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수술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감사하게도 아버지께서 보호자로 동행해 주셨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재료 손질을 끝내고, 어머니는 홀로 장사를 하시고 대신 오늘 장사를 일찍 끝내기로 했다.
오랜만에 집에 도착했다. 28년 동안 이사 한번 없이 살아온 동네라 눈을 감고도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매번 허세를 부리곤 했다. 그러나 안대를 끼고 한쪽 눈으로 바라보고 있어서 그럴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부터 도착한 집까지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역시, 눈을 감고 길을 찾을 수는 없었나보다.
아버지는 아까부터 계속 무언가 말씀을 하시려는 것 같은데 말문을 떼지 못하고 계신다. 나 역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책상 위에 덩그러니 외롭게 올려져 있는 리모콘의 모습을 보니 참 새롭다. 항상 애틋한 사랑을 받던 리모콘이 홀로 버러져 있으니 참 처연하게 보인다. 아버지도 어색하신지 리모콘을 쥐신다. 역시, 리모콘이 제 자리에 간 것 같다. 그래 이게 자연스럽지.
아버지의 팔은 리모콘까지 이어져 있었다. 밖에서 일을 하실 때 잠시 리모콘을 팔에서 분리하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시에 리모콘과 함께 하셨다. 리모콘은 아버지의 오른손 그 자체였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리모콘을 한번도 잡아 본적이 없다. 그 리모콘에는 놓아야 하는 정확한 각도까지 있다. 공식적으로 티비를 보아선 안되었던 나 였기에 매일 몰래 티비를 보고 부모님의 가게가 끝날 때 쯤 마지막 볼륨과 채널까지 원래대로 맞춰 정확히 그 자리에 리모콘을 놓았었다. 정확히 접어 놓은 신문 바로 옆 테이블 오른쪽 아래부분. 그렇기에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TV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오른손을 TV를 향해 올린 모습이었다. 그렇게 나는 딱히 기억에 남는 대화를 해본 적이 없이 자랐고, 이제 아버지와 아들은 어떤 대화를 나누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말문을 여신다.
아빠가 살아보니깐. 삶이란건 말이야. 생각보다 똑똑해. 삶은 우리가 무엇을 배우길 바랄때 하나씩 선물을 포장해서 보내. 그런데 그 선물은 시련이라는 포장지로 쌓여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련이라는 포장지가 싫으니까 그것을 무시해. 그 안에는 선물이 들어있는데 말이야. 그래서 그 선물은 어딘가 구석에 쳐박혀 있지.
그런데 이 삶이라는 친구는 정말 철저해. 보낸 선물이 도착해서 잘 쓰이고 있지 않으면 선물을 다시 보내더라고. 이번에는 무시하지 못하도록 더 큰 포장지에 싸서 말이야. 그래서 원하는 교훈을 받을때까지 계속 반복하지. 지금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하자.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큰 포장에 쌓여있는 것 같네. 이번 포장은 넉넉히 크게 포장이 되서 무시하고는 못 넘어가겠네. 대신 이 포장을 뜯으면 그 안에는 반드시 큰 선물이 들어 있을거야.
쉬면서 뭘 제일 하고 싶은지 한번 잘 고민해보자. 엄마아빠 가게 멀쩡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버지의 말이 끝난다. 항상 묵묵하게 tv만 바라보시던 아버지다. 어색하다. 어떻게 말을 이어가야할지 모르겠다. 긴 침묵이 방을 가득 채운다.
아빠는 다시 가게 가봐야 하니까 tv보고 있어. 눈은 쉬라고 했으니까 보지는 말고 누워서 듣기만 해.
그렇게 오랫동안 잡으신 리모콘을 내 손에 꼭 쥐어준다. 오래된 리모콘이라 손때를 많이도 탔다. 차가운 리모콘의 기계적인 느낌과 아버지가 한손으로 꼭 잡고 계시던 부분의 온기가 함께 느껴진다.
눈물이 난다. 눈에 실밥 때문에 이물감이 느껴서 눈물이 자주 날 수도 있다고 했다. 아마 그것 때문 인 것 같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