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인간임'을 찾아서
‘아빠, 잠깐 내 방에 와보세요. 내가 보여줄 게 있어....
여기에 아빠가 관심 있는 주제를 영어로 질문해봐.’
현아와 함께 수현이 방으로 들어간다. 컴퓨터 스크린에는 인공지능 글 작성 프로그램이 열려있다. 영어로 주제를 입력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단 10초 만에 한 페이지 분량의 전문가 수준의 내용이 정리되어 작성된다. 아주 최근의 전문적인 주제를 입력했는데도 말이다. 놀라움보다는 실은 충격에 가까웠다.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했다 해도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인공지능이나 딥러닝에 별 관심이 없는, 아니 선택적으로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나만 놀랐던 것은 아니다. 현아도 며칠 전 의학 주제를 입력했다가 나만큼이나 놀란 것 같다.
‘로아가 커갈 앞으로의 세계는 인공지능의 역할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클 텐데, 로아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남아있게 될까요?’
현아와 수현, 나는 자연스럽게 로아를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키워야 할지 이야기를 이어간다. ‘인공지능이 아닌 인간지능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라는 원론적인 방향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지금 아이를 키우는 대부분 부모가 고민하는 지점일 것이다.
『AI 시대, 행복해질 용기』라는 책이 있다. ‘우리는 인공지능의 시대에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인공지능의 시대에 행복의 의미를 인문학적으로 성찰한 책이다. 이 책에 실린 여러 글 중, 특히 내가 많이 공감했던 내용은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을 대체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였다. 그 글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현실 세계에서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하는 의욕이 매우 강하며, 바로 그 ‘인간임’을 보여주는 활동에서 행복을 얻는다고 한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이러한 ‘인간임’에 대한 욕구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인공지능 시대에 이 ‘인간임’에 대한 자아 성찰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인공지능 시대와 맥락은 다르지만, 이번 월드컵 경기에서도 ‘인간임’이 드러나는 장면이 있었다.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국민에게 큰 감명을 준 장면은 아무래도 예선 마지막 경기인 포르투갈과의 역전 골과 극적인 16강 진출 순간일 것이다. 내게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이 감동의 순간도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희미해지고 있다. 그런데, 내게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선명하게 남는 두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에서 내가 바로 ‘인간임’에 대한 욕구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장면은 포르투갈과의 경기가 끝난 뒤 길거리 응원 현장에서 방송에 비친 일부 청년들의 모습이다. 응원 인파가 빠져나간 새벽 3시의 광화문 응원 현장은 열기만큼이나 이제는 한겨울의 스산함만이 가득했다. 그런데 광장 한 켠에 일군의 청년들이 응원관중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모으고 있는 장면이 카메라 화면에 잡혓혔다. 이들 청년은 응원객들이 다 빠져나가기를 기다린 뒤 쓰레기를 정리하던 중이었다. 특정 단체 소속 회원들로 보이지는 않고 각자 '인간임'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개별 청년들이어서 더욱 인상적이었다.
두 번째 장면은 일본-크로아티아의 16강전이 끝난 뒤 일본 응원석 청년들의 모습이다. 나도 그 경기를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시청했지만, 일본으로서는 너무나 아쉬운 경기였다. 연장전까지 1-1로 승부를 내지 못하고 승부차기에서 3-1로 졌다. 경기 내용도 일본 선수들이 잘했던 만큼 승부차기로 졌을 때 경기장의 일본 팬들의 표정은 공황 상태에 가까워 보였다. 반전은 그 뒤에 해외 유튜브를 통해 전해졌다. 응원객들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린 뒤, 일부 일본 청년들이 응원석의 쓰레기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영상이었다. 이들도 광화문 청년들처럼 각자 자발적으로 '인감임'을 실천하는 청년들로 보였다. 