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남은 남편의 망상

by Geoff Jung

설 전날부터 콧물과 재채기가 시작되더니 컨디션이 뚝 떨어졌다. 급히 약국에서 감기약을 사 먹은 덕분에 설날 일정은 무사히 넘겼으나,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몸살이 시작되었다. 침을 삼키기 힘들 정도로 목이 아픈 게 가장 고역이었는데, 하필 공휴일이라 문을 연 약국조차 없었다. 병원 응급실에 갈 정도는 아니었기에 그저 몸을 따뜻하게 데우며 스스로를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하루가 지나니 인후통은 가라앉았지만, 이번엔 근육통과 콧물이 찾아왔다. 쏟아지는 코를 휴지로 틀어막고 소파에 누워 나흘 동안 넷플릭스 영화와 드라마만 줄창 보았다. 일요일부터는 상태가 호전되었지만, 혹여 남에게 옮길까 싶어 주일 미사에도, 월요일 친구 모임에도 모두 불참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우연히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보게 되었다. 김혜자, 한지민, 이정은 배우가 주연인 작품인데, 작년에 재미 있게 본 ‘천국보다 아름다운'과 '우리들의 블루스’와 출연진이 겹쳐 반가웠다. 세 사람의 연기 합이 참 좋다 생각하며 몰입했다.


드라마 속 주인공 한지민은 해변에서 시간을 되돌리는 시계를 줍는다. 아직 초반이라 결말은 모르겠지만, 그 시계를 보는 순간 자연스레 아내를 떠올렸다. ‘만약 내게 저런 시계가 있다면, 나는 언제로 돌아가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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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한 집 식탁 앞 벽면에는 아내와 찍은 사진 8장을 액자 두 개에 나눠 걸어두었다. 식사하며 언제든 추억할 수 있게 엄선한 사진들이다. 사진 속 아내는 늘 환하게 미소 짓고 있지만, 나는 하나같이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 아내는 생전에 사진 찍을 때 제발 좀 웃으라고 나를 타박하곤 했는데, 그게 왜 그리 어려운지 모르겠다. 나는 평소 웃음이 박한 사람도 아닌데, 카메라 앞에만 서면 입술이 무거워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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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중 가장 오래된 것은 2016년 2월 28일, 빅토리아의 지인 집에서 찍은 것이다. 며칠 뒤면 벌써 10년 전 일이 된다. 세월이 참 빠르다. 만약 초능력 시계가 있다면, 나는 그 사진을 찍던 10년 전 그날로 돌아가고 싶다. 그런 망상을 하다가 또 고민에 빠진다. 이후 10년의 기억을 간직한 채 돌아가는 게 좋을까, 아니면 기억 없이 그저 10년의 시간만을 새로 얻는 게 좋을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아내와 이별한 뒤 내 마음을 짓누르는 이 후회와 자책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착하고 따뜻하며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준 당신이 내 곁에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미처 몰랐어. 공기나 물처럼 당연하게 여기며 무심하게 굴었던 내 미숙함 때문에 당신 마음이 많이 아팠지? 정말 미안해.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그냥 '괜찮은 남편'이 아니라 당신이 자랑스러워할 만한 '좋은 남편'이 되었을 텐데..."


이런 후회를 멈출 수 있을까, 아니면 인간이란 아무리 잘해도 결국 미련을 남기는 존재일까. 사실 이별의 날을 미리 안다는 것도 피를 말리는 일일 것이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 등장하는 대사처럼 무언가를 얻으면 반드시 무언가를 잃는 것이 인생이니까. 아내의 발병을 막고 싶지만, 원인조차 모르는 병을 예방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터다.


그렇다면 미래를 모른 채 돌아간다면 어떨까? 아마 내 본성이 변하지 않는 이상, 나는 예전과 거의 유사한 삶을 되풀이할 확률이 높다. 미리 알아도 괴롭고, 모르면 반복이라니.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내 선택은 '알고 살아가는 것'이다. 비록 이별의 날이 다가오는 게 두렵더라도, 남은 기간 동안 내 본성을 고쳐서라도 후회 없이 아내를 사랑하고 싶다. 행복한 기억을 가득 채우고 나서, 기꺼이 아름다운 이별을 맞이하고 싶기 때문이다.


지나간 10년에 대한 망상을 뒤로하고, 이번엔 오지 않은 10년을 상상해 본다. 아내와 생전에 자주 이야기했던 '실버타운 입주'가 현실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아내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떠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함께 누렸을 평범한 하루를 그려본다.


[내가 꿈꾸는 실버타운에서의 하루]


아침 7시 반, 눈을 뜬다. 아침 준비는 내 몫이다. 계란 삶을 물을 올리고 바나나, 사과, 토마토, 당근, 비트, 브로콜리, 파프리카, 너트, 아마씨, 야채가루를 믹서에 넣어 건강 주스를 만든다. 8시쯤 주방 소음에 아내가 부스스 방에서 나오면, 나는 반갑게 허그를 하고 엉덩이를 토닥이며 묻는다. “잘 잤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응, 잘 잤어”라고 대답하면 아내가 숙면을 취했다는 신호다.


끓는 물에서 정확히 7분을 삶아 만든 반숙 계란, 내 드립 커피와 아내의 과일차를 식탁에 올린다. 나란히 앉아 오늘 일정을 상의하며 식사를 하고 내가 설거지까지 기분 좋게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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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내가 명동에서 대학 동창들을 만나는 날이다. 아내가 예쁘게 단장하는 동안 배웅 준비를 한다. 용인에서 명동까지는 꽤 머니 10시에는 집을 나서야 한다. 단지 앞 버스 정류장까지 손잡고 아내를 배웅한다. 예전엔 지하철을 탔지만, 환승 없이 앉아갈 수 있는 광역 버스가 있다는 걸 알고 난 뒤론 주로 버스를 이용한다. 아내를 태워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빨래를 돌린 뒤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쓴다.


실버타운 식당에서 좋아하는 돈가스로 점심 식사를 하고, 피트니스 센터에서 한 시간쯤 운동을 하고 나니 어느덧 아내가 돌아올 시간이다. 위치 추적 앱을 보니 20분 후 도착 예정이다. 마중 나간 정류장에 멀리 2층 광역 버스가 들어온다. 창가 너머로 보이는 사랑스러운 아내의 얼굴. 반나절 만에 보는 건데 왜 이리 반가운지.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집으로 향한다.


단지 내 4층 사우나 앞에서 "30분 뒤에 봐" 하고 헤어진다. 개운하게 씻고 나와 다시 만난 아내와 6층 식당으로 간다. 저녁 식사 메뉴는 아내가 좋아하는 시래기국과 두부 부침이다. 친구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재잘거리는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즐겁게 식사를 한다.


집에 돌아와 과일을 먹으며 다음 달 예정된 이집트-요르단 여행 계획을 세운다. 오래전부터 꿈꿔온 고대 유적지 여행이라 기대가 크다.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아내가 피곤한지 연신 하품을 한다.


"오늘도 잘 자요." 아침처럼 아내를 안아주며 엉덩이를 토닥여주면 아내도 "당신도요"라고 화답한다. 평온한 하루를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잠자리에 든다.


이런 달콤한 망상을 하며, 나는 오늘도 아내를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