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들은 거저 웃는 게 아니다.
최근에 접한 로저 그린웨이 미국인 선교사의 멕시코 선교지에서 일어난 이야기다. 선교지 동네에 어린 딸을 둔 술주정꾼이 있었다. 술만 먹으면 상습적으로 폭력을 휘둘러대는 바람에 아내는 벌써 가출해 버렸고, 오롯이 남겨진 딸아이는 아빠의 폭력과 학대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지내야 했다. 그날도 아빠의 폭력이 자신에게 향하자 두려움에 필사적으로 달아나 피한 곳이 그린웨이 선교사 집이었다. 선교사는 아이를 숨겨주었고, 아이를 찾으러 온 주정뱅이를 경찰에 신고해 잡아가도록 한 뒤, 법적으로 자신이 양육권을 넘겨받아 입양했다. 선교사와 아내, 네 딸은 이 아이에게 특별한 사랑과 관심으로 돌보았다. 그동안의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컸던지 아이의 마음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말도 하지 않았고 얼굴에서는 표정이 사라진 채로 몇 달이 흘렀지만, 선교사 가족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당에서 일하고 있던 선교사의 귀에 속삭임과 같은 소리가 들렸다. ‘아빠, 신발 끈이 떨어졌어요.’ 뒤돌아보니 그 어린아이가 자신을 향해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건 것이었다. 선교사는 그만 그 자리에서 목 놓아 엉엉 울고 말았다.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대학생 시절 2년 정도 봉사활동으로 만났던 보육원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만나던 아이들과 관계 맺기는 선교사와 어린아이 관계처럼 쉽지가 않았다. 아이들이 이 ‘외부인’에게 마음의 문을 쉽게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교사 이야기 속 아이처럼, 고아원 아이들도 처음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대했고 말을 섞는 일도 거의 없었다. 아이들이 나를 신뢰하고 따르게 되기까지는 몇 달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나와 무관한 먼 나라의 이야기가 나의 마음으로 들어오고, 40년도 넘은 대학생 시절의 경험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문이지만 우문이다. 손녀 로아 양육에 직접 가담하다 보니, 내 마음 촉수가 양육과 관련된 방향으로 뻗어댄다. 아이들에 관한 주변의 이야기나 까마득히 잊힌 나의 과거 경험이 소환되어 교훈으로 다가온다.
요즈음 부쩍 로아가 미소를 잘 짓는다. 소극적 미소가 아니라 표정이 아주 풍부한 적극적 미소다. 얄궂은 표정, 짓궂은 표정, 익살스런 표정까지 동반된다. 엄마 아빠한테도,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도 표정 인심이 아주 후하다.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로아의 저 매력적이고 독특한 미소와 표정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내내 궁금했다.
‘유레카!’
어제는 현아가 어려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내게 보여주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사진 속 어린 현아의 웃는 모습이 로아와 판박이다. 초승달 모양으로 길게 늘어나며 살짝 아래로 구부러진 눈꼬리, 통통한 볼 살에 막혀 끝이 살짝 오른 채 눈꼬리를 받아내는 선명한 입술, 그 사이에 ‘나 좀 봐주세요’라고 찡끗하고 애교 부리는 콧잔등, 영락없는 요즈음 로아의 미소 짓는 모습이 사진에 담겨있다. 생각해 보니, 현아가 퇴근 후 로아 얼굴을 맞대고 짓는 표정과 미소가 바로 저 사진 속 미소였다. 어느새 로아는 엄마의 표정과 미소를 복사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요즈음은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의 자극에 반응으로서가 아니라, 로아가 먼저 진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우리의 반응을 기다린다. 로아의 미소와 웃음, 표정에서 어른들로부터 관심을 끌어내고 싶은 마음이 뻔히 읽힌다.
로아의 미소는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으며, 로아가 짓는 미소를 볼 때마다 나는 두 가지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채 한 달도 되기 전 시작되는 갓난아기의 미소의 의미다. 현아 수현이가 자주 올리던 영상에는 생후 채 한달도 되지 않은 로아가 잠을 자거나 우유를 먹으면서 미소를 짓는 모습이 간혹 보였기 때문이다. 더 큰 궁금증은 로아가 커가면서 보여주는 외부자극에 의한 미소 반응이다. 로아가 할아버지에게 처음 ‘의도적인’ 미소로 ‘반응’ 해 주었던 것은 강릉 집에 처음 내려온 날이었다. 태어난 지 39일째였다. 눈을 맞추고 말을 걸어주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로아가 자주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미소가 얼마나 황홀했던지 생생하다. 당시는 황홀함에 취해 아무런 생각도 못 했지만, 로아가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호들갑에 고맙게도 미소로 응대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겨우 40여 일된 아기가 어떻게 미소로 화답하는 일이 가능할지의 궁금증이 생겼다.
