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아도 좋고, 할아버지는 더 좋고
“로아가 깨어있을 때는 빨리 잠들었으면 좋겠고, 로아가 자고 있으면 너무 예뻐 빨리 깼으면 좋겠어요.”
“요즈음 로아 너무 이쁘지?” 지난 주말 현아와 통화에서 아내가 던진 말에 돌아온 답이다. 아내로부터 그 말을 전해 듣고 웃음이 나왔다. 세대가 달라져도 아기 키우는 부모의 마음이란 어쩜 그리 똑같을까 생각하니 말이다. 아내와 나도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똑같은 마음이었다. 현아와 수현이처럼, 우리 부부도 참 바쁘게 살면서 그런 마음이 자주 들었다. 아마도 아기 키우는 부모 대다수의 마음이지 않을까 싶다.
육아에 가담하는 조부모의 생각은 어떨까? 각자 처해있는 상황과 조건이 다르니 일반화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엄마로서의 현아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노화로 인해 육체적으로 힘에 부치게 되니 그보다 더한 마음이 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손주가 오면 반갑고, 떠나면 더 반갑다.'는 말이 손주를 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서 자주 나오는 것을 보면 그렇다.
로아 격대육아를 하는 이 할아버지는 어떤 마음인가?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인해 나의 로아 육아가 ‘3일 근무제’에서 ‘5일 근무제’로 바뀌었다. 파트타임에서 풀타임으로 ‘승격’된 셈이다. 이번 주로 '풀타임' 육아 6주째다. ‘풀타임’ 육아가 결정되고 시작 전부터 아내는 걱정이 많았다. 갑자기 늘어난 육아 시간에 내 몸이 무리가 되지 않을까 해서다. 현아와 수현이도 이 ‘풀타임 돌봄이’를 평소보다 더 관심을 두고 신경을 써주고 챙겨준다.
정작 나는 어떤가? 로아가 깨어있으면 빨리 잠이 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가? 희한하게도 한 번도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손주바보’ 증상이 중증인 것은 분명하다. 풀타임 근무가 힘에 부치고 지치지 않는가? 3일 돌보는 일에서 5일로 늘어나니 당연히 신체적 부담은 그만큼 늘어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몸에 부담이 가는 만큼, 내 할일을 내려놓고 조금 더 로아의 리듬에 맞춰가니 몸도 적응한다.
가족의 염려와 관심을 받다보니, 나 자신도 '진짜 그런가?'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 로아가 깨어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빨리 잠들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적이 없다. 이유는 무엇일까? 특별히 떠오르는 것이 없는 것을 보면 로아와의 ‘터치’ 덕분이란 생각이다.
‘터치’
우리말 ‘만지다’와는 달리 영어의 ‘터치’는 보다 넓은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에는 인간의 감정도 담겨있다. 손으로 마음을 어루만지듯, 마음이 움직여지는 ‘감동받다’도 터치이다. 촉각을 형성하는 감각요소들이 우리 몸의 신경계와 근육과 정신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이 결합하여 감정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우리의 신체 접촉을 통해 마음의 변화까지도 이끌어 내는 것이 터치다. 매직 터치에 의한 터치 매직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요즈음 로아가 생후 8개월을 지나면서 참 예쁘다.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라 표정도 예쁘고 하는 행동도 예쁘다. 무조건 예쁘다. 더욱 예쁜 것은 이 할아버지와의 교감이 제대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할아버지에게서 로아에게로의 일방적인 애정 투사였다면, 지금은 할아버지와 로아와의 상호 교감에 의한 애정 교류로 바뀌었다. 이로 인해 로아의 예쁨과 나의 감흥이 곱절로 늘어났다. 로아와 할아버지가 서로가 매직 터치를 주고 받고, 이 터치로 인해 매직이 만들어지는 터치 매직이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근래 들어, 로아에게서 할아버지에게로의 터치가 잦아지고 있다. 로아가 우유 먹을 때면 이 할아버지 얼굴은 로아 손의 장난감이 된다. 우유를 먹기 위해 누운 로아 위로 내 얼굴을 가깝게 마주하고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으면, 로아는 두 손을 뻗어 고사리 같은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할아버지 얼굴을 고루 터치한다. 때론 할아버지 볼을 예고 없이 옹골차게 쥐기도 해서 놀라는 일도 있다.
할아버지 얼굴을 터치하는 로아의 손길에서 무언가 확인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옥스퍼드 사전에는 ‘터치’는 사람의 경우 입술과 손끝에 가장 발달해 있다고 나온다. 로아가 요즈음 무슨 물건이 되었든 손에 잡히기만 하면 입으로 가져가는 것도 입술을 통해 물체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할아버지를 입술로 파악할 수는 없으니, 손끝으로 간을 보는 것 같다. ‘우리 할아버지는 딱딱할까, 거칠까, 까칠까칠할까, 말랑말랑할까, 아니면 보송보송하고 부드러울까?’하고 말이다.
