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에게 장미를

운명의 수레바퀴 2.

by 안건

대학교 입학 후 4월, 첫 과제를 받았다. 짧은 소설을 읽고 리포트를 쓰는 과제다. 에밀리에가 장미를. A Rose for Emily.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이다. 교수님은 포크너를 정말 좋아하시는 듯했다.


무너져가는 남부의 전통을 살리려고 노력했으며, 모더니즘의 정수이며 노벨상에 퓰리처상까지 침을 튀겨가며 설명을 하셨다.


그중 이 작품, A Rose for Emily, 은 영문과 학생이라면 모두 리포트를 꼭 써야 하는 작품이란다. a4용지 3장의 분량의 리포트가 필요하다. B4사이즈의 책에 9장 나와 있는 리포트에 3장이라니,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막막하다.


지난 3일 동안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수시가 끝나고 3달이 넘는 시간 동안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않았다. 매일 하던 공부는 유튜브로 대체되었다. 계속 유튜브를 보다 보면 어느 순간 재미있는 지점을 지나 습관적으로 보게 된다. 내가 원하는 영상들을 신기하게도 계속 추천해준다. 그렇게 유튜브를 보고 또 보았다. 다른 수업을 복습하려는 시도를 했었지만 공부를 해야 하는 의미를 모르겠고, 머릿속에서는 예능 프로그램이 아른거렸다.


그렇게 오늘이 되어 버렸다. 이야기는 대충 이렇다.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 몰락하는 남부 귀족 딸 에밀리에 대한 이야기다. 그녀는 아주 보수적인 아버지 아래 본인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게 30살까지 자랐다. 지나치게 자신을 높게 여겼던 아버지가 매번 결혼에 간섭하는 통에 결혼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그녀는 밖에 거의 나가지 않았다. 유일하게 사랑을 했던 것 같아 보였던 남자, 호머는 사라졌다. 그 이후는 완전히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했다. 세금도 면제받았다. 배려보다는 에밀리를 한 성숙한 인간으로 대접해주지 않는 쪽에 가까웠다. 그렇게 성장해 버린 탓일까, 세상이 변해도 그녀는 변하지 못했다. 자신의 세금을 면제해준 시장은 이미 은퇴를 한지가 오래전이지만, 시장의 이름만 이야기하며 소통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에밀리가 죽고 마을 사람들은 에밀리의 침실에서 호머의 해골을 발견한다. 그 해골 옆에서 그녀의 흰머리가 발견된다.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지 모르겠다. 답을 찾는 공부에 익숙했지, 답이 없는 공부는 해본 적이 없다. 그렇게 오랫동안 공부를 열심히 해왔는데 고작 3~4개월 유튜브를 보았다고 공부가 잘 안된다. 참 야속하다. 오늘 아침부터 컴퓨터에 앞에 앉아는 있었으나, 글을 시작하지 못해 유튜브로 도망가고, 죄책감을 느끼며 한참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지내는 나를 미워한다. 겨우 리포트 한 장이지만, 길을 잃은 기분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 망망대해의 바다에 홀로 던져진 기분이다.


학교에서 난 존재감이 없었다. 그냥 공부 잘하는 애, 너무 공부를 좋아한다고 천연기념물이라고도 불렸다. 나는 사실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냥 그게 내가 할 일이었고, 그것 말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금 내가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공부 말고는 아무것도 해본 적이 없다. 취미는 고사하고 청소도 설거지도 빨래도 요리도 해본 적이 없다. 그것을 해주시는 아주머니가 계셨다. 나는 공부를 잘하는 애였으니까, 정말 공부만 잘하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되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이곳에서 나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도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때 문득, 에밀리와 내가 비슷하게 느껴진다. 에밀리는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에만 익숙했다. 에밀리는 사랑을 하는 방법을 몰랐다. 자신과 소통하는 법을 몰랐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법은 더더욱 몰랐다. 에밀리도 어쩌면 나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 항상 누군가가 해주는 선택에 의해 살아오다가 갑자기 홀로 남겨졌다. 그래서 누군가를 가지고 싶을 때 정말 옳지 못한 방법을 취한다. 그녀가 악인으로 느껴지기보다는 불쌍하게 느껴진다.


제목처럼, 그녀에게 한송이의 빨간 장미를 선물해주고 싶다. 피차 소통하는 방법은 잘 모르니, 이야기는 해봤자 일 것이다. 그저 새빨간 가시를 품고 있는 장미 한 송이를 선물해 주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리포트에는 내 이야기만 잔뜩 채워진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하얀 배경에 글씨가 조금씩 채워지는 기분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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