일본 응원석에서 일장기 추태도 있었지만, 이들 청년의 모습은 국적에 상관없이 지금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이번 월드컵 결승전과 같이 명승부가 펼쳐진 흥미진진했던 경기에 비해, 이들 장면은 특별히 시선을 끌지도 못했거나, 우연히 접했더라도 쉽게 잊힐 그저 ‘사소한’ 장면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장면들이 경기의 명장면 못지않게 여전히 내 기억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유는 자신의 삶과 일에 인공지능과 같은 온갖 첨단과학기술을 활용하고 혜택을 누리고 있는 이들 청년에게서 자신이 아닌 공공을 위해 자발적으로 ‘인간임’을 실천하고 각자의 ‘인간임’을 실현하는 과정으로서의 ‘활동’에서 행복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 청년은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살고자 하는 강한 의욕을 지닌 ‘인간임’의 가치를 중시하는 젊은이들이다. 편안하게 따뜻한 침대에 누워 TV로 경기를 시청할 수 있었음에도, 자정을 넘긴 시간에 야외의 한파 속에서 중계를 지켜본다는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특별한 열정 없이는 실천할 수 없는 일이다. 회사에 연차를 내고 자비를 들여 12시간여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서 호텔에 머물며 현지 경기장을 찾아 응원하는 청년들 역시 보통의 자기 열정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더욱 중요하게는, 이들 청년은 그 ‘인간임’을 실현하는 과정으로서의 ‘활동’에서 행복을 느끼는 인성과 가치관을 보여주었다. 이들의 ‘인간임’을 실천하는 활동은 단순히 자신들이 좋아하는 경기를 현장에서 즐기는 단순한 욕구 충족을 넘어선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동체와 사회에 대한 기여 활동인 자발적인 뒷정리 활동에서 ‘행복’을 발견한다. 그들의 얼굴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개인적으로 경기 결과에 도취해 있든, 허탈함을 넘어 절망감에 빠져있든, 결국 이들 청년은 개인적인 감흥이나 감정과는 별개로 자발적으로 ‘남’을 위해 기꺼이 시간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 활동에서 ‘인간임’의 행복을 찾는다.
능동적으로 자기 삶에 강한 의욕을 갖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열정을 지닌 사람들은 흔히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회에 대한 책임이 약할 것으로 생각된다. 자기 생각과 삶, 가치관을 무엇보다도 우선시해서 타인에 대한 배려는 고려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을 듯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관인 개인주의(individualism)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그렇다. 하지만 ‘내가 중요하고 존중받아야 하는 것처럼 남도 마찬가지로 중요하고 존중해야 한다’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개인주의 정신이듯, 개개인의 자기 삶에 대한 강한 의욕과 열정은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에 대한 배려나 책임감과 배치되지는 않는다. 자기 존중이 없는 사람은 남을 존중하는 마음도 없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아버님, 저는 로아가 너무 고집이 셀까 봐 걱정이어요. 저나 수현이 닮았으면 100% 그럴 것 같아요.’
‘나는 우리 로아가 성격이 좀 까칠하더라도 그거 말 잘듣는 착한 아이보다는 자기 색깔이 분명하고 열정을 가진 아이로 성장했으면 좋겠는걸. 아이가 고집이 세다는 표현은 아이의 생각과 입장에 대한 존중과 배려보다는 어른의 생각과 관점을 우선해서 아이를 판단한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저희도 로아가 자기 소신이 분명한 아이였으면 좋겠는데, 엄마 아빠와 부딪치는 일이 많을 것도 같아요. 또래들과 잘 어울리지 못할까 걱정되기도 하고요.’
요즈음 로아의 성격이 좀 더 구체화되고 부쩍 자기 색깔이 드러나면서, 자연스럽게 로아가 어떤 아이로 성장했으면 좋을지에 대해 대화도 잦아진다. 자신의 삶에 대한 방향과 열정, 가치관, 타인과 사회, 넓게는 세계시민으로서의 의식과 책임감은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부모와 조부모에 의해 길러지고 영향을 받게 된다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 다만, 영유아가 다른 사람과의 차이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2세부터 시작된다고 하니 아기를 가진 가정에서는 느긋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할아버지로서 로아가 갖추었으면 하는 자질과 가치관은 많지만, 월드컵 응원 현장에서 보여준 이들 청년의 ‘인간임’에 대한 의욕과 실천 행동도 꼭 갖추었으면 한다. 이들의 ‘인간임’에 대한 욕구와 행동은 로아가 살아갈 인공지능 시대에 요구되는 자아 성찰과 성취의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에서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하는 강한 의욕을 가진 ‘인간임’에 대한 강한 자각과 그 ‘인간임’을 실현하는 타인과 공동체를 위한 ‘활동’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성찰 말이다.
오늘로 만 9개월이 된 로아, 요즈음 로아는 거울이나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신기한지 방긋방긋 웃곤 한다. 9살에도, 19살에도, 29살에도.... 로아가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오늘과 같은 행복한 표정으로 해맑게 웃는 멋진 청년으로 성장하기를 이 할아버지는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