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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건 Feb 29. 2020

민낯을 보는 방법

풍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느영화제의 황금종려상으로부터 시작한 여정을 오스카 4관왕으로 마무리 지었다. 덕분에 모국어 영화를 핀란드 상업 영화관에서 관람하는 호사를 누렸다.

 

기생충이 이렇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유를 생각해보자. 사실 기생충은 관객 입장에서 기분 좋은 영화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과 불평등의 문제를 강력하게 꼬집고 있다. 직접적인 비판이 아닌 스토리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풍자하는 방식을 택했다. 블랙 코미디의 방식 덕분에 관객이 무조건 분노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웃음 끝에 씁쓸한 쓴맛이 느껴질  있게 되었다. 평소 그냥 지나칠 불평등의 문제를 다시 한번 수면 위로 꺼내 생각하고, 공감하게 만들었다. 별로 보고 싶지 않았던 민낯을 보게 했다.

 

풍자의 접근 방식은 동서양을 과거와 현재를 가리지 않고  세계가 사랑하는 접근이다.

 

18세기  영국의 국교회 성직자였던 조나단 스위프트는 정치싸움이 심했던 영국 사회에 염증을 느꼈다. 이를 비판하기 위해 1726 나온 <걸리버 여행기> 출판 이후 3 만에 1 부가 팔렸다. 이후 즉시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었다. 300년이 지난 지금, 지구의 반대쪽에서 한글을 쓰는 나도 <걸리버 여행기> 읽고 감동을 느껴 서평을 작성하고 있다.  책이 택한 수사법과 풍자의 위력은 시간을 관통한다.

 

<걸리버 여행기>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 스스로  책을 작성한 이유를 

나의 모든 작업에서 내가 하려고 하는 주요 목표는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려는 것이 아니라 화나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 밝힌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들을 가장  화나게 만들  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기분 나쁘기만  이야기에는 화가 많이 나지 않는다. 그냥 무시할 것이다. 아무리 합리적인 문제를 제기한들 읽는 내내 기분이 나쁘다면  책을 끝까지 끈기 있게 읽으려는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몸에 좋다고 한들 입에 쓰기만  약이라면 별로 찾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야기의 처음 시작은 흥미롭다. 이야기를 읽으면 실소가 난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읽을수록 씁쓸한 맛이 많이 느껴진다.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재미있게 읽고 나면 우리의 현실이 와 닿는다. 달콤한 초콜릿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씁쓸한 에스프레소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삶에 치여 피곤할 때 씁쓸한 에스프레소가 생각나듯, 이 책의 신랄한 풍자는 인간에 대한 염증으로 생긴 피곤을 씻어준다. 그렇기에 일본의 국민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작품을 일컬어 인간을 증오하는 정신과 비범한 착상이 기가 막히게 짜인 작품이다.” 라며 극찬했다.

 

 <걸리버 여행기> 뱃사람을 돌보는 의사 걸리버의 4번에 걸친 여행을 바탕으로 작성된 여행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실제 여행기와 매우 유사한 형식으로 책을 집필하여 의도적으로  이야기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같은 기분을 들게 한다.  여행지는 소인국, 릴리펏이다. 우리보다  12 정도 작은 소인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지 비꼬아 이야기한다. 걸리버가 지켜야 하는 조항들의 시작은 참으로 우스꽝스럽다.


"가장 강대한 릴리펏의 황제인 나, 골 바스트 모마렌 에블 레임 가알딜로 셰린 물리 울리규는 전 우주의 기쁨과 공포이며, 나의 통치력은 지구의 끝까지 이르는 5,000 블라 스트럭(12마일, 19km)의 영토에 미치고, 왕 중의 왕이며, 모든 인간보다 키가 크고, 두발이 내리누르는 힘은 땅의 중심까지 미치며, 머리는 태양과 부딪친다." - <42P>

소인국에서 가장 크다는  키는 중지 손가락 정도의 크기다. 비교는 도토리  재기  자체다.  조그마한 왕의 두발이 누르는 힘은 귀여운 수준이다.  나라에서 생각할  있는 최고로  단위는 겨우 20km 지나지 않는다.  소인국에서 36개월 동안 정말 끈질긴 전쟁을 하고 있는 이유 역시 참으로 하찮고 우습다. 계란을  쪽의 끝으로 깨야 하느냐, 작은 쪽으로 깨야 하느냐의 이유다.  사소한 이유로 전쟁에서 릴리펏에서만 3 명의 최정예 해군과 육군의 병력을 상실했고, 계란을 짧은 쪽으로 깨느니 죽음을 택하겠노라 장렬하게 희생한 사람의 수가  소요 때마다 1 1 명을 넘는다. 이런 하찮고 어이없는 이유로 검지 손가락의 작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서로 미워하고 죽이는 이야기를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조금만 멀리 떨어져 본다면 권력을 가지기 위해 싸우는 정치인이나 대통령 역시  군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비슷한 교리를 바탕으로 하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전쟁이 있었고, 기독교 내에서도 매번 서로를 탄압했으며, 현대에 와서도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서로 힐난하고 싸우고 있다.  가소로운 소인국의 이야기를 웃으며 보고 있으면  웃음 끝에 현대 우리들의 갈등의 하찮음이 서늘하게 드러난다.

