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by 로아 할아버지

“어머니, 이제야 제대로 피로가 풀린 기분이네요. 로아가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노는 동안 틈틈이 위층으로 올라가 잠을 푹 잘 수 있어서 좋았어요. 저희 휴가 때도 강릉으로 와서 지내도 되죠?”


“그럼, 너희 휴가 때 강릉에서 지내는 거 우리도 좋지. 단, 먹을 것은 챙겨오기로 ~.”


“난 엄마 맘 충분히 이해해!”

옆에서 듣고 있던 수현이가 엄마를 거든다. 집에서 식사를 담당하는 아들이기에 가능한 대답이다.


현아와 수현, 로아가 설 명절 연휴를 온전히 강릉 집에서 보내다 갔다. 아이들이 모처럼 쉼의 시간을 보낸 것 같아 아내도 나도 반갑다. 현아와 수현, 둘 다 직장 일로 바쁜 와중에 집에서는 집안 살림도 하고 로아를 돌보느라 여유가 없다. 아기를 둔 모든 맞벌이 부부들이 다 그렇듯이. 물론, 전업주부라고 해서 직장맘과 그 무게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로아가 태어난 이후, 밤에 깨지 않고 온전히 자본 날이 하루도 없는 것 같다는 현아다. 이제 로아가 커 가면서 밤중 수유는 드물어졌지만, 로아가 뒤척이며 신음하면 토닥여 줘야 잠을 이어가니 여전히 깊이 잠들 수도 없고 중간에 깰 수밖에 없단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출근 준비를 하는 현아 모습이 피곤해 보여 안부를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었다. 이번 설명절 동안 아내와 내가 로아를 돌보는 동안 로아 돌봄 걱정 없이 틈틈이 잔 낮잠이 얼마나 달콤했으랴.


수현이는 수현이 대로 달콤한 휴식이 되었을 것이다. 명절 전날까지 업무로 밤샘하면서도 빠뜨리지 않고 매일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아들로서는 업무와 로아 돌봄에서 잠시나마 해방되어 엄마와 아빠가 차례로 준비해 주는 끼니를 ‘받아’ 먹는 일의 행복을 맘껏 누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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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네 식구아직 안 갔어요? 내려온 김에 연휴 꽉 채워서 보내고 가는군요. 우리 애들은 설날 떡국 먹고 바로 갔어요.’


아내에게 걸려온 지인의 전화 목소리가 옆에 있는 내 귀에도 새어 들어온다. 명절 다음날, 우리 부부와 함께 여유 있게 커피 한잔하고 싶어서 전화하신 듯하다. ‘손주가 오면 반갑고, 떠나고 나면 더 반갑다.’ 손주를 둔 우리 세대에 떠도는 말이다. 진심일 수도 있고, 더 함께 있고 싶은 손주를 데리고 일찍 떠나버린 자식에 대한 서운함의 반어법일 수도 있다.


‘어머니, 저희가 강릉에 가고 싶어서 그래요.’

명절에 길도 많이 막힐 것이고 장시간 차 안에서 로아가 힘들 것 같아, 아내의 역귀성 제안에 대한 현아의 대답이었다. 수현이는 아들이니 당연하다 치더라도, 평소에도 현아가 시댁에 오는 것을 꺼리지 않아 왔다. 아내와 나도 아들 내외가 찾아오는 것이 언제나 반가웠고, 특별히 잘해주는 것은 없지만 아이들이 편하게 쉬다 갈 수 있도록 신경을 쓰곤 했다. 로아가 태어나니 아들네도 우리도 만나는 일이 서로에게 더욱 반가운 일이 되었다. 아내와 나로서도 함께 손녀와 시간을 보내는 즐거움이 아이들의 쉼만큼이나 크다. 가족 3대의 동행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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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함께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한다.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은 동행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발맞춰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가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 즉,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 신뢰 속에 함께 가는 것이라고 본다. 가족의 동행, 특히 손주와의 3대에 걸친 가족의 동행은 더더욱 그렇다는 생각이다. 아이 양육을 두고 조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 간에 마음 소통이 전제되지 않은 동행이란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세대차이’의 벽이 막아서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이라고 예외일까? 아니다. 아내와 나 그리고 현아와 수현이 사이에는 당연히 생각과 삶의 방식에서 세대차이가 있었고 일정 부분은 여전히 존재한다. 로아 양육에서도 마찬가지다. 생각의 차이로 인해 갈등까지는 아니더라도 이견이 노출되기도 한다. 여느 조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아내와 나도 자식을 키우던 시대의 관습과 경험을 ‘지혜’로 여기고, 알게 모르게 로아 양육에 적용하기 때문이다. 로아의 격대 육아에 참여하기로 하면서 육아 관련 서적과 자료를 적지 않게 읽고 참조했지만, 습관에 의해 혹은 무지로 인해 나의 옛 방식을 로아에게 적용하는 일이 종종 있다.


