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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건 Aug 10. 2020

엄마가 가장 처음에 사준 옷은 언제나 아름답다.

소설 <엄마가 사준 옷>은 화자가 사후세계 로쿠롯이라는 곳에 오면서 시작한다. 로쿠롯에 오면 처음으로 피부를 벗기는 시술을 하고 피부는 로쿠롯에서 나가게 되는 날에돌려받는다. 그리고 영상으로 백인 남자와 흑인 소년을 보여준다. 이에 대한 설명은 아래 각주로 친절하게 2012년 2월 미국 플로리다에서 발생한 조지 짐머만 사건을 모티프로 한 것이라고 설명하여, 이 소설은 인종문제를 다룰 것을 선언한다.     


이 소설은 시작하자마자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고 선언하며 현실의 노선을 이탈한다.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다. 대부분의 소설은 역설적으로 진짜 같아 보이려는 노력을 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핍진성을 포기한다. 소설은 미메시스로서 대상을 재현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데아의 모방인 현실을 모방하는 것, 즉 2차 모방이 소설이다. 현실은 이데아가 아니니 이미 많은 갈등과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그 현실을 모방한 소설의 세계는 더더욱 이데아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 소설에서 본격적으로 다루는 인종문제를 떠올려보자. 이 소설에서 언급한 2012년을 보면 백인 짐머만이 순찰 도중 ‘후드티를 입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17세의 마틴과 시비 끝에 그를 사살하였고, 나아가 백인으로만 이루어진 배심원단에 의해 그는 무죄판결을 받는다. 마틴은 흑인이라 목숨을 잃었고, 짐머만은 백인이라 죗값을 치루지 않았다. 8년이 지난 2020년의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비슷한 세상을 살아간다. 2020년의 George Floyd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지나친 진압을 당했고,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아직도 말이 안 되는, 도덕적이지 못한, 비현실적인 세상에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을 현실 같아 보이려는 노력을 포기한다. 소설은 분명히 효용성이 있다. 이야기를 들음으로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문제점들이 훨씬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의 화자는 독자가 가장 가깝게 느끼며 마음을 주는 것에 비해 이 소설의 화자는 독자로 하여금 쉽게 마음을 줄 수 없는 인물이다. 도덕적으로 너무도 올바르지 않은 화자다. 화자는 자신을 백인으로 생각하여 흑인에 대한 혐오를 서슴지 않는다. “깜상”이라는 표현을 소설 전체에 걸쳐 계속 사용하고, 흑인은 백인에 비해 열등한 종족이고 그들과는 어울릴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아가 화자는 신빙성이 없는 화자다.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각주로 단 2,3번에서는 “글쎄, 동명이인 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등의 단서를 달아 의도적으로 스스로의 신빙성을 낮춘다. 신빙성도 떨어지고, 도덕적으로도 올바르지 않은 1인칭 화자를 사용함으로 인해 독자들은 이 이야기를 비교적 떨어져서 보게 된다. 1인칭 화자의 사용 덕분에 이 특이한 세계 로쿠롯을 경험하는 화자의 황당함과 당혹스러움과 같은 감정을 모두 생생하게 느끼고, 화자와의 적절한 거리유지를 통해 이야기를 사유하면서 보게 되는 두 가지 장점을 모두 가지게 된다.      


로쿠롯에서는 이미 피부를 없애, 서로 백인인지 흑인인지 구분 할 수 없다. 더군다나 기억이 부분적으로 삭제되어 과거에 자신이 흑인인지 백인인지 명백하게 기억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백인, 흑인으로 편을 나누어 싸운다. 그러던 중 화자는 “토끼 존(John the rabbit)"을 만난다. 그는 이곳에서 진짜 백인을 가려내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그의 성격은 극적 방법(간접적 제시)을 통해서 주로 소개 된다. 그는 평면적이고 전형적인 인물이다. 소설에 진행에 따라 특별히 성격이 변하지 않는다. 한 개인으로서 보다는 막연하게 흑인을 혐오하고, 일종의 주술적 분위기를 풍기는 kkk의 공통성을 개인적 형상에 통합한 인물이다.”내말이 그 말이네, 그러니 이곳에 같은 인간이라고 깝치는 껌둥이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에서 보이듯이, 아주 전형적이고 노골적인 흑인 혐오를 보이는 인물이다.      


화자는 존과 함께 흑인들과 전투에 나선다. 그 전투는 소금을 뿌려, 피부를 검게 만드는 일이다.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이곳 로쿠롯에서는 서로의 인종을 분간할 수 없다. 그러나 존은 화자에게 “다시 말해 천사들이 아무리 껌둥이를 없앤다고 해도 더는 문제될 게 없다, 이 얘길세. 우리가 나서서 저렇듯 다시금 껌둥이를 만들면 그만이니까”라고 말한다. 즉, 그들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인종이라는 문제를 스스로 만들어 내 혐오를 자발적으로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희생양 메커니즘으로서 설명할 수 있다. 희생양 메커니즘이란 한 공동체가 어떤 존재를 희생시킴으로서 극단의 무질서와 폭력의 에너지를 배출시켜 내부적 폭력을 정화하는 것을 말한다. 백인 사회에서는 사회 내부의 문제나 불만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해결하려는 방향보다는 혐오할 수 있는 다른 집단을 만들어 내어 그 문제를 야만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화자와 존은 무려 2만년 동안 그 전투를 반복한다. 여기서 2만년의 세월은 단 두 줄 “지난 세월 2만 명에 이르는 깜상들을~”로서 지나간다. 이는 G.쥬네뜨의 서술시간론의 지속 중 축시(요약)에 해당한다. 이를 통해 서사의 다양한 속도가 창출된다. 2만년이 지나자 드디어 화자는 이 모든 것에 환멸을 느끼며 회의감을 표출한다. 이에 존 역시 “다른 할 일이 없지 않은가” 라며 이 모든 일이 아무 의미도 없는 혐오를 위한 혐오였음을 쓸쓸하게 털어 놓는다.      


마지막에 존과 화자가 천사들로부터 껍데기를 돌려받는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다. 이 껍데기는 엄마가 사준 옷이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인종은 태초에 엄마가 가장 먼저 사준 옷이다. 사실 존은 흑인이었고, 화자는 고려사항에도 없는 동양인이었던 것이 밝혀진다. 존은 지금껏 자신의 동료들을 향해 혐오를 해왔던 것이고, 화자는 제 3자로 관견도 없는 사람으로서 2만년의 시간을 혐오와 전쟁에 쓸데없이 시간을 소모한 것이다. 아이러니하다. 앞서 화자가 존을 처음 만났을 때 인종을 드러내는 어떤 표현 없이 엄마가 처음으로 옷을 사준 얘기를 해줬다. 그때 존은 아름답다고 했다. 그러나 엄마가 사준 태초의 옷, 인종을 입었을 때 화자는 존에게 “야, 이 씨발놈아~”라는 반응을 보인다. 이런 소설속의 장치를 통해 인종 간 갈등은 정말 허망한 것이며, 사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비본질적인 가치를 인간들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 서로를 혐오하며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인종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엄마가 처음으로 사준 옷이다. 인간은 그 아름다운 옷의 색깔로 서로를 구분 짓고 싸우고 있다. 


소설 : http://www.daesan.or.kr/webzine/sub.html?uid=3850&ho=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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