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와 보라색 크레용 -- 상상력, 인공지능 시대에도 필요할까?
요즈음 로아가 미술과 크레용의 매력, 아니 마력에 빠진 느낌이란다. 집에서는 커다란 크레용 모양의 펜으로 이야기 그림책을 터치하는데 여념이 없고 문화센터 미술활동에도 많은 흥미를 갖고 열심인 것을 보면 말이야.
로아가 요즈음 가장 많이 손에 드는 것이 크레용 모양의 펜이 아닐까 싶어. 이 펜만 보이면 다른 책에는 관심이 없고 이 펜으로 터치해서 소리 나는 책을 열심히 보고 있지. 정말 이 크레용 모양의 펜은 ‘매직’ 펜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 같더구나. 책 표지를 터치하면 제목을 말해주고, 책 속 악보를 터치하면 노래를 들려주고, 이야기가 나오는 페이지를 터치하면 읽어주는 소리가 들리니 말이야. 물론 그 펜과 책에는 전자 칩이 들어 있어서 소리가 나오도록 되어있지만, 로아는 크레용의 매직으로 알고 있겠지.
그래서 그런지 지난주 할아버지하고 지내면서 책장 위에 놓여있던 진짜 크레용을 건네받고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짓더구나. 로아가 실제로 연필이나 펜, 크레용으로 빈 종이에 그적거리면 나타나는 선과 모양을 신기해하는 것도 같은 이유겠지. 목욕탕에서도 매직은 이어지더구나. 목욕하면서도 로아는 크레파스 모양의 수성 물감으로 욕조 벽에 마음껏 칠하고 문지르면서 나타나고 변하는 모양에 빠져 정작 로아가 좋아하는 물놀이는 뒷전이지.
지난주 할아버지와 함께 갔던 문화센터 미술활동 수업에서 찰흙 놀이에 로아가 큰 관심을 보였던 것도 로아 마음대로 변형시키는 찰흙의 특성 때문은 아닐까 싶구나. 로아는 찰흙 덩어리를 손으로 누르고 굴리고 떼어내고 붙이면서 힘에 부치면 발로 밟기도 하고 하면서 그때마다 모양이 달라지는 것에 신기해했지.
수업 활동 끝나는 것이 로아에게는 아쉬워서였을까?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기 전 같은 공간에 있는 대형 매장에서 언제나처럼 로아의 30분 세상 구경 동안 찰흙은 로아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단다. 로아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찰흙 봉지를 고사리 엄지와 검지만으로 들고 다니다 힘에 부치면 다른 손으로 계속 옮기면서도 할아버지에게 끝까지 맡기지 않더구나. 차를 타고 집으로 가면서도 찰흙봉지에서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로 미뤄보아 로아의 찰흙놀이는 차를 타고도 계속되고 있었던 것 같고, 주차장에 도착해서 보니 밤톨 모양의 찰흙 덩어리가 얼굴에 군데군데 붙어있어서 할아버지가 얼마나 웃었던지 모른단다.
로아만큼이나 크레용의 매력, 아니 마력에 빠진 아이가 나오는 동화가 있단다. 한 어린아이가 상상의 날개를 펼치면서 매직 같은 세계를 크레용으로 그려 만든다는 이야기지. <해럴드와 보라색 크레용>이라는 제목의 동화로, 지금의 아기 로아에게 들려주는 스토리텔링은 다음과 같아.
옛날 옛적에 해럴드라는 이름의 꼬마 소년이 살았단다. 그리기를 좋아했던 이 소년에게는 매우 특별한 크레용이 있었어. 어느 날 밤, 해럴드는 잠이 오지 않자 모험을 나서기로 했어.
우선 보라색 크레용으로 모험을 나설 커다란 길을 그렸고, 그 길을 따라 숲으로 갔고, 그곳에서 용을 발견하고는 함께 여행을 가기 위해 목줄도 달아주었지.
해럴드는 용과 함께 걸으면서 길이 끊기자 열기구를 그려 그 안에 타고는 하늘 높이 올랐단다. 하늘을 나는 새들과 이야기도 나누었지. 배가 고프자 해럴드는 크레용으로 여러 종류의 파이를 만들어 일부만 맛나게 먹고는 나머지는 다른 동물들을 위해 남겨두었어.
해럴드의 모험은 밤새 계속되었단다. 바다를 그려서는 보트를 탔고, 도시를 그리고는 번잡한 거리를 돌아다녔지. 그러다 지치면 아늑한 침실을 그려서 그곳에서 쉬기도 했단다. 해럴드가 모험하는 이 모든 장소와 대상은 물론 크레용으로 그려 만든 것이란다.
