은) 것이 없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지금 내가 기록하고 싶은 건 잘 찍은 사진 몇 장, 무드 있는 영상, 위트 넘치는 카피 한 줄이 아닌 것 같아. 나에게 일어난 일, 그로 인해 하게 된 생각들, 직접적으로 내 삶에 영향을 주는 어떤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 그런데 그 욕망과는 달리 글을 쓰는 것이,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생각'을 꺼내 보인다는 것이 두렵기도 해. 어릴 땐 날것의 언어를 쉴새 없이 잘도 적어댔는데 그땐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정말 나이를 먹어서일까?


네가 그랬잖아. 아마도 세상이 점점 뾰족해져서 그럴 거라고. 날카로운 말들에 찔릴까봐 본능적으로 방어하게 되는 거라고. 부풀려 포장하지 않고, 대단한 목적 없이, 작디작은 생각들을 적다보면 무엇이든 쌓여 있지 않을까? 열 평 남짓한 한옥을 개조한 사무실에 앉아, '생각이 길면 용기는 사라지는 법'이라고 말한 펜싱 해설위원의 말을 되뇌어보며, 오늘은 이만.


당신에게 일어난 일, 당신이 겪은 일을 쓴다면, 당신이 다른 이를 위한 무언가를 구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 <진정한 장소>, 아니 에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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