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사랑하지만, 너무 힘들다?
얼마 전 부모 번아웃에 관한 칼럼을 접했다. 작년 말 <정신의학신문>에 실린 이 분야 전문의의 글이었다. “스트레스가 연쇄적으로 잇따르는 상황에서 이를 처리할 시간이나 방법이 없는 경우에 주로 나타나는” 부모 번아웃은 요즈음 세대 대부분 부모가 겪는 두드러진 특징으로 내세운다. 부모 번아웃은 우리 세대도 아이를 키우면서 겪어왔던 현상이지만, 로아 격대 육아를 시작하면서 요즈음 세대의 부모 번아웃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다.
이 글에서 설명하는 요즘 세대의 부모 번아웃의 성격과 내용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 글에서 내게 주목되는 점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내외부적 요인으로 부부만으로는 아이 양육이 쉽지 않은 현대 부모들의 부모 번아웃의 원인과 해결에서 조부모의 역할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부모 번아웃의 ‘가정적 위험 요인’으로 든 “공동의 부모 역할 불만족, 부부 관계의 불만족, 안정적 루틴의 결여”에는 부부만의 육아가 전제되어 있었다. 부모 번아웃의 위험요인을 상쇄해 줄 ‘보호 요인’으로 제시된 부모의 정서적 유능성 강화를 통한 ‘자기 돌보기’와 ‘부부의 협력적 육아’ 역시 부부만의 노력이 전제되어 있었다.
이 글에서는 지금 세대 부모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외부의 도움 없이 아이 육아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사실 역시도 분명하게 적시되어 있었다. 과거보다 맞벌이 비율이 늘어난 지금의 젊은 부모들은 자아실현을 위한 개인적 욕구와 사회적 기대의 부담을 안고 있으면서, 동시에, 좋은 부모의 조건이 과거와 비교하여 더 까다롭고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도 “가정은 사회 집단에서 좀 더 고립되고, 이웃에게 양육과 관련된 도움을 요청하기란 어려워졌다”라고 이 글은 지적한다.
“이웃에게 양육과 관련된 도움 요청”? 당연히 어렵다. 우리 세대에도 어려웠다. 이 칼럼을 읽으며서 내내 궁금했던 점은 “이웃”은 언급하면서도 왜 조부모의 존재와 역할은 언급되지 않았을까 였다. 아기를 키우는 지금의 젊은 세대가 처한 양육의 어려움을 지적하면서, 왜 부부만의 노력과 해결책만을 강조할까? 젊은 세대 입장에서나 조부모 세대 입장에서 각기 격대 육아를 실천하는 일이 불편하고 꺼려지는 원인이 있는 것일까? 필요성은 느끼면서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회적 공감대가 있는 것일까? 내 긍금증은 커져만 갔다.
우리 주변에서 보면, 격대육아에 참여하는 조부모들이 적지 않은 듯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한민국의 3% 가정에서만 격대육아가 이뤄지고 있다는 최근의 조사 결과로 미뤄 짐작해 보면, 요즘 젊은 세대들의 부모 번아웃 해소와 조부모의 손주 육아 참여 간의 상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반증으로 읽힌다.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조부모의 격대육아 참여는 각 가정이 처한 상황과 형편이 다르기 때문에 당위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무리이고 비현실적일 수 있다.
다만, 상황과 형편이 되면서도 조부모 양육 참여에 대한 자식 세대와 부모 세대가 각자 갖는 부담 내지는 부정적 인식도 무시하기 어려운 것은 아닌지 싶다. 인식의 문제라면, 서로에 대한 열린 마음과 존중하는 마음으로 생각만 바꾸면 생각 외로 조부모의 격대 육아 참여는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부부의 힘과 노력만으로 육아를 해결하는 데서 오는 젊은 세대의 부모 번아웃 문제는 ‘이웃’이나 전혀 모르는 타인이 아닌 자신의 부모가 아이 양육과 교육에 참여할 수 있다면 일정 부분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손주를 맞는 나이가 된 베이비붐 세대는 어느 세대보다 교육을 많이 받았고 건강관리도 잘하고 있어서 자식 입장에서 안심하고 아이 양육과 교육을 맡길 수 있을 조건을 갖추고 있다.
조부모 입장에서도 격대 육아 참여는 긍정적인 노후 삶의 기회가 될 수 있다. 100세 수명 시대를 앞둔 베이비붐 세대들은 앞으로 남겨진 긴 세월을 몸의 건강만이 아니라 활기 있고 보람된 삶을 어떻게 영위할 것인지의 과제를 안고 있다. 취미활동이나 봉사활동, 평생 학습, 친목활동 등을 통해서 얻기도 하겠지만, 손주 육아 참여만큼 자신의 삶에 활기를 얻고 보람을 느끼는 일이 더 있을까 싶다. 육아로 맺어진 손주와의 관계는 일회성 관계가 아닌 삶이 다할 때까지 지속되는 황홀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아이 양육에 대한 젊은 세대와 조부모 세대 간의 건강한 속마음을 나는 우연한 경로를 통해 읽을 수 있었다. 수현이가 올린 로아의 인스타 영상에 올라온 댓글을 통해서다.