“아빠, 로아 엎어 재우면 안 된다니까요!”

졸린 로아를 내 방에서 잠시 재우는데, 수현이가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라 로아의 엎드린 자세를 똑바로 눕힌다. 지난번 수현이와 현아가 내게 당부했던 일이었음에도, 수현이를 키울 때의 몸에 배었던 방식이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로아에게 적용되곤 한다. 그 당시에는 두상이 예뻐진다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먹은 우유가 역류해 기도가 막힐 위험성을 방지하기 위해 엎어 키우는 것을 권장했다. 지적하는 수현이에게 내가 알고 있던 ‘지식’으로 강변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내용보다는 평소의 아들답지 않은 아빠를 향한 질책성 말투에서 순간 내가 당황하고 마음이 상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질식사 위험성 때문에 똑바로 눕히는 것이 일반적인 의학적 소견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내용을 그날 저녁 현아에게서 확인했다. 의사로서의 소견이 아니었더라도 결국은 현아의 의견에, 수현이의 의견에 따랐을 것이다. 그 뒤로는 잠든 로아가 자세를 바꿔 엎어져 있지는 않은지 항상 체크한다.


브런치 글에 함께 싣는 로아 사진 선택도 그렇다. 처음에는 사진 선택도 모두 내가 했다. 글의 내용에 맞게 선택한 사진들이지만, 대부분 로아가 멋지고 사랑스럽고 예쁘게 나온 것들이다. 직접 찍은 사진이지만, 내 실력보다 우연히 잘 나온 사진들도 있어서 자랑삼아 올리고 싶은 마음이 작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내가 선택한 사진 중에 현아는 싣기를 꺼리는 의사를 밝히곤 했다. 로아가 자라면서 예쁜 모습이 본격적으로 사진에 담기기 시작한 때부터이지 싶다. 그 사진들은 내가 봐도 정말 잘 나온 사진들인데,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을 드러내 보이기도 하지만, 현아도 물러서지 않았다. 로아의 멋진 모습이 온라인에서 혹시 마구 공개되고 돌아다닐 수 있어서 걱정된다는 현아의 말을 듣고서야 시대를 읽지 못했던 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지금은 브런치 글에 싣는 사진은 함께 고르거나 내가 먼저 고른 후 최종 선택은 현아 수현에게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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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로아 격대 육아를 하면서 깨달은 점이 이것이다. 같은 마음의 동행, 즉, 조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 간 상호 배려와 존중, 신뢰가 전제된다면, 아이 양육과 교육에서 세대 간 차이가 차단 벽이 아닌 연결 사다리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아이를 대하는 두 세대의 생각과 마음, 태도, 가치관은 대립과 극복의 대상이 아닌 상보적 관계로서 잘 조화를 이루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조부모는 결코 아이의 부모를 대신할 수 없고, 현실 삶에 바쁜 부모는 아이 양육에서 조부모의 여유와 삶의 경험치를 갖거나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세대 간 마음의 동행을 위해서는 자식이 아닌 조부모가 먼저 변해야 함도 깨달았다. 우리 사회에서 세대 간 이격과 갈등은 어느 시대에도 존재해 왔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가 우리 나이의 조부모 세대에 갖는 간격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큰 것 같다. 급격하게 변화해가는 사회적 흐름에의 대응과 적응도 차이가 무엇보다도 큰 원인으로 보인다. 나이든 세대는 시대변화와 흐름을 따라 잡는데 당연히 어려움을 겪는다. 심적으로는 그래야 할 당위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못하는 것을 고의로 안하는 것으로 위장하며 위안을 삼는 것은 아닌지 싶다.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러한 세대간 차이가 아이 양육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로아와 같은 어린아이들이 살아갈 미래 사회에 대해 조부모보다는 부모 세대가 정보도 많고 더 잘 내다보고 이에 필요한 준비도 더 잘 해줄수 있을 것이다. 양육에 필요한 필요한 정보도 그때그때 인터넷을 찾아 참고한다. 그런데 많은 조부모들은 여전히 자신의 아이 키우던 경험치에 기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얼마 전 시아버지의 잘못된 육아 상식을 다룬 방송 내용이 인터넷에도 떠돈 적이 있다. 7개월 된 아기를 둔 맞벌이 부부가 직장 나가는 동안 인근 시댁에 맡기면서 생긴 일이다. 70세가 넘은 시아버지는 콧대 높아지라고 빨래집게를 아기 코에 물린다든지, 아기가 기침한다고 공갈 젖꼭지에 꿀을 발라 빨게 하는 등, 아기에게 큰 문제가 야기될 수 있는 ‘육아’를 한 것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시아버지의 태도였다. 며느리가 이 사실을 알고 그렇게 하면 아기에게 큰일이 날 수있다고 정중하게 말씀드렸지만, 시아버지는 오히려 자기 경험에 근거하여 잘 알아서 하는 일인데 왜 간섭하느냐고 오히려 역정을 내며 그러한 행동을 이어갔다고 한다.


