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바르셀로나에서 로아에게

by 로아 할아버지

지난번 바르셀로나에서 로아에게 소식 전한 지 벌써 10일이 흘렀구나. 그간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주로 스페인의 남부인 안달루시아 지역을 돌아보고,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단다.


많은 것을 보았고, 다양한 음식을 먹어 보았고, 자연스럽게 이곳 사람들을 만나면서 세상을 돌아다니는 맛과 멋을 경험했단다. 큰 행선지는 정해 놓았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 둘만의 여행이라 마음 가고 발길 닿은 대로 다니다 보니, 보고 듣고 맛보고 만났던 일들이 질서 있게 차곡차곡 쌓이지 않고 제멋대로 머리와 마음속에서 뒹굴고 있구나. 여행 막바지에 한국에서의 안타까운 소식까지 접하게 되어 마음이 온통 엉킨 채 귀국을 맞이하게 되었구나.


바르셀로나 공항. 한국행 출발시각까지는 한참 여유가 있어서 카페에 들러 차분히 마음을 정리해 본단다. 이럴 땐, 커피가 제격이구나. 이제야 마음의 부유물들이 서서히 체에 걸러지고 알갱이들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번 여행에서의 의미 있는 순간들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귀국길 공항에서의 여유를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이유이지.


스페인의 진정한 매력은 다름 아닌 이곳 사람들의 인간적인 따뜻한 배려와 열린 마음이더구나. 로아도 나중에 크면 스페인의 많은 문화유산 탐방 못지않게 꼭 경험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여행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여행하는 내내, 이미 스페인을 여러 차례 다녀온 로아 엄마 아빠가 누차 당부한 것이 소매치기 조심이었단다. 스페인을 여행했던 주변의 여러 사람도 소매치기 조심하라는 당부를 빼먹지 않는 것을 보면 맞는 내용인 듯해. 실제로 마드리드의 스페인 광장에서 할머니도 소매치기 당할 뻔했으니까. 여행하면서 그런 일을 당하면 여행을 망치게 되니 큰일이긴 해. 그런데 할아버지가 이번 여행하면서 곳곳에서 만난 이곳 사람들의 속살은 참 따뜻하고 맑더구나.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읽었던 그리스 여행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스페인 사람들을 정이 많고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열정적인 인도주의자라고 불렀더구나. 녹녹치 않은 삶속에서도 타인과 사회에 대한 기사도적 휴머니즘을 추구한 돈키호테의 후예라고나 할까? 할아버지가 경험해본 바로는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의미를 찾는 산초 판사 정신도 있지만, 인간적으로 따뜻한 마음과 꾸밈없이 사람을 대하는 열린태도가 인상적이었어.



자하라 레스토랑에서의 일이야. 멀리서 보든 내부에 들어와서 보든 자하라는 마을은 무심히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곳이더구나. 멀리서 보면 구름 위에 떠 있는 마을처럼, 높은 언덕 허리에 하얀 집들이 자리 잡은 자하라 마을은 앞으로는 넓은 호수를 내려다보고 뒤로는 언덕 정상에 중세시대에 지어진 성채가 남아있는 독특한 곳이야. 엄마 아빠가 이곳을 추천한 이유를 알 수 있겠더구나. 호텔에서 체크인을 한 후 바로 성채와 마을을 들러보고 휴식을 취한 뒤, 할머니와 가파른 언덕길을 걸어올라, 마을 꼭대기 광장에 있는 식당을 찾았지.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해도 되지만, 현지 주민들을 만나보는 데는 광장의 식당만 한 곳은 없기 때문이야.


여행철이 아닌데도, 각 식당의 야외 테이블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어. 영어 메뉴를 갖춘 곳을 겨우 찾아 마침 자리가 나서 주문을 하기 시작했어. 서빙해주는 남자 직원은 더듬더듬 영어로 겨우겨우 설명해주면서도 웃음과 진심을 담아 응대해주었어. 무언극 하듯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먹고 싶었던 3가지 요리를 무사히 시키고 마침내 나온 음식은, 정말 훌륭했어. 이 남자 직원처럼 솔직 담백하고 진심이 담긴 딱 할머니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맛이었단다. 느긋하게 음식을 즐기는 동안, 혼자서 많은 손님을 정신없이 서빙하면서도 이 직원은 우리 자리를 지나갈 때마다, '프렌즈'라고 부르면서 스페인어로 계속 말을 거는 거야. 스페인어를 모르는 이 할아버지 짐작으로는 맛이 어떻냐, 더 필요한 것은 없냐고 물어오는 것 같았어. 사실 서로 마음이 통하면, 언어 불통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게 되지. 표정과 제스터만 보면 무슨 듯인지 대게 이해하니까 말이야.


이곳 레스토랑 오너 셰프와의 교감도 이런 식이었어. 식사를 마치고 식당 안 계산대로 가니 이 식당 오너 셰프가 반갑게 맞아주면서 음식이 어땠는지 물어보는 것 같아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지. 셰프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고는 잠깐 기다리라는 제스처를 하고는 주방으로 사라졌어. 다시 모습을 나타냈을 때는 손에 노란 액체가 담긴 병이 들려있었고, 그것을 잔에 따라주면서 마셔보라는 제스처를 했어. 이곳 특산품인 올리브유 향이 짙게 나는 독특한 술이었어. 내 흡족한 표정을 보더니만 잔 두 개를 더 꺼내 들고, 한 잔은 밖에 계신 할머니를 가리키면서 가득 따라 주었어.


서빙해주던 직원이나 오너 셰프와 언어로 소통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음식 맛 못지않게 우리를 대하는 그들의 마음 맛을 잘 맛보았던 경험이었단다. 마음 소통이 된다면, 언어불통으로 인한 불편은 아주 사소한 일일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지.



