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여섯 번째 날 ― 1. 30.
이제 기차를 타기 위한 모든 준비를 나름 완벽하게 마쳤다. 나는 아침 일찍 호스텔 스태프들에게 작별 포옹을 건네고 무르만스크로 떠나기 위해 기차역으로 향했다. 상트의 반의반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떠난다는 게 약간 아쉽기는 했지만, 겨울의 상트보다 춥지 않은 날에 상트를 보러 오는 것이 경험할 수 있는 게 더 많다는 것을 알고 떠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득을 본 것이라 자위했다. 나중에 강변에 있는 얼음들이 모두 녹을 때, 사랑하는 그녀와 다시 한 번 이곳을 방문하리라 다짐하며 기차에 몸을 실었다.
세계에서 가장 긴 철길 위를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최근에는 설국열차 또는 은하철도 999라고도 불리는 이 열차.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 열차의 이름을 들어 보았을 것이고, 이 열차에 대한 로망을 품지 않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 또한 티켓 구매를 끝마쳤을 때 이 열차를 드디어 탈 수 있구나, 생각하며 감동에 겨워 눈물을 찔끔 흘릴 정도였으니까.
창밖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고, 달려도 달려도 끝을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은 설원 위를 가로지르며, 멈추지 않고 밤낮없이 내달리는 이 열차. 그리고 그 안에서 마주칠 수 있는 수많은 인연에 대한 로망들. 많은 날 동안 이 열차를 탈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나에게 가슴 찡한 감동을 선물했던, 그 열차에 이제는 내가 타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 중국에서 탔었던 침대칸 기차의 기억들이 어렴풋이 나의 머릿속 언저리를 스치듯 지나갔다. 그때 탔었던 기차는 지금 내가 타고 있는 기차보다 훨씬 구식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의 키는 176.7㎝, 올림해서 177㎝. 그리 큰 키는 아니지만, 창가 옆 가로방향으로 자리하고 있는 나의 자리는 다리를 편하게 펼 수도 없을 만큼 짧았고, 나의 키가 러시아사람들의 평균 신장보다 크나? 라는 착각까지 들게 했다. 어쨌든 다음번에 기차를 탈 때는 이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를 선택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기차는 철길을 따라 설원을 향해 나아갔다. 시간이 흐르며 도시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기차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공간으로 변했다. 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단 하나. 나의 스마트폰뿐. 인터넷도 되지 않고, 와이파이조차 없다.
현대인에게 있어 목숨과도 같은 스마트폰이지만, 인터넷이 되지 않는 스마트폰은 벽에 못질할 때 망치 대용으로 쓰는 것 외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인터넷이 되지 않는 스마트폰이란, 스마트는 빠지고 핸드폰이 가지고 있는 문자와 전화의 기능 정도는 수행할 수 있다지만, 여기는 러시아. 내가 이곳에서 누구에게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낼 수 있단 말인가? 고로 ‘심심하다’라는 이 하나의 생각으로 나의 머리가 가득 차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바깥 경치를 바라보며 감동을 먹는 것도 20~30분이면 충분히 배가 불렀고,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보이는 흑백의 삼나무 숲은 수신이 끊어진 티브이에서 신호를 잡지 못하고 온종일 회색 노이즈만을 송출하며 지지직거리는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리는 기차는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나를 꿈에서 깨게 만들었고, 현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철저하게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느껴지는 편안함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한적한 여유를 즐기는 데 최대의 적은 휴대전화다. 휴대전화는 우리에게 쓸데없이 많은 할 것들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 휴대전화가 우리의 손을 떠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한 지 30분 만에 나는 핸드폰으로 미리 산 소설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고, 나의 귓바퀴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덜컹거리는 백색소음이 아닌, 이름 모를 어느 가수의 재즈 음악이었다. 로망은 개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