“아버님, 로아 영상 조회 수가 벌써 3만이 넘었어요.”
현아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아내와 나는 서둘러 인스타그램을 열고 확인한다. 그동안 찍어 둔 영상에서 로아와 아내, 내가 함께 나오는 장면들을 모아 편집하여 수현이가 내게 깜짝 생일 선물로 주었던 영상이다. 로아 탄생 후 첫 대면에서부터 로아와 이 할아버지가 함께한 소중한 순간들이 1분 30초간 담겨있는 이 영상은 내겐 보물 같은 선물이었다.
영상을 열자 조회 수와 ‘좋아요’ 숫자, 댓글 숫자가 한 화면에 나타난다. 인스타그램의 릴스 같은 요즈음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고 접속하는 동영상 프로그램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온 내게는 조회 수 3만은 ‘엄청난’ 수라고 여겨졌다.
조회 수 3만에 놀랐던 이 영상이 업로드 10여 일 만에 조회 수 150만 회를 넘기더니, 지금은 250만 회를 넘기고 있다. 놀람을 넘어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들어가 확인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아내와 나의 조회 수를 합치면 백 번은 족히 넘지 않을까 싶다. 릴스란 존재를 몰랐던 나도 조회 수를 늘리는데 적지 않은 이바지를 한 셈이다.
‘릴스’라는 용어는 영화필름이나 녹음테이프를 감아 재생하거나 보관하는 데 사용하는 기구를 의미하는 릴(reel)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내게는 미끼를 달아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 낚싯줄 릴이 더 연상된다. 낚싯줄 릴에 물고기가 낚이듯, 아내와 내가 낚여있다는 느낌이다.
수현이가 이 영상을 올릴 때 이런 반응이 있으리라고는 본인도 예상 못 했던 것 같다. 아빠 생일 선물로 만든 이 단순한 영상에 많은 사람이 접속하고 댓글까지 남긴 이유가 나는 몹시도 궁금했다. 수현이의 영상 편집 감각도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쳤겠지만, 국내외에서 올린 1500건이 넘는 댓글을 보면서 일정 부분 알게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눈물,’ ‘울컥,’ ‘감동,’ ‘가슴이 따뜻해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과 같은 표현이 댓글에 가장 많이 등장한다. 외국인들이 단 댓글 내용 역시 거의 유사했다. 댓글을 남겨주신 분들께 결례를 무릅쓰고 표현하자면, 이 분들도 이 릴스에 제대로 “낚인”듯 보인다.
한발 물러서서 생각해 본다. 왜 손녀와 할아버지가 함께하는 모습에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낚였을까?’ 조부모 세대와 젊은 부모 세대 모두 영상을 본 많은 분이 왜 자신들의 따뜻한 마음을 글로 남기고 지인들에게 공유까지 해주셨을까? 손녀와 함께하는 영상 속 이 할아버지는 특별할 것도 없는, 손주를 대하는 다른 할아버지들의 모습과 다를 것도 없는데도 말이다.
내겐 당연하고 특별하지 않은 일로 생각되는 할아버지의 손주 육아 모습이 혹시나 우리 사회에서는 그렇게 당연하거나 평범한 모습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일까? 속마음으로는, 젊은 세대는 자신들의 부모가 아이 양육에 참여를 바라고 조부모 세대는 손주를 돌보는 일을 갈망하는 것은 아닐까?
격대 육아를 실천하는 입장에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나의 우쭐하고 오만한 착각일 수 있어 조심스럽긴 하다. 이 할아버지가 손녀를 버릇없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손녀로 인해 내가 버릇없게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영상에 국적에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관심보이고 기꺼이 댓글을 다는 수고까지 하는 것을 보면, 할아버지의 손주 육아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싶어 고맙고 반갑다.
나는 부모로서도, 할아버지로서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다만, 운 좋게도 '육아 휴직' 기회를 만들 수 있었고, 아내와 현아, 수현이가 마음으로 동의해 주었기에 가능했다. 육아 참여하기 이전부터 그리고 육아를 하면서 격대 육아에 대해 현아 수현과 서로 마음을 열어 놓고 생각을 교환하고 이견을 좁히고 신뢰를 쌓아왔을 뿐이다.
일주일에 3일씩 격대 육아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지 반년을 훌쩍 넘긴 이 시점에 나는 ‘손주바보’의 모든 희열과 보람, 열정을 누리고 있다. 내 개인적인 삶의 활기는 격대 육아로 얻은 덤이다.
현아 수현은 나의 격대 육아에 어떤 마음일까 하고 종종 스스로 점검한다.
우연한 기회에 현아 수현에게서 읽어 내기도 한다.
“아빠, 우리 나가서 볼일 보고 저녁까지 먹고 들어와도 되지?”
퇴근한 현아와 둘 만의 외출 준비를 하며 수현이가 예의상 허락을 구한다.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현아 손에 쥐어주고, 난 로아를 품에 꼭 안아 든다.
가슴이, 따뜻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