 

다음 여행지는 대인국, 브롭딩낵이다. 이곳에서 걸리버의 처지는  반대가 된다.  나라의 전쟁을 혼자서 끝내버릴 정도로 강력했던 걸리버는 평소라면 하찮게 여겼을 자그마한 동물들에게 언제나 위협을 당한다.  손으로  나라의 함대를 끌고 있었던 그는 일생일대 가장  위험을 원숭이로부터 당한다.  대목에서 우리는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음을 느낀다.

 

"나는 영국 여인들의 흰 피부를 생각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매우 아름다워 보이지만, (중략) 확대경으로 살펴보면 아무리 부드럽고 흰 피부도 거칠고 조잡하며 색깔이 더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나는 것은, 내가 릴리펏(소인국)의 나라에 있을 때 (중략) 어느 여자는 주근깨가 많고, 또 다른 여자는 입이 크다고 말하곤 했는데, 나에게는 그런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 - <100-101P>

모든 것은  주변의 맥락에 따라 상대적으로 느끼기 마련이다. 절대적 잣대가   있는 기준은 없다. 우리가 죽고 못 사는 외모도 거인의 기준으로는  똑같아 보일 것이고, 소인의 기준으로는 머리 절반 만한 징그러운 여드름만 보일 것이다.

 

다음 라퓨타 등지로의 여행기를 통해 실용적이지 못한 연구를 하는 현실을 가볍게 꼬집고, 마지막  책의 절정 휘늠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휘늠(houyhnhnm) 말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완벽한 이성적인 인간의 이상향에 가깝다.  나라에는 인간과 같은 모습을  "야후"라는 종속이 살고 있다. 야후는 흉측하고 추악한 생김새 때문에  생명체가 혐오한다. 휘늠이 야후에 대한 묘사를  할수록 생김새 외에 다른 점들도 인간과 겹쳐 보이기 시작한다. 결국 야후와 인간의 차이를 이성의 유무 외에 찾기 점점 어려워진다. 이성을 가졌음에도 오히려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인간의 낯을 마주하며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걸리버는 휘늠의 세계에 오랫동안 머물려 휘늠을 동경하며 인간과 야후를 혐오한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휘늠의 결국 그들로부터 추방 당한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걸리버는 인간이 인간을 혐오하는, 본인을 긍정하지 못하는 가장 슬프고 어리석은 삶을 살아간다.


휘늠을 지나치게 숭배해 걸리버의 말과 행동이 말과 같아진다. 스위프트는 걸리버 역시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버린다. 걸리버절대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못내 사람들을 한심하게 여기고, 상황에 따라 거짓말도 많이 한다. 여성에 대한 편견도 많아 보인다.


"이 야후는 다른 어떤 종족들 보다도 자신들끼리 더 미워한다. 그 이유는 흉측한 생김새 때문인데, 남의 것은 보이고 자신의 흉측함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 <309P>


야후처럼 걸리버는 본인의 허울은 살피지 않고 계속해서 인간에 대한 적개심만을 느낀다. 본인을 정작 끌어안아준 포르투갈의 선장 페드로의 무조건적인 선행과 자신을 반겨주는 가족과 아내에게 까지 공공연한 혐오감을 드러낸다. 본인을 추방한 휘늠만을 추앙한다.

 

휘늠은,   뜻인 자연이 만든 완전한 작품처럼, 자비와 신뢰 그리고 우정과 이성을 천성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인간은 그것들을 천성적으로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다. 그러한 미덕들은 평생에 걸쳐 학습하고 가꾸며 발전시켜야  대상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다. 기껏 돈을 주고 구한 선원들은 걸리버를 감금시키고 죽이려고 까지 한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놈들이다. 그럼에도 걸리버를 몰래 풀어준 제임즈 웰치라는 놈이나, 걸리버의 인간 혐오와 같은 기행도  참고 포르투갈까지 모셔준 페드로를 우리는 잊어서는  된다. 고통스러운  속에서도 나름대로 풍요롭게 인간 세계에서 적응할  있도록 도와준 것은 묵묵히 옆에서 지켜준 그의 아내 덕분이다. 휘늠이 아니란 말이다.

 

 책을 읽은 우리들은 미우나 고우나 인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지구 상에는 아쉽게도 휘늠이 없다. 매번 실수를 하는 나와 허점이 많은 네가 만나 모순이 많은 우리가 되어 부대끼며 살아가야 한다.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우리가 가진 결점을 냉철하게 바라보면서도  결점을 조금이나마 보완하려는 태도다. 기생충이나 걸리버 여행기가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사랑을 받는 이유는 결국 우리의 결점을 조금  객관적으로, 우화적으로  받아들일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작자들이 그러한 이야기를 만드는 이유는 그러니 우리 모두 혐오스러운 존재이다.”라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었을 것이다. 릴리펏에서처럼 너무 가까이서 보느라 사소한 것에만 치우쳐 있을 수도 있다. 혹은 너무 멀리서 보느라 문제가 보이지 않았거나, 너무 이상에만 빠진 라퓨타의 사람들 처럼 치기꾼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니 이러한 이야기 들을 읽고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민낯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만들어 보자. 그것이 <걸리버 여행기> 쓰인 이유라고 믿고 싶다. 아니라면 적어도 나는 그러한 이유로 사람들이 풍자와 해학의 이야기를 소비했으면 좋겠다.


    

참고: <걸리버 여행기> -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송낙헌 옮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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