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시간 동안 군락을 지으며 자라왔다는 비자나무 숲 사잇길을 말없이 걷는다.
이른 오후 무렵, 숲 주변을 가득 메우다 못해 눈앞에 놓여 있는 황톳빛 길마저 뽀얀 수증기로 덮으며 피어나는 안개들. 안개들은 시선의 끝자락 즈음에서 알음알음 눈인사 건네다 구름들과 더불어 뭉쳐지고 짙게 찍힌 발자국의 뒤안길로 스며들다 사라져 간다.
이전에 겪었던 몇 번의 만남과 오늘의 시간이 달랐던 점이라고는 빼곡히 들어차 있는 비자나뭇잎자락 너머로, 계곡처럼 갈라진 잎사귀 위로 아쉬움이 방울지며 모여들다 처연하게 기울어진 나뭇가지를 타고 내 어깨 허전했던 공간으로 기어코 쏟아져 내렸다. 랄까.
이미 끝나버린 서로를 길 위에서 마주치고 한 두 마디 의미 없는 인사를 건네던 연인처럼, 차곡차곡 둘만의 추억을 함께 쌓아가던 인연이 이제는 추억이 되어 버린 것처럼, 삽시간에 뭉쳐든 방울들은 찰나의 시간 사이마저도 비집고서 적시다 엉기어 떨어진다.
빗물에 젖어 짙게 변해버린 흙바닥 위로 질척이는 발걸음이 이어진다.
돌, 바람, 그리고 여자가 많다는 삼다도에 바람은 불지 않았다. 함께 자리했던 아버지는 제주도를 둘러보며 돌과 바람과 부동산 중개 사무소가 많아 삼다도라며 넌지시 이야기했다.
사각거리는 발자국 위로, 돌담길에 아로새겨져 이제는 흐릿해져 버린 세월 위로 빛살이 쏟아진다. 비자나무 손그림자 사이로 떨어지는 희미한 빛살에 초록빛 이끼들은 잔잔하게 반짝인다.
짧은 호흡을 여러번 이어가다 떠다니는 비자의 숨결에 넌지시 발을 맞춘다. 그러다 한순간에 깊고 커다란 숨을 느릿하게 들이킨다. 비릿하면서도 상쾌한 무언가가 콧속으로, 나의 가슴속 깊은 그곳에 초록빛 청명함을, 파릇한 무언가를 심고서 쓸려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