어느 조사에서 ‘노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젊은 세대는 ‘완고함’을 주저 없이 꼽았다. 위의 이야기가 방송에서 다뤄질 정도로 예외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나를 포함하여 우리 조부모 세대가 한 번쯤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성을 상기해 준다. 이 ‘완고함’을 버리는 일은 손주 육아 참여에서 가장 우선적인 태도는 아닐까 싶다. 부모가 먼저 제 생각과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식의 생각에 귀를 기울인다면, 자식도 당연히 부모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존중과 신뢰를 보내지 않을까? 더더구나 부모가 시간과 마음을 들여 자기 아이를 돌봐준다는데, 자식은 이미 그러한 부모에게 감사와 존경, 신뢰를 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까?


격대 육아에 참여하면서 세대 간 동행 못지않게 부부간 동행 역시 더 많은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는 점도 깨닫는다. 젊어서부터 항상 남편과의 동행을 삶의 방식으로 살아온 아내였기에, 나의 로아 육아로 인해 일주일에 3일간 혼자 지내면서 문득문득 겪게 되는 허전한 마음을 언제부터인지 절제하며 넌지시 내비치곤 한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먼저 아내에게 안부를 묻곤한다.

“이 상황이 좀 낯설게 느껴지네요. 당신은 어때요?”


명절 연휴 마지막 날 저녁, 스타벅스에 들러 커피를 빼 들고 배웅해 주는 아내에게 말을 건넨다. 아내도 내 마음과 같지 않을까 싶어서다. 명절을 함께 보내고 떠나는 아들 내외를 아내와 함께 배웅해 주던 내가 이번에는 아들네와 함께 떠난다. 명절 연휴 첫날 새벽에 아들네와 함께 강릉 집에 와서는 꼬박 나흘간의 설 명절을 보내고 연휴 마지막 날인 화요일 저녁에 다시 아들네와 함께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내 집’을 떠나는 것이다.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로아육아 당번을 위해서다. 나흘간 수현 현아 그리고 귀여운 손녀 로아와 함께 북적북적 시간을 보내고 남편까지 딸려 보낸 뒤, 텅 빈 집에서 홀로 남겨질 아내를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짠하다. 손녀 때문이 아니라면 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니다.


30년 넘는 세월을 함께 살았으면, 아내도 가끔은 혼자의 시간을 오히려 홀가분하게 즐길 나이가 되지 않았을까? 손녀와 아들 부부, 남편까지 보내 놓고 집에서 홀가분하게, 눈물이 아닌, 좋아하는 스타벅스 자바 칩 프라푸치노를 홀짝이며, 편안하고 달콤한 여유를 즐기는 것은 아닐까?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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