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벽등반

by 안건

수술을 한 지 4달이 조금 넘었다. 벌써 새싹과 봄내음을 거쳐 날씨가 후덥지근 해지고 있다. 다음 학기 대학으로 다시 돌아갈 계획이다. 중단한 학업을 마칠 생각이다. 부모님께서도 지지해 주셨다. 참 재미없고 쓸데없다고 생각했던 심리학이다. 그러나 막상 눈 수술을 마치고 누워 있을 때 내게 친구이자 멘토, 탈출구가 되었던 것들은 칼 융, 알프레드 아들러, 에리히 프롬의 목소리였다.


융은 내게 외면보다는 내면으로 시야의 방향을 바꿔보라고 조언해 주었고, 아들러는 행복할지 말지는 결국 네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 에리히 프롬의 조용한 설교 덕분에 삶의 의미를 내 존재 자체로 다시 설정할 수 있었다. 그들의 상담과 응원 덕분이었다. 제법 힘들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어느 때보다 인생에서 소중한, 그리고 성장한 시간이 되었다. 그들은 나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고, 때로는 구체적인 실천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한 달 전부터는 집 근처에 있는 클라이밍 센터에서 실내 암벽 등반을 하고 있다. 근처에 삼촌이 클라이밍센터를 오픈하셨다. 젊었을 때부터 취미로 하셨던 클라이밍에 큰 열정을 느끼셔서 오래전부터 준비를 하셨다. 드디어 퇴사를 하시고 원하는 센터를 차리셨다.


어렸을 때 가끔 삼촌을 따라서 클라이밍을 가기도 했고, 그 여파로 대학교 때 클라이밍 동아리에 들기도 했다. 복학 할 때까지 시간도 남으니 센터나 운동하러 오라고 하셨다. 마침 운동을 해도 된다는 의사의 이야기가 있었기에 아침에는 부모님 가게에 나가 청소와 재료 손질을 도와드리고 점심시간부터 센터에 나간다. 센터에서 오픈하기 전 청소, 문 닫기 전 청소도 하고 있다. 따로 돈을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청소라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사실 청소하는 것이 내 적성에 제법 잘 맞아서 빠른 시간 내에 효율적으로 청소를 잘하고 있다. 삼촌께서는 가끔 칭찬도 해주신다. 청소를 잘해서 칭찬을 들을 때면 기분이 좋다.


클라이밍을 배울 때 삼촌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로 안전 장비다. 안전 장비는 언제나 꼼꼼히 체크해야 하고, 안전 장비가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그 장비를 바꿔야 한다고 한다. 안전 장비가 있기에 운동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안전하지 않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이다. 둘째로는 내 눈 앞에 보이는 길에만 집중하기다. 클라이밍은 특별한 정답이 없다. 사람의 신체별 능력별 그 사람에게 맞는 길이 따로 있다. 숙련된 삼촌이 가는 길은 나는 똑같이 따라갈 수 없다. 나는 내 길을 가야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내 팔 힘과 팔 길이에 맞는 내 길을 찾아야 하고, 그 길을 찾기 위해서는 오직 한 걸음 한 걸음을 떼어야 한다. 처음부터 "이런 길을 가야지"라고 결정하고 올라가도 막상 올라가면 여러 가지 변수가 생겨서 다른 길로 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그저 한 걸음 한 걸음씩 올라가다 보면 결국 하나의 코스에서 벨을 울릴 수 있다.


나는 얼마 전 벽에서 미끄러졌다. 그러나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주변에 부모님과 가족이라는 안전 장비가 있었다. 안전 장비 덕분에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미끄러졌기 때문에 가랑이가 제법 아팠다. 그리고 중심을 잡기 힘들었다. 그렇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다시 중심을 잡아 다시 벽에 붙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다. 그리고 다행히, 간신히 다시 벽에 달라붙었다. 지금까지는 휙 휙 위로 잘 올라가는 사람의 길을 따라가려 했었다. 내 외형과 비슷한 모습을 한 사람들을 많이 모방하려 했다. 그러나 이제는 깨달았다. 그들은 그들의 길이 있고, 나에겐 내 길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그들의 길을 따라가지 않으려 한다.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정하지는 않았지만, 내 눈앞에 있는 하나의 스텝에 집중할 것이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씩 위로 올라갈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다 보면 생각보다 금세 이 코스에 벨을 울릴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게 하나의 코스에 벨을 울리면 조금 더 어려운 코스에 도전할 것이다. 처음에는 불가능할 것 같은 코스도 이 길, 저길 시도하고 다시 대롱대롱 매달리고를 반복하다 보니 정복할 수 있었다.


클라이밍은 그랬다. 내 삶도 그러길 바란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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