자하라 식당에서의 경험이 시골 인심 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곳 스페인에서는 음식이 바로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더구나. 세비야란 큰 도시의 타파스 거리에서 경험도 그렇고, 마리아의 가정집 정찬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였단다.


밤만 되면 사람들로 넘쳐나는 세비야의 타파스 거리, 그중에서도 현지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는 보데가 산타 크루즈라는 타파스 집에서 저녁 식사하기로 한 것도 현지인들의 일상의 모습을 경험하기 위함이었어. 평일 저녁임에도 그곳은 이미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실내외 할 것 없이 사람들로 북적이었단다. 용감한(?) 할머니는 주문할 음식을 스페인어로 그리듯 쪽지에 적어 사람들 틈새를 비집고 주문 카운터에 들이밀어 놓고, 할아버지는 야외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마침 서서 먹는 한 자리가 비는 것을 확인하고 잽싸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단다. 할머니가 걱정 되어 창문을 통해 주문 카운터를 들여다보니, 그 정신없는 복잡한 상황에서도, 주문받는 직원은 웃으면서 친절하게 할머니 주문을 확인해주며 음식이 제대로 나오는지 챙겨주는 것을 보고,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사람들이 많다 보니 주문한 음식이 나오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고 할머니는 직접 기다렸다가 음식을 가져와야 했지. 시간이 갈수록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더 늘어나고 있었어. 그때, 저편 야외 테이블에서 음식을 먹던 여성이 내게 계속 손짓을 보내는 거야. 처음에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하는 손짓이겠지 하고 무시했지. 다시 보니 내게 웃으며 고갯짓 하면서 오라는 거야.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일단 가보니 우리 주문한 음식이 나오면 바로 자신의 테이블로 가져와서 앉아서 먹으라는 거야. 그때까지 자리를 지켜주겠다면서. 그곳에서 외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할머니 할아버지밖에 없었고, 우리가 서서 먹는 것이 안 돼 보였을까? 주문한 음식을 들고 테이블에 가져가니 우리에게 자리를 넘겨주었어. 서로에게 낯선 이방인이지만 우리는 스스럼없이 가볍게 잠시 대화를 이어갔고, 반갑게 인사하고 떠나는 그 여성 일행을 보면서 오히려 할머니와 내가 더 마음이 따뜻해졌던 순간이었단다.


식사자리를 통한 낯선 사람들과 열린 소통과 관계 맺기는 여러 번 있었단다. 가정집 정찬 프로그램도 그중 하나였지. 스페인 여행을 준비하면서 스페인 사람들의 음식 문화를 제대로 체험해 보고 싶어서 이 프로그램을 사전에 예약해 두었어. 비용이 만만치 않았지만, 할머니에게도 그런 경험시켜 드리고 싶었고. 약정한 시간에 호스트인 마리아의 집에 도착해서 7코스 정찬을 하나하나 맛보았단다. 음식 맛은 당연히 좋았지. 맛도 맛이지만, 자신이 준비한 '진정한' 스페인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어. 정성과 자부심으로 준비한 요리를 함께 나누는 일을 마리아는 대단히 소중히 생각하더구나. 식탁 뒤 한 면에는 그동안 다녀간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로 가득해.


우리를 대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면서 음식이 사람 사이의 관계와 소통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해 준 값진 경험이었단다. 그날은 할머니 할아버지 둘만이 손님이었고, 음식을 먹으면서 서로 음식뿐만 아니라, 가족과 문화, 살아가는 이야기 등을 주제로 이야기하다 보니 원래 약정한 2시간을 훌쩍 넘겼단다. 마리아는 자신의 '비밀' 요리법을 기꺼이 그 자리에서 할아버지 이메일로 보내주기도 했단다. 아무에게나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하면서 말이야. 내게 ‘특별히’ 해준 레시피 공유로 할아버지는 당연히 기분이 더욱 좋아졌지.


이 요리법으로 할아버지가 준비해주는 스페인 음식을 로아는 기대해도 되겠구나. 평소 우리 로아가 빨리 크기를 바라는 이유에는 음식도 들어있단다. 이 할아버지가 정성껏 해주는 음식을 우리 로아가 좋아하고, 그 모습을 보면서 함께 식사하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 할아버지는 참 행복하다고 생각해 왔어. 이번 스페인에서의 경험으로 ‘함께 밥 먹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단다.



스페인 사람들의 따뜻한 배려와 열린 마음이 식사 자리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야. 우리 같은 낯선 방문객을 말은 통하지 않지만, 손짓 발짓하며 순박한 웃음으로 맞이하던 알고도날레스 시골의 잡화점 여주인, 비수기임에도 할머니와 할아버지만을 위해 정성껏 가이드 투어 해 준 자하라의 올리브 농장의 젊은 청년 쁘락, 지중해를 바로 눈앞에 품은 가장 좋은 방을 배정해 주고 직원일동의 축하 메시지를 담아 샴페인으로 할머니 할아버지의 결혼 30주년을 축하해 준 네르하 파라도르 호텔의 배려 등등. 외국에서 온 여행객으로서 인간적인 대접을 참 잘 받았던 기억을 추려내자니 마음이 따뜻해지고 풍요로워지는구나.


비행 탑승시간이 다가오면서 벌써 우리 로아가 많이 보고 싶어지는구나. 그런데,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구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이곳에서 여행하는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안타까운 사건이 귀국을 앞두고 마음을 가로막는구나. 로아가 자라고 성장할 우리나라도 따뜻한 마음과 진심은 스페인 사람들 못지않지만, 어린이와 젊은이가 배려와 보호, 생명존중을 받는 진정으로 따뜻하고 안전한 사회가 언제 실현될 수 있을지 생각하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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