밤새 정신없이 모험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는 해럴드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창문을 그린 뒤 그곳을 통해 자기 방으로 돌아오게 돼. 자기 방으로 돌아온 해럴드는 피곤했지만 기분이 좋았단다. 이 보라색 크레용만 있으면 해럴드는 언제든지 이처럼 멋진 모험을 떠날 수 있으니 말이야. 잠자리에 들어서도 상상력과 보라색 크레용으로 만들어냈던 멋진 세상을 떠올리며 꿈속에서도 그러한 모험이 계속되기를 바라며 행복하게 잠에 빠져들었단다.
로아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로아를 무릎에 앉히고 할아버지가 이 책을 여러 번 읽어주었단다. 크레용과 미술활동에 관심이 커진 로아여서 인지 어느 책 못지않게 관심을 보이곤 했지. 다른 그림 동화책에 비해 이 책은 그림이 멋지지도, 색상이 화려하지도, 멋진 등장인물들이 나오지는 않아. 맨머리의 캐리캐처 같은 꼬마 해럴드와 보라색 크레용, 그 크레용에서 나오는 굵은 선이 전부인데도, 로아가 관심을 보이는 것은 꼬마 주인공이 크레용으로 선을 그어 마음먹은 대로 모양을 만들어 내는 모습에서 크레용을 손에 쥔 로아 모습을 보았던 것은 아닌지 할아버지도 상상을 보태 생각해 보곤 한단다.
크레용 색상이 보라색이라는 점도 로아가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될까? 로아가 욕조 벽에 마음껏 뿌리고, 찍고, 손바닥으로 펼치는 물감 색도 주로 보라색이었고, 지난번 큰 소리를 내며 즐겼던 문화센터 미술활동 야광색상 놀이에서 사용된 색상도 주로 보라색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말이지. 생물학적 관점에서 실제로 어린아이들은 이른 시기부터 다양한 색상을 구분할 수 있으며 자연스럽게 밝고 활기찬 색상에 이끌린다고 한단다. 아기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력에는 이들 색상이 보다 잘 보이기 때문이라지. 밝고 활기찬 색상의 대표적인 색인 보라색이 <해럴드와 보라색 크레용>과 같은 동화에 사용되거나 로아가 보라색에 이끌리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
아이들이 보라색을 좋아하는 이유를 심리적인 관점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구나. 특정 색깔이 특정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색채심리학에 따르면, 보라색은 창의성과 상상력, 신비와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아이들이 보라색에 이끌린다고 해. 동화 <해럴드와 보라색 크레용>에도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 같구나. 이 동화를 쓴 크로켓 존슨이 보라색상이 갖는 색채 심리학 내용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라색이 특별한 색상이고 어린이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자극하는 색상으로 생각했던 점은 분명한 것 같아.
사실 색채가 인간의 감정이나 기분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생각은 색채 심리학이란 학술적인 용어와는 별도로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지속적으로 지적되어 왔단다. 고대 이집트와 중국에서는 색을 아픈 사람 치유에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고, 이미 다른 다양한 문화권에서도 이 ‘크로모테라피’ (chromotherapy)가 널리 행해졌었다고 해. 17세기 영국의 물리학자였던 뉴턴이 빛에서 7가지 무지개 색깔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면, 18세기 독일의 위대한 문학가이자 사상가였던 괴테는 뉴턴의 광학이론을 발전시켜 색채가 어떻게 사람 감각과 마음에 영향을 주는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연구했던 것을 보면 색채와 인간 감정 간의 관계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인 주제가 되어왔다는 점을 알 수 있단다.
주인공인 꼬마 해럴드가 상상력을 실현시키는 방법으로 보라색 크레용을 사용하는 <해럴드와 보라색 크레용>에서 작가인 크로켓 존슨이 어린이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주된 내용으로 삼는 이유는 색채심리학보다는 이 작품이 나온 1950년대 미국의 시대적 그리고 사회적 상황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구나. 할아버지 학문영역이 미국문학과 문화이다 보니 작가를 시대 배경과 연결하는 것이 습관이기도 하지만, 크로켓 존슨의 경우 그렇게 추정하는 구체적인 이유도 있단다. 크로켓 존슨은 미국 국가 수사당국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어 감시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미국 내 사회주의 간행지 예술담당 편집자를 지냈기 때문이야.
