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만 8개월이 되는 로아가 요즈음 매우 분주하다. 양 팔과 다리로 기기 시작하면서 거실 바닥을 운동장인 양 두루두루 훑고 다닌다. 한 곳에만 누워있거나 엎어져 있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앉은키 높이로 보니 마냥 신기한 모양이다. 덩달아 어른들은 한시도 로아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손에 잡히는 대로 입으로 가져가기 때문이다. 주말에는 엄마 아빠가 부엌에 있는 동안 로아는 구석에 놓여있던 손 소독제 용기의 노즐을 입으로 넣는 ‘사건’이 있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있던 오늘 아침에는 커피를 내리는 잠깐 사이에 거실 구석에 놓인 조그만 화분 하나를 뒤엎고, 흙을 입으로 막 가져갈 참이었다.
특히, 소리가 나는 것들은 로아의 표적이다. 음악을 틀어두면, 오디오 기기와 스피커는 영락없이 로아의 관심과 매서운 손길을 피하지 못한다. 동화책도 그렇다. 현아가 로아를 위해 구입하고, 구해오고, 빌려오는 책 대다수가 사운드북이다. 소리 버튼을 누르면 이야기나 노래, 효과음이 나온다. 사물을 인식하는데 주로 감각에 의존하는 나이의 로아이기 때문에 사운드북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 거실 바닥에서 놀다 싫증이 나거나 졸리다가도, 자주 보고 들었던 사운드북을 발견하면 눈이 다시 초롱초롱해지면서 버튼을 누르려고 애쓴다.
아직은 로아에겐 책이 무엇인지 알 턱이 없다. 다만, 버튼을 누르면 노래나 이야기, 동물 소리가 나오는 신기한 물건이다. 때론 혼자서도 눈과 귀, 손가락 촉감으로 책 속의 그림을 쫓으면서 옹알이로 대화하기도 한다. 장난감과 더불어 책은 로아가 가장 자주 입으로 확인하는 물건이기도 하다. 입으로 물고 있기에는 딱딱하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고 크기도 해서 입으로 가져간 뒤 이내 떼어내지만 말이다.
지난주부터 당분간 로아와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이에 따라 로아와 함께 책 보는 시간도 늘어났다. 함께 책 읽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영유아의 책 읽기와 연관해서 궁금증이 생겨났고 로아에게 실험을 해보고 있다. 특별히 좋아하는 책의 종류가 있는지? 어떤 책에 집중을 더 잘하는지? 보이는 곳에 책을 두면 로아가 스스로 관심을 보이는지? 사운드북의 녹음을 들려주는 것과 내가 읽어주는 것에 관심의 정도 차이가 있는지와 어느 쪽에 더 흥미를 느끼는지 등등이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미 로아에게는 선호하는 책들이 생겼고, 당연히 그 책들에 집중도 다 잘한다. 내가 제일 궁금하고 관심을 두는 것은 사운드북의 유용성 여부다.
사운드북, 이용해도 될까, 아님 아예 이용하지 말아야 할까의 취사선택의 문제는 아니다. 사운드북은 분명 소리가 나오지 않는 일반 책 보다 장점이 있다. 성우들의 낭랑한 목소리와 극적인 대화 소리, 실제의 동물 소리, 노래와 음악 소리, 적절한 효과음은 아기들의 청각을 자극하고 관심을 끄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며, 로아에게서도 확인하고 있다. 그런데도, 로아에게 사운드북을 활용하면서 문득문득 의문이 생겨났다. 물론, 이런 의문들은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의문임을 배제할 수는 없다.
첫 번째 의문은 사운드북에서 읽어주는 속도가 로아와 같은 영유아에게 맞는지 아닌지 여부다. 요즈음은 각 페이지나 이야기 별로 버튼을 따로 마련하거나 등장인물들이나 동물 사이의 대화를 들려주는 별도의 ‘이야기 극장’ 버튼을 둔 책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운드북은 한번 시작 버튼을 누르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그대로 읽기가 진행된다. 스토리를 읽어주는 사운드에 집중하다 보면 로아는 펼쳐진 페이지에 나오는 그림을 제대로 못 보고 페이지를 넘긴다. 결국, 나는 사운드 기능을 끄고 로아에게 펼쳐진 그림을 찬찬히 짚어가면서 또박또박 발음해주고 스토리텔링도 내 목소리로 들려준다. 스토리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로아에겐 나의 로아와 함께 '읽는' 방법이 로아의 인지와 성장 속도에 맞는 일임을 매일 확인한다.
