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아내는 같은 야학에서 교사로 알고 지내던 형과 처형이 주선한 미팅으로 처음 만났다. 나는 대학교 4학년, 아내는 3학년 진급을 앞둔 2월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3년간의 연애로 이어졌고, 결혼 후 39년을 함께하며 총 42년을 같이했다. 결코 짧지 않은, 우리가 성인이 된 후의 대부분의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다. 아내가 50년만이라도 채우고 떠났더라면 하는 마음이 가슴 한구석에 맴돈다. 그러나 지상에서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고 스스로를 달래곤 한다.
딸을 출가시키고 2011년에 빅토리아로 이사하면서 우리는 제2의 신혼기를 맞이했다. 돌이켜보면 그곳에서 보낸 우리의 50대가 결혼 생활 중 가장 황금기였던 것 같다. 자녀 양육의 무게를 내려놓고 오롯이 둘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 제3의 신혼기를 시작하기를 기대해 본다.
아내는 간호사였다.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결혼 후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 약 1년간 모교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근무했다. 미국에 간 뒤에도 간호사 일을 계속하려 준비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내 영어가 아내보다 나았지만, 병원에서는 언제나 아내가 앞에 나섰다. 또한 미국 유학 시절에는 대학 선배의 부인이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기도 했다. 미국에 도착한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인데도 겁 없이 가게를 혼자 지켰던 그 당찬 모습이 지금도 대견하게 기억된다.
캐나다에 이민 간 뒤에는 한식당에서 서버로, 또 버거킹 주방에서 일하기도 했다. 사실 그때 우리의 살림이 크게 빠듯하지는 않았지만, 아내는 일부러라도 일을 하며 이민 생활의 외로움을 달래려 했던 것 같다. 체면이나 남의 눈치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내는 착하고 따뜻했지만 동시에 성격이 급하고 몸을 사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반면에 나는 차분하고 한 번 더 고민하는 성격인데, 아내는 언제나 먼저 나아가고 있었다. 덕분에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그 적극성이 우리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예컨대 이사를 하고 짐 정리를 할 때 밤이 되면 나는 일단 자고 내일 다시 하자고 하면, 아내는 몰래 일어나 밤새 정리를 하곤 했다. 또 해외 패키지 여행에서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도 망설이지 않고 가이드에게 질문하던 모습이 그렇다.
친구들 모임에서도 늘 중심에 서 있었다. 새로운 제안을 하고, 의견을 모아 실행으로 옮기는 추진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동창 모임 SNS에도 가장 활발히 글을 올리며, 친구들의 생일을 빠짐없이 챙겼다. 그러나 호응이 적자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하면서도 결국 또 먼저 나서곤 했다.
호기심도 많아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요가, 줌바댄스, 도자기, 섀도우 박싱, 피아노 등 다양한 것을 배웠다. 운동에서는 특별히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수영, 스키, 골프, 자전거, 카약, 래프팅, 스탠딩 보드, 집라인, 패러글라이딩까지 두려움 없이 도전했다. 스카이다이빙도 하자고 했지만, 그때는 내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만류했었다. 지금은 이제 내가 준비가 된 것 같다.
아내와의 삶을 돌아보면, 그녀는 언제나 내 곁에서 나를 이끌어주고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준 사람이었다.
나의 망설임을 채워주고, 나의 부족함을 보완해 주며, 무엇보다도 나를 사랑으로 지켜준 사람이었다. 내가 아내를 만나서 함께 걸어온 42년은 나에게 가장 큰 축복이자 선물이었다.
아내가 남긴 사랑과 추억은 여전히 내 삶 속에서 숨 쉬고 있으며, 앞으로의 길을 살아가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는 날, 우리는 또다시 손을 잡고 미소 지으며 새로운 신혼기를 맞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