크로켓 존슨이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밝힌 적은 없지만, 1950년대에 사회주의와 연관을 맺는다는 것은 당시의 억압적인 사회상에 저항하는 행동이어서 위험한 일이었단다. 1950년대 미국사회는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따른 보수화의 시기였지. 전통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자립을 기본적인 정신으로 삼아온 미국사회에서 바로 이 개인의 자유와 삶이 유래 없이 억압받던 시대였단다. 또한 1950년대는 전후 베이비붐 시대이기도 했단다. 어린이에게 관심이 큰 아동작가로서 크로켓 존슨은 억압의 시대를 살아가는 베이비붐 세대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가치가 무엇일까 고민했던 것은 당연했을 것이야.
이 시기에 아동발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중요한 이론이 나왔던 사실도 주목할 만하구나. 어린아이들의 인지발달은 성장 단계에서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교육받는지가 결정적이라는 피아제의 이론과, 아기부터 성인까지 인간이 통과해야 하는 성격 발달 8단계에서 청소년기까지의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개인의 생물학적 욕구보다 개인이 맺고 있는 사회적 상호작용 관계의 성격을 들고 있는 에릭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이론이 바로 그것이란다. 아동 작가로서 크로켓 존슨도 이들 아동발달 이론에 익숙해 있었던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피아제나 에릭슨이 아동의 인지적이고 정서적 발달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들고 있는 성장 환경의 핵심 내용은 그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였던 억압과는 대척점에 서는 자유로운 창의력을 통한 놀이와 상상력, 탐험이었단다. 놀이와 상상력, 탐험이 <해럴드와 보라색 크레용>의 핵심 내용으로 나오는 것은 우연히 아니란다.
‘창의력을 통한 놀이와 상상력, 탐험.’
로아가 살아가고 있는 이 기술발달의 시대에 ‘놀이와 상상력, 탐험’은 여전히 어린이 개개인의 창의적인 마인드에 의해 이뤄지고 있을까? 과학기술발달의 시대를 살아가는데 어린이에게 더더욱 중요해진 이 창의력은 오히려 기술에 의해 대체된 것은 아닐까?
<포켓몬 고>라는 게임이 좋은 예가 되겠구나. 로아야, 아빠가 어려서 제일 즐겨했던 게임이 뭔지 아니? 바로 <포켓몬> 게임이었어. 아빠가 어려서 많이 많이 좋아했던 햄버거 먹는 것보다도 더 좋아했으니까 말이야. 당시에 주머니(포켓)에 괴물(몬)을 모으고 캐릭터 카드를 모으던 단순한 이 게임이 증강현실이라는 첨단 기술을 적용해서 위치 기반 증강현실 비디오 게임으로 2016년도에 새로 태어난 것이 <포켓몬 고>란다.
말 그대로 ‘놀이와 상상력, 탐험’이 결합된 이 <포켓몬 고>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포켓몬을 포획하기 위해 포켓몬이 출현하는 지도상에 분포된 다양한 실재 장소로 이동하여 포켓몬의 소재를 찾아내는 ‘탐험’을 한단다. 혼자서 때로는 친구들과 협동으로 포획하는 게임이다 보니 컴퓨터 화면 앞에 앉아 리모컨을 조작하고 자판을 두드리며 수동적으로 하는 게임보다 이 ‘놀이’에 더욱 빠지게 되는 거야. 다만, 포켓몬이 출현하는 ‘포켓스톱’과 ‘체육관’은 현실 세계 환경 내에 위치하지만 증강현실 기술로 구현된 가상공간으로 플레이어는 포켓몬이 출현하는 지도에 표시된 위치로 이동하여 포켓몬을 포획하기만 하면 되는 게임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플레이어의 창의력이 발휘될 여지는 별로 없단다.
<포켓몬 고>처럼, 가상현실이나 인공지능과 같은 첨단 과학기술은 그동안 인간의 고유 영역으로 알려진 상상력과 창의력의 많은 부분을 대체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구나.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이 해오던 단순 활동은 과학기술에 의해 대체되면서, 인간에게 남겨진 고유 영역은 그만큼 중요해지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그 영역까지도 과학기술에 의존하려고 하는 안이한 태도를 갖는 것은 아닌지 싶단다. 우리 삶에 과학기술을 활용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일정 부분 현명한 태도이지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인간 고유 능력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기술에 종속시키는 태도임은 부인하기 힘들 것이야.
이 주제를 잘 드러내 주는 최근 동화가 있어서 간략하게 소개해 보겠다. <오싹오싹 이야기!> 시리즈로 칼데콧상을 수상한 미국 아동작가 아론 레이놀즈의 가장 최근 동화 <오싹오싹 크레용>이야. 앞에서 소개한 <해럴드와 보라색 크레용>처럼, 이 동화에서도 흥미롭게도 보라색 크레용이 등장해. <해럴드와 보라색 크레용>에서 보라색 크레용은 해럴드의 상상력을 실현시키는 도구로 나오지만, <오싹오싹 크레용>에서 보라색 크레용은 주어진 상황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갖춘 존재로 마치 자기가 주인인양 토끼 제퍼스를 지배하고 조종하려 든단다.
