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아, 너 왜 이렇게 엄마 마음 설ㄹ게 하니!"
로아가 생후 3개월이 채 되지 않던 날이었다. 내가 로아 양육에 참여한 지 2주째로 아직은 육아 ‘수습 기간’이었다. 육아도우미로부터 육아에 필요한 실질적인 노하우를 배우고 실습해가면서, 로아가 깨어있는 시간에 돌보는 일은 전적으로 내게 주어졌다. 손녀를 사랑하는 마음과 내 책임 아래 온종일 시간을 같이 보내주는 일의 간격은 생각 외로 컸다. 내내 누워 지내는 어린 손녀와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 아직은 막막했다. 그나마 내게 익숙한 것은 책 읽어주는 일이었다. 내가 평생 해온 일이 그렇고, 로아 아빠가 아기였을 때의 경험도 쉽게 되살릴 수 있었다.
마침 현아가 친구로부터 받아 둔 동요 사운드북 한 세트가 있었다. 로아가 좀 더 크면 들려주려고 책장 한 켠에 보관중이었다. 그중 한 권을 집어 들고 로아 옆에 누었다. 녹음된 노래를 먼저 틀어주었다. 표정이 상기되고 팔다리 동작이 활발해진다. 음악 때문이려니 했다. 이번에는 책 속의 그림을 짚어가면서 내 목소리로 스토리텔링 해주었다. 3개월 된 아기가 책 이야기에 집중은커녕 관심이나 가질지 기대도 없이 그저 해본 것이었다. 동요로 초롱초롱해진 눈을 로아는 여전히 펼쳐진 책에서 떼지 않는다. 나의 목소리 톤 변화에 따라 로아의 표정도 바뀌고 손과 발의 파닥파닥 동작이 더욱 역동적으로 되었다. 전혀 의외였다.
도우미 분이 내게 간식을 주셔서 잠시 중단했더니 로아가 짜증을 부린다. 평소에 좀처럼 보기 드믄 짜증이었다. 그래서 다시 누워 노래를 틀어주고 스토리텔링을 해주니 이전의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간다. 다시 중단해 보았다.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스토리북으로 돌아가니 표정과 반응도 이내 회복되었다.
많은 가정의 아기들을 돌봐오셨던 도우미 분도 로아의 집중력과 반응이 의외였고 신기했던 모양이다. 현아가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그 얘기를 들려준 것이다.
‘로아, 너 왜 이렇게 엄마 마음 설레게 하니!’
평소에 로아가 집중력이 좋다고는 생각해왔던 현아지만,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엄마의 마음이 더해져 설렘으로 벅찬 듯하다.
그다음 날도 로아와 책 읽기를 해보았다. 어제의 로아 반응이 나로서도 의외였고 우연이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다른 책을 이용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집중력을 보였고,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펼쳐진 양쪽 페이지 그림을 연신 살핀다. 중간에 일부러 책을 덮고 반응을 기다려 보았다. 즉각, 울상에 짜증을 낸다. 다시 펼치고 동요를 틀어주고 내가 스토리텔링을 이어간다. 로아의 반응은 어제보다 더 적극적이다. 표정 변화와 팔다리 파닥파닥 모드에 이번에는 이따금 옹알이까지 한다.
30여 분을 한 권의 스토리북에 집중하는 로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현아 수현이가 매일 올리는 영상에서도 로아의 집중력을 확인하곤 했지만, 책 읽기에 이 정도의 집중을 보일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영유아 발달단계 이론을 찾아 확인해 본다. 아동의 언어 지각 능력은 태어날 때부터 갖고 나오는 것으로 보고 되지만, 3개월의 영아들은, 그것도 절반만이, 소리의 방향만을 구분하며, 시각은 사람 얼굴 중 눈을 중심으로 희미하게만 파악할 뿐이라고 한다. 4개월이 되어야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면 미소로 반응하기 시작한다고 알려져 있다. 피아제의 인지발달 단계에서도 4개월까지는 자신의 신체를 제외한 외부적인 사건에 흥미를 느낄 능력이 없는 ‘일차 순환 반응기’로 보고 있다.