두 번째 의문은 사운드북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와 소리가 직접 읽어주는 것에 비해 로아에게 흥미와 집중도를 지속시켜주는지 아닌지다. 언뜻 생각하면, 노래나 효과음이 나오고 성우들의 극적인 목소리가 아기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책에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그런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로아의 경우 대개는 할아버지와 함께 천천히 책을 한 장 한 장 펼쳐 그림을 짚어가면서 직접 읽어주는 이야기에 더 집중을 잘한다. 집중한다는 것은 흥미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아는 요즈음 오전과 오후 2차례 하는 할아버지와 함께 하는 스토리 타임에서 한 자리에서 30분 정도는 어렵지 않게 소화한다. 로아는 표정 변화와 함께 힘찬 옹알이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곤 한다.
세 번째 의문은 스토리북 들려주기와 직접 책 읽어주기에서 아기와 양육자 사이의 애착 형성에 차이가 있는지 여부다. 로아와의 두 가지 책 읽기 경험에서 보면 당연히 차이가 있다. 아기에게 책 읽어주기를 육아에서 중요한 요소로 전문가들이 드는 이유에는 아기와 양육자 사이의 애착 형성이 함께 책 읽기 활동을 통해 이뤄지지 때문이다. 스마트폰을 집안에서도,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도, 손에서 떼지 못하는 요즈음의 ‘핸드폰’ 양육자에게는 사운드북은 편리한 수단으로 보인다. 아기를 무릎에 앉혀두고 사운드북 소리를 들려주는 사이에, 자신은 스마트폰으로 정보검색을 하거나 SNS를 확인하고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운드북이 일거양득인 셈이다. 로아가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 나도 때때로 ‘일거양득’을 누렸다. ‘핸드폰’을 현명하게 그리고 표시 안 나게 잘 활용하지 못했던 나는 로아에게 금방 들키곤 했다.
지금은 로아가 깨어있는 시간에는 아예 ‘핸드폰’이 없다. 당연히 책 읽어주기에도 더욱 집중이 잘된다. 무릎에 앉힌 로아를 꼭 껴안아 주고, 얼굴을 마주치며 말을 걸어주고, 많이 많이 웃어준다. 로아는 책 읽는 시간을 좋아하고 집중도 훨씬 잘할뿐더러 몸을 돌려 할아버지를 보면서 두 팔을 벌려 안아달라는 몸짓도 자주 한다. 로아도 좋고, 이 할아버지도 좋고. 내게는 이거야말로 진짜 ‘일거양득’이다.
유아발달 이론에서 유아와 책 함께 보기는 유아의 인지와 언어, 사회성 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게속해서 강조해 왔다. 최근에 사운드북이 대세이지만, 근래에 발표된 유아 책 읽기 관련 연구에서도 사운드북에 초점을 두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을 보면, 이야기 들려주기보다는 이야기 읽어주기가 여전히 중요한 관심 주제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책 함께 보기 방법으로 사운드북의 녹음된 스토리 활용보다는 직접 읽어주기가 여전히 제시되고 있다. 세계적인 출판사인 <펭귄>의 유아/아동 서적 전문부서인 유서 깊은 ‘레이디버드’는함께 읽기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준다. 아기와 유아들은 먹고 잠자는 일이 일정한 시간과 리듬을 따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일단 책 읽어주기를 시작하면 먹고 잠자는 일처럼 아기의 일과에서 빼먹지 말고 지속해서 실천할 것을 강조하면서, 읽어주기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책에 나오는 중요한 사물이나 동물, 사람을 손가락으로 일일이 짚어가면서 천천히 그리고 정확히 발음해 줄 것을 주문한다. 사운드북의 녹음된 소리 들려주기 방법으로는 실천하기 불가능한 주문이다. 오직, 양육자가 영유아와 함께 책을 펼쳐놓고 직접 읽어줄 때만 가능한 일이다.