그림 그리는 것을 빼고는 학교에서 잘하는 것이 없던 제퍼스는 우연히 보라색 크레용을 얻은 뒤로 학교에서 모든 과목에서 우등생이 된단다. 크레용의 도움으로 언제나 낙제하던 받아쓰기 시험에서 100점을 받는가 하면, 어렵기만 했던 수학 숙제도 쉽게 해치운단다. 크레용의 도움으로 학교에서 갑자기 우등생이 된 제스퍼는 선생님과 친구들의 칭찬에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불안해진단다. 왜냐하면, 자기 실력이 아니어서 거짓말하는 기분이 들었거든. 그런데, 정작 크레용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우쭐해하고 즐거워 보이는 것이 아니겠지. 결국 제스퍼는 크레용을 없애버리기로 결심한단다. 그러기 위해 크레용을 멀리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전자레인지에 녹여보기도 하는 등 여러 방법을 썼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크레용은 어느새 제퍼스의 필통으로 돌아와 있는 거야. 그때마다 크레용은 제퍼스를 더욱 고약하게 대하면서 지배하려고 들지.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려 보냄으로써 제퍼스는 마침내 크레용을 떨쳐내고,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성적은 아직 한참 모자라지만 스스로 대견해하고 행복을 느낀단다.
두 이야기에서 왜 보라색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할까? 실제로 보라색에는 정반대 되는 특성이 부여되어 있단다. <해럴드와 보라색 크레용>에서처럼 보라색은 상상력과 창의력의 긍정적인 색상으로 연계되어 있는 반면, <오싹오싹 크레용>에서처럼 보라색은 악이나 불안, 광기, 억압, 교만과 같은 부정적인 색상으로 받아들이기도 해.
<오싹오싹 크레용>과 챗GPT 둘 다 2022년도에 발표되었는데, 이 동화가 챗GPT 출현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어 보여도 우리 삶에 큰 변화를 초래하는 과학기술 발달에 대한 우려를 담고 있다고 봐도 좋을 듯하구나. 인간이 만든 기술을 인간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할까. 그래서일까? 할아버지가 가끔씩 정보 탐색에 이용하는 챗GPT 메인 화면을 보면 어쩐지 ‘오싹오싹’한 기분이 드는 이유가. 이 메인화면의 글자와 그래픽 모두가 보라색의 단일 색상으로 도배되어 있단다.
이 동화 속 크레용이 제퍼스의 삶을 지배하고 조종하려고 드는 것처럼, 일상생활에서건 공부든 사회생활에서든 기술발달의 결과물에 의존하는 이 시대 인간도 자칫하면 과학기술의 노예가 되어 조종당하는 것은 아닌지 이 동화를 통해 생각해 보게 된단다. 특히, 로아는 할아버지와는 달리 어려서부터 과학기술 발달에 노출되고 의존하는 일이 훨씬 많아질 것이니, 인간으로서 자기 정체성과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한 노력을 소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할아버지 바람이란다.
<초인류>
할아버지가 근래에 읽었던 책 중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책 제목이란다. 올해 출간된 만큼 가장 최근의 과학기술 현상을 담고 있는 이 책은, “AI와 함께 인공진화에 접어든 인류의 미래”란 부제가 보여주듯이, 이미 기술과 인공진화 단계에 접어든 인류에게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잘 설명해주고 있더구나. 할아버지가 과학기술에 무지해서인지 책 내용 중 쉽게 공감이 가지 않는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기술발달 시대에 주관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의 감정의 중요성에 대한 내용은 로아와도 꼭 공유하고 싶구나. 핵심 관점을 간략하면 다음과 같아.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방대한 정보와 지식 습득이 손쉽게 이루어지게 될 미래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고도화된 이성적 합리성을 지닌 존재가 될 것이라고 대개는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정보와 지식을 기반으로 한 객관적 분석만으로 의사결정을 내리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의사결정에는 객관적 분석 이외에 그 상황에서 개인이 느낀 감정, 그 상황을 바라보는 도덕적 직관 등이 관여된다.
나는 마침내 대기의 진정한 색을 발견했다. 그것은 보라색이다. 신성한 공기는 보라색이다.
클로드 모네가 수련을 남들과는 달리 보라색으로 그렸듯이, 개개인의 주관적 감정과 도덕적 직관은 ‘인간됨’의 고유 영역으로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한다 해도 대체될 수 없는 것이겠지. 그러니 로아가 어려서부터 기르고 소중하게 여겼으면 한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