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의 세월을 함께했던 사랑하는 아내가 내 곁을 떠난 지도 어느덧 10개월이 훌쩍 넘었다. 함께 살던 공간에 홀로 남는 느낌이 너무나 낯설고 무거워 살던 집을 떠나 이사까지 했지만, 내 삶 구석구석에 스며있는 아내의 빈자리는 여전히 크기만 하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직후에는 참 신기하게도 거의 매일 밤 꿈에서 그녀를 만났다. 마치 홀로 남은 나를 걱정이라도 하듯이, 혹은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곁을 맴도는 듯이 말이다. 그때는 문득 이런 걱정까지 들었다. ‘혹시 나 때문에 하늘나라로 편히 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아내를 만나는 일도 조금씩 뜸해졌다. 내가 이별을 조금씩 견뎌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안심하며 한 걸음 물러선 것일까, 아니면 현실의 시간이 꿈속 기억마저 흐릿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한동안은 오히려 캐나다에 있는 딸의 꿈에 아내가 더 자주 나타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혼이라 해도 한국과 캐나다를 동시에 오가기는 쉽지 않은 모양이라며 씁쓸한 농담을 삼키기도 한다.
꿈에서 아내를 만난 날이라 해도 아침이면 그 내용이 흐릿하게만 남는 경우가 많다.
어떤 날은 ‘아내가 나왔다는 사실’만 기억날 뿐, 무슨 상황이었는지, 어떤 모습이었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꿈을 꾸는 순간에도 이것이 꿈이라는 걸 알아챌 때가 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외친다. '아, 아내다! 오늘은 와줬구나.'
아내는 꿈속에서 여러 모습으로 찾아온다.
가족 여행 장면에 자연스레 함께 있거나, 북적이는 가족 모임 속에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기도 하고.
꿈에서는 당연하게 지나가다가 아침에 일어나서야 '아, 거기에 아내가 있었네.' 하고 깨닫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오늘 새벽, 신기하게도 하룻밤에 두 번이나 아내를 만났다.
첫 번째 꿈속에서 우리는 어린 시절의 아이들과 함께 이름 모를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온천 지역이었는지 몸을 감싸는 물의 온기가 참 편안했다. 물빛은 예전 캐나다 록키 마운틴에서 보았던 그 맑은 옥색이었다. 특별한 대화는 없었지만, 그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그러다 장면이 바뀌더니 아내가 패션 잡지 한 권을 꺼내 내게 보여주며 평소처럼 말했다. “여보, 이런 거 참 좋은 것 같아.” 꿈속에서도 그 말투와 표정이 너무나 익숙해서 나는 그저 빙그레 웃고 말았다. 깨어나 생각해 보니 그건 어떤 특별한 장면이 아니라, 생전의 그 사람이 늘 보여주던 일상 그대로였다.
두 번째 꿈은 더 현실에 가까웠다. 나는 책상 아래를 청소하고 있었고,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베이글 하나를 가져와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이거 먹고 데어리퀸(Dairy Queen)에 같이 다녀옵시다.” 그 제안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나는 주저 없이 “그럽시다.” 하고 말했다.
눈을 뜨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 장면들이 기억에 또렷이 남았다. 돌이켜보니 나는 거창한 이벤트나 특별한 순간보다, 이런 사소하고 평범한 풍경들이 더 사무치게 그립다. 좋은 곳에 가거나 대단한 일을 했던 날이 아니라, 그저 마주 앉아 밥을 먹고, 간식을 나누고, 별 이유 없이 함께 집을 나서던 그런 날들 말이다.
요즘은 아내의 사진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왜 이렇게 예뻐 보이는지 혼잣말을 하게 된다. '아내가 저렇게 예뻤었나?'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미세한 표정들이 눈에 들어오고, 당연하게 여겨 느끼지 못했던 따뜻함이 이제야 온몸으로 전해진다.
문득 궁금해져 ChatGPT에게 물었다. “사별한 남편들은 아내의 사진을 보면 예전보다 더 예쁘게 느끼나?” GPT는 일반적으로 그렇다며 그 심리학적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사별 후에는 기억이 따뜻하게 정제되고 사랑이 더 또렷해지면서, 익숙함에 가려졌던 소중함과 아름다움이 뒤늦게 깊이 느껴지기 때문이란다. ‘아, 나만 유별나게 느끼는 감정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소중한 존재가 떠나고 나서야, 그 사람이 얼마나 깊이 내 삶의 결마다 스며 있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는 모양이다.
흔히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꿈속에서 말을 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내 꿈속의 아내는 여전히 말을 건네고 먹을 것을 챙겨준다. 그 당연했던 평범함이 이제 내게는 가장 간절한 그리움이 되었다.
이제 아내에 대한 기억은 나를 찌르는 가시가 아니라, 가끔 찾아와 조용히 머물다 가는 따뜻한 꿈이 되었다.
오늘도 나는 잠들기 전 사진 속 아내에게 속삭인다. “여보, 오늘은 꼭 꿈에 와줘요.” 내일 아침, 다시 한번 그녀의 따뜻한 미소를 품고 깨어날 수 있기를 기도하며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