만 3개월에 접어든 로아가 책 읽기에 보이는 집중과 반응은 로아만의 특징일까? 이 손주바보 할아버지의 착각일까? 같은 또래 영유아들도 같은 집중과 반응을 보일까? 로아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든 영유아는 자신만의 특별한 재능과 능력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한다. 문제는 우리 어른들의 무심함과 섣부른 판단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유아들의 재능과 능력은 대체로 겉으로 잘 드러나거나 발현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어른은 ‘아기인데 아직 뭘 알겠어’하며 주목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싶다. 내가 그랬다. 로아와 함께 책 읽기는 내가 유일하게 익숙해서 시도한 우연적인 일이었다. 이 ‘우연의’ 시도로 로아아게 잠재해 있던 능력이 겉으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 '우연'은 우연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일부 전문가들은 생후 3개월을 함께 책 읽기 시작 시점으로 보고 있었다. 아기에게 책 읽어주기 시작하는 시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면서, 구체적으로는 생후 3개월에서 6개월 정도에 시작할 것을 권고한다. 유아/아동 서적 전문부서인 ‘레이디버드’에서도 영유아들이 거울이나 장난감 같은 개별 사물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는 시점이 책 읽어주기를 시작하는 적절한 시점으로, 그 시기는 영유아마다 차이는 있지만, 빠르면 생후 3개월부터 시작되고 대개는 6개월 이내에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때의 '우연'에 의한 로아와의 책 읽기 경험으로 내가 얻은 교훈은 이것이다. 영유아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혹은 수치로 계량되지 않는 잠재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아직 아기인데’란 속단을 버리고 아기의 오감 자극을 다양하게 시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함께 책 읽기가 그렇고, 음악 들려주기나 대화하듯 말 걸기, 잠자리나 우유 먹이는 시간에 스토리 들려주기 등도 시도해볼 만하다. 이런 시도는 그때의 ‘사건’ 뒤로 로아가 8개월이 막 지나는 지금까지 꾸준히 실천 중이다. 그 시도들이 로아의 인지나 정서발달에 얼마나 효과가 있을것인지는 알수 없고, 그럴 필요도 크게 느끼지 않지만, 이러한 시도에 로아가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보람이 있다.
전문가들은 영유아의 나이에 맞는 책을 읽힐 것을 권고한다. 특히, 한국보다는 서양의 경우가 더 세부적이다. 만 1세까지의 영유아는 책 속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지만, 얼굴이나 밝은 톤의 색상에 관심을 보이고 각기 다른 형태도 구분 가능하다고 하니, 이 점에 유의해서 책을 선정할 것을 권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생후 3개월에서 6개월의 영유아들에게는 아기에게 익숙한 그림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밝은 색상의 그림이 있는 책이 권장된다. 책 속의 그림과 사물을 연계시키기 시작하며, 특정 그림이나 페이지, 책에 관심을 보이는 생후 6-12개월의 영유아들에게는 영유아에게 익숙한 아기나 장난감 그림이 든 책이나 잠을 자거나 목욕하는 것과 같이 영유아들이 매일같이 하는 일상적인 장면의 그림이 실린 책이 추천된다.
육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미천한 나로서는 책 추천이나 책 읽기 방법을 포함하여 육아전문가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참고도 많이 한다. 다만, 그들의 의견과 주장을 절대적인 것으로 삼지는 않는다. 수치로 계량화하거나 이론으로 정립할 수 없는 잠재능력이 모든 영유아들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땅속 깊이 묻힌 금맥이 최고의 지질학자나 첨단 장비로도 발견되지 않는 것과 같이 말이다.
전문가들의 책 추천도 그렇다. 로아에게도 전문가들의 권장 도서와 함께 그보다 더 복잡한 책을 함께 보고 읽어준다. 내 방법이 잘못됐는지 모르지만, 로아는 나이에 맞는 추천도서에 특별히 관심과 집중을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긴 스토리와 많은 그림이 나오는 책에 관심과 집중을 더 보이기도 한다. 그런 책의 경우 한권의 책으로 30분을 꼬박 보내도 관심과 집중이 흩어지지 않는다.
영유아기에 ‘맞는’ 책을 고르는 것이 옳고 안전한 선택일 것이다. 다만, 로아와의 책 읽기 경험을 통해 이에 못지않게, 아니 이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는 생각이다. 영유아와 온전히 함께하고자 하는 양육자의 마음과 자세, 방법이다. 영유아기의 책 읽기는 인지와 정서, 언어 발달에 중요하다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 내가 로아와 함께 책 읽기를 통해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를 통해 로아가 할아버지와애착관계를 형성하고 책 읽기 습관을 익히는 일이다.
함께 책 읽기를 통한 영유아와의 애착과 신뢰 관계, 영유아의 책 읽는 습관 형성에는 ‘언제’ 혹은 ‘무엇을’ 보다는 ‘어떻게’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어떻게’는 영유아의 잠재능력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할 때 가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