‘레이디버드’에서 추천하는 책 선정과 책 두는 장소 역시도 읽어주기를 전제로 하고 있다. 영유아에게 적정한 책은 오감을 구체적으로 자극해 주는 책으로, 양육자는 유아가 직접 손으로 책을 만지며 눈으로 천천히 그림을 살필 수 있도록 해줄 것을 권고한다. 오감을 자극하는 책에 로아도 확실히 관심을 더 둔다. 예를 들어, 동물의 털과 유사한 촉감을 가진 털을 동물 그림에 일부 붙여 놓는다든지, 페이지를 열면 접혀있던 부분이 펼쳐지면서 동물이 갑자기 입체적으로 나타나서 시각을 자극하는 책이다. 청각 자극을 위한 사운드북 활용은 바람직할 것으로 보여 로아에게도 가끔씩 들려주기도 한다. 로아가 사운드북을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들려주기와 읽어주기 둘 다 적절하게 병행하고 있다.
집 안에 책을 놓아두고 읽어주는 영역을 정해두는 것 역시 권고하는 이유는 아기들이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 놀다가도 찾아가서 책을 만져보고 열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로아 책도 거실 바닥에 일부 쌓아두는 이유다. 일정하게 책 읽어주는 장소를 정해두면 ‘아, 지금 책 읽는구나’하고 영유아들이 먼저 알아차릴 수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생체리듬에 따른 루틴에 의존해야 심신이 안정되는 로아를 보면서 책 읽기 습관 형성 역시도 같은 장소에서 반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로아의 책 읽기 장소는 바닥이 아닌 안락의자다. 내가 로아를 품에 안고 둘 다 편안히 30분을 집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편안한 곳이어야 한다. 로아가 좋아하고 읽어줄 책은 이 안락의자 바로 옆 탁자에 쌓아두고 있다. 로아가 거실 바닥에서 놀다가 할아버지가 안고 안락의자로 다가가면 로아의 눈은 벌써 책으로 쏠리며 환하게 웃는다. 할아버지와 함께 책 읽는 시간임을 아는 것이다. 때로는 로아가 이 할아버지 손을 잡고 안락의자로 이끌기도 한다.
로아는 앞으로 지금보다도 더 디지털화된 세계에 살게 될 것이다. 정보나 책도 디지털화된 매체와 디바이스를 이용할 것이다. 그런데도 왜 로아에겐 종이책이 필요할까? 내가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에 익숙하고 개인적으로 아날로그를 더 좋아해서일까 하고 자문해보기도 한다. 단순히 나의 개인적인 성향과는 별개로, 세상이 디지털화될수록 이에 비례해서 아날로그적 감성 역시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다. 디지털 세대인 젊은이들이 요즈음 구세대보다도 더 열성적으로 ‘구닥다리’ 필름 카메라를 구입하고 레코드판 수집과 듣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현상이 이를 말해준다. 한국의 젊은 세대만의 현상이 아닌 세계적인 추세인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종이책은 몰락할 것이다. 이제는 전자책의 시대다.”
이 그럴듯한 선언이 나온지 벌써 2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으며, 그동안 세상은 더욱 디지털화 되었지만, 이 선언은 여전히 현실화되지 않고 있다. 전자책에 밀려 감소하던 종이책은 2010년대 중반부터 다시 늘기 시작했으며, 전자책은 오히려 감소세로 돌아섰다. 요즈음 그동안 하나 둘 사라졌던 동네 책방들이 여기저기 다시 생겨나는 것을 보면 당분간 종이책은 생명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종이책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로 뇌를 자극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종이책과 전자책의 사유방식을 들고 있다. 우리 뇌는 전자책을 TV 화면처럼 이미지들의 배열로 단순화해서 받아들이며, 이 경우 우리 뇌는 수동적이 되며 심지어는 정지 상태로 된다고 한다. 우리가 텔레비전 시청하면서 느끼는 ‘생각 없음’의 상태다. 반면, 우리 뇌는 종이책을 읽는 과정에서 뜻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질문하고, 생각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고 한다. 전자책과 종이책이 사유의 유무를 결정한다고 단순화해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상당 부분 공감이 간다.
이 사유의 힘, 영유아기부터 길러줘야 할 진정한 능력임을 믿고, 오늘도 로아를 무릎에 앉히고 품에 안고 ‘함께 책 읽기’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