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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건 Apr 03. 2020

관점에 정답은 없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 - 달걀을 중심으로, 박형서 저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라는 소설이 있다. 제목부터 이 무슨 x 소리야~ 싶은 제목이다.


먼저 <사랑손님과 어머니> 는 1935년 [조광]지에 실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만큼, 거의 모든 국민이 알고 있는 작품이다.


<사랑손님과 어머니>는 옥희라는 순수한 어린아이 화자를 설정하여 어머니와 사랑손님의 절절한 사랑을 그린다. 어린아이의 순수한 시선을 취함으로서 사회적 시선을 제외하고, 순수하고 마음 아픈 사랑의 서정성을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해석된다.


1. 소설이란?


이에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 달걀을 중심으로]라는 작품은 형식부터 기괴한 접근을 시도한다. 소설책의 한 대목으로 들어갔지만, 논문의 형식을 취한다. 서론, 본론, 결론이 있고 각주가 달려 있다. 인물도 배경도 없다. 우리는 먼저 이 소설을 과연 소설로 인정해 주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사실 소설에는 다양한 형식이 있다. 편지형식의 서간체나 일기체들도 우리는 소설로 인정한다. 소설이 될 수 있는 기준에는 다양한 기준이 있지만 ,그 중 픽션이라는 관점으로 한번 살펴보자.


이를 위해 우리는 해당 소설의 "필자"라는 사람을 한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 "필자"는 상당히 재수가 없다. 스스로를 엄청나게 높이며 ( "결국 필자와 같이 잘난 연구자~") 다른 연구자들을 지나치게 폄하한다. ("가금류의 가진 비평가~" , "붕산칼슘처럼 생긴~")


그럼 이 필자가 실제로 실력이 있는 사람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주석으로 달아 놓거나, 이 논문 안에 인용된 정보들의 절반은 허구다. 그나마 맞는 책과 사람의 이름도 잘못 적어 놓았다. (리카르드 호킨스 [못된 유전자] ->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논문 형식의 글에 비속어까지 쓰고 있는 이 필자는 굉장히 독특한 필자다.


이 필자를 우리는 실제 소설의 필자 박형서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일종의 소설에서의 화자라고 할 수 있으며, 박형서가 만들어 낸 가상의 인물에 해당한다. 가상의 "인물"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이는 분명히 소설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더 학문적으로 접근 한다면, 픽션과 네러티브로서는 소설이 되지만, novel로서는 소설이 될 수 없다.


2. 작가 박형서가 이 소설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은?


이 작품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 달걀을 중심으로]을 소설로 받아드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하나 하나 시시비비를 따질 것이 아니라 어떤 메세지를 작가 박형서가 전달하고 싶은지를 음미해야 한다.


의외로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첫 문장에서 들어난다. 많은 문학 작품들이 "정답"을 요구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초중고등학교 때 시, 소설을 읽고 우리는 답을 찾는 것에 익숙해졌다.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보라색의 의미는 작가의 취향이라는 썰이나 시인이 자신의 시로 수능 문제를 풀면 반은 틀린다는 이야기, 작가 김영하가 자신의 소설을 교과서에서 달라고 요청하는 것들은 시사하는 바가 분명하다.  


언젠가 부터 우리는 소설과 문학에서 조차 정답을 찾는다. 그리고 그에 가장 큰 문제는 주류가 생각하지 않는 관점을 틀린 관점이나 생각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이에 작가 박항서는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 달걀을 중심으로]을 통해 관점의 다양성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정확한 의도를 짚어내는 것이 힘들다면 가능한 한 다양한 담론을 생상할 필요성이 그래서 존재한다."

라는 이야기를 작품 2번째 문장에 배치한다.

너무도 유명해서 모두가 감히 다른 관점을 이야기 하지 못하는 <사랑 손님과 어머니> 라는 작품에 다소 기괴하고 극단적이지만 새로운 관점을 논문이자 소설의 형태로 제시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어떤 문학작품에든 모든 상황을 관통하는 유일한 해는 없다. 읽는이의 관점과 시대에 따라서 때때로 달라지는 개인의 해 만 있을 뿐이다.


언제나 다양한 관점이 있을 수 있다. 누군가를 공개적으로 혐오하는 관점이 아니라는 선에서 말이다. (아주 모욕적인 표현이 있으나, 그 표현들은 모두 가상의 대상을 향하니 이 소설은 선에 걸쳐 있는 듯 하다.) 그 관점이 주류의 공감을 받지 못한다 해도, 그 관점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심지어 혹자에게는 아주 엉터리 같은 관점이라도, 오히려 주류의 관점의 타당성을 높이는 관점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 달걀을 중심으로]는 내 생각의 폭을 한 번 더 높이는 새로운 작품이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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