나도 궁금하다. 로아가 손끝으로 얼굴을 만져 파악한 이 할아버지의 정체가 어떤지. 아직은 말로 할 수 없으니 나중에 물어봐야겠지만, 로아 표정으로 보면 ‘보송보송 부드러움’이지 않을까 싶다. 착각이어도 할 수 없다. 자식을 향한 부모 마음이나 손주를 향한 조부모 마음은 어차피 상당 부분 착각일 테니. 정신건강을 위해 알면서도 모른 체하며 지내는 것도 부모의, 조부모의 특권이 아닐까.
로아의 수유시간 못지않게 로아가 할아버지에게 선사하는 매직 터치는 안김이다. 그것도 푹 안김이다. 로아와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안김 시간도 많아진다. 로아가 장난감을 갖고 놀다가도, 함께 책을 읽다가도, 때로는 이유식을 먹다가도, 무작정 할아버지를 향해 팔을 벌려 달려든다. 때로는 졸린 눈으로, 때로는 웃으면서, 때로는 떼를 동반해서 말이다. 요즈음 부쩍 안김 제스처가 늘어났다.
당연히 이 할아버지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표정과 제스처로 로아보다 두 배로 넓게 팔을 벌려 품에 꼭 안아 든다. 로아도 할아버지에게 맡기듯 푹 안긴다. 로아의 몸에서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아기가 품에 안길 때 안기가 어려워질 정도로 버티는 경우는 어릴 적에 적게 안아주어 아기 몸에는 긴장감이 쌓이게 되어서라고 어디선가 읽었던 적이 있다. 이 점에서 로아는 아직은 안심이다.
로아가 평화로운 표정과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쭈글쭈글하고 푸석푸석한 이 할아버지의 뺨을 보드랍고 뽀송뽀송한 손가락으로 어루만져 주고, 틈만 나면 할아버지 품에 푹 안겨 오는 성만찬 같은 터치를 베풀어주니, 어찌 깨어있는 로아가 잠들기를 바랄 수 있을까.
터치 매직!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가 아닌, ‘네가 나를 어떻게 터치해 주었던지!’의 마음이다.
터치가 영유아 발달에 얼마나 중요하고 유익한지는 너무나 잘 알려졌지만, 정작 아기와의 터치로 인해 어른, 특히 조부모 나이의 어른들에게 얼마나 유익하고 의미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반 이야기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나이가 들면 남의 아기라도 어린 아기들이 특히나 예쁘고 볼도 만져보고 안아도 보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드는 것 같다. 로아와 함께 밖으로 나가면 아파트 공원이 되었든, 엘리베이터가 되었든 로아의 얼굴 피부를 보고선 만져보고 싶다거나 안아보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치곤 하는 노인분들을 마주치곤 한다.
나이 들면서 더더욱 중요해지지만 정작 등한시되는 것이 터치가 아닐까 싶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에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서 많은 노인이 생을 마감한 것도 바이러스로 인한 감염보다는 접촉 결핍이 더 큰 원인이었다는 점이 일부에서 지적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가족조차도 방문이 금지되었으니 마음 소통의 기본적인 터치가 사라졌다. 실제로 노인들이 앓는 많은 질환의 경과는 치료 이외에도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가까운 사람들과의 접촉의 질에 크게 좌우된다고 하는 것을 보면, 손주와 할아버지 관계에서만이 아닌 모든 인간 관계에서 터치는 매직의 요소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신이시여 어찌하여 우리 아이들은
예의 바른 반듯한 아이로 기르면서
천진난만 다정다감한 심성을 길러주지는 못했을까요?
보이시죠, 아이들은 제 의무를 다합니다.
아이들은 멋진 자가용을 몰고 찾아와,
내 방에 들러 존경을 표하지요.
하지만 손길을 건네는 법은 없답니다.
나를 ‘엄마’ ‘어머니’ 아니면
‘할머니’라고 부를 뿐
예전에 우연히 유튜브에서 접했던 미국의 어느 노인의 시 일부 구절이다. 애정 어린 터치에 대한 열망이 잘 드러나 있다.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된 시점에 접했던 시여서 그런지, 나의 어머니도 같은 마음이셨을 것이란 생각에 마음이 울컥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성장한 로아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올 때, 그 어떤 선물보다 오늘과 같은 푹 안김의 매직 터치를 선물 받고 싶다.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