위 두 가지 궁금증은 아기를 둔 모든 (조)부모라면 적어도 한두 번은 가졌을 것이다. 나는 우연히도 최근 읽고 있는 책을 통해 궁금증 일부를 확인했다. 이 책에 인용된 230여 년 전에 쓴 이래즈머스 다윈의 글이었다. 인터넷 검색을 하면 최신의 많은 자료를 통해 궁금증이 해소되겠지만, 개인적으로 그의 글이 반갑고 관심이 끌렸던 것은 이 분이 손자인 찰스 다윈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할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손주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면 내게는 모두가 위대해 보이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의사이자 생리학자답게 이래즈머스 다윈은 갓난아기의 미소를 신체적 욕구 해소와 엄마와의 유대감에 따른 정서, 그리고 신체적 메커니즘의 복합적인 결과로 설명한다. 아기는 엄마 젖을 빨면서 배고픔을 해소할 뿐만 아니라 입과 피부의 접촉에 의한 자극으로 기분이 좋아진 상태에서, 엄마 젓을 줄곧 빠느라 지쳐 이완된 입의 조임근과 얼굴의 대항근이 부드럽게 작용하여 아기에게 기쁨의 미소가 만들어진다고 설명한다. 갓난아기가 외부 자극 없이도 미소를 짓는 것은 뱃속에 들어온 공기의 배출에 따른 감각 반응 때문이라는 서양에서의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엄마와의 신체적이고 정서적인 유대감이 갓난아기의 미소에 영향을 주는 요소로 본 것이다. 아기-양육자 관계가 아기의 미소와 표정에 미치는 영향은 커가면서 더욱 두드러진다는 것이 다윈의 할아버지의 설명이다.
“아기의 미소는 우리가 살아가며 감미로운 기쁨을 느낄 때 짓는 것으로... 아이들의 경우 기쁜 표정과 미소는 보통 웃는 얼굴로 자신을 대하는 부모나 친구들의 표정을 흉내를 냄으로써 훨씬 더 발달하게 된다.”
현대의 유아발달 연구는 아기 미소, 특히 타인과의 관계에서 보이는 ‘사회적 미소’에 대한 이래즈머스 다윈의 설명을 더욱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아기들은 6주에서 8주 사이에 사회적 미소를 짓기 시작한다고 한다. 사회적 미소란, 이래즈머스 다윈이 지적한 것처럼, (조)부모나 외부인의 자극에 미소와 웃음으로 반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후 39일째의 로아가 할머니 할아버지의 자극에 미소로 화답했던 것은 바로 로아의 사회적 미소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던 것이다.
이후, 3-4개월 되면 아기들은 양육자의 표정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시각보다는 청력이 먼저 발달하는 아기들답게 표정에 목소리가 더해지면 표정을 더 잘 구분한다고 한다. 5-7개월이 되면, 양육자의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의 강도까지 구별하여, 양육자가 크게 웃어줄수록, 아기의 미소와 웃음도 비례하여 커진다고 한다. 로아 역시 그런 과정을 지나오면서 지금의 미소와 표정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아기의 사회적 미소에 관하여 더욱 흥미롭고 주목을 끄는 연구 결과가 최근 보고 되었다. 아기는 단순히 양육자의 자극에 반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관심을 끌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미소 짓는다는 사실이다. 몇 년 전에 <사이언스 타임스>에 소개된 연구 내용은 이렇다. 미국에서 진행된 한 연구에서 ‘아기들은 거저 웃는 것일까?’란 일반의 믿음에 대한 의구심을 전제로 아기들이 실제로 웃음을 통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과학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실험을 진행했다. 발달심리학자와 컴퓨터 과학자, 로봇연구원들이 참여한 이 협업 연구는 넉 달 미만의 아기들과 엄마 13쌍을 대상으로 로봇에 적용하는 역제어이론을 통해 13명의 아기 중 11명의 아기가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의도적으로 웃는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아기들이 양육자의 관심과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의도적인 미소를 짓기 시작하는 시점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르다는 점이 증명된 것이다.
‘아기들은 거저 웃는 게 아니다.’
미소와 웃음이 대체로 인색한 우리나라의 사회와 문화에서 아기 양육자, 특히 아빠들과 할아버지들이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명제가 아닐 수 없다. 이래즈머스 다윈이 갓난아기 시기부터 양육자의 태도가 아기의 미소와 웃음에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하고 나선 이유이기도 하다. 손자인 찰스 다윈이나 그의 형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떴으니, 그의 글이 직접 손자를 염두에 두고 썼다기보다는, 당시의 영국 사회의 전통적인 보수적 아이 양육에 대한 일침으로 읽힌다. 영국 사회에서 남자는 타인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정서가 아이 양육에서부터 적용되었고, 성장하는 내내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웃음과 포용보다는 근엄함과 엄격함으로 자녀를 대했다. 지금도 영국 남자들의 표정에서 미소나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을 보면 다윈의 할아버지의 조언은 크게 주목받지 못한 듯하다.
요즘의 로아의 미소에는 의도적인 ‘유혹’이 그득하다.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눈을 반짝이며 찡끗 미소 짓는 로아의 모습에 이 할아버지는 완전 무장 해제되기 일쑤다. 그런데도, 오랜 세월에 걸쳐 켜켜이 쌓인 문화란 개개인의 노력만으로 극복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로아 양육에 참여하면서 내가 경계하는 점이기도 하다. 근엄함과 진중함이란 우리 세대의 문화와 가치관이 부지부식 간에 나의 생각세포 역시 지배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되뇌어 본다.
‘아기들은 거저 웃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