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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건 Aug 11. 2020

청년이라는 단어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박민규

언제부터 일까? 청년이라는 단어는 별로 낭만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푸르른 캠퍼스를 누비며 지식을 탐구하고 철학을 성립해 나가는 그런 멋드러진 시간으로 비춰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출처: 썸트렌드

'청년'이라는 단어가 어떤 감성을 가져오는지 분석한 트렌드다. 그나마 조금의 파란색 희망이나 최선등의 단어가 있기는 하지만, 불안, 부담, 부족한 ,어려운이라는 단어들에 더 눈이 간다. '청년'이라는 단어는 벌써 불안감을 많이 내포하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는 IMF를 간신히 지난 21세기 초를 간신히 살아가는 한 가정의 평범한 상업고등학교에 다니는 고등학생의 눈으로 본 이야기다.  


이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사용하고 있다. 서술자와 인물이 일치 하는 덕분에 이 시기를 살아가는 한 평범한 고등학생의 내적 이야기를 생생히 들을 수 있다. 화자는 “좀 노는 편”이었다. 중학생 때 아버지의 회사의 삭막함을 온 몸으로 느낀 후 자연스럽게 조용한 소년이 되어버렸다. 돈이 필요했고, 아주 간단한 산수 때문에 그 길을 선택했다. 인간은 자신만의 산수가 있다. 수학이라는 학문이 인생에 필요한 인생도 있지만, 그것은 소수 특권이 있는 삶에 불과하다. 학문이 아닌 더하기 그리고 빼기. 간단한 것이다. 간신히 번 돈을 더하고, 꼭 써야 하는 돈을 빼다보면,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하다보면 삶은 끝난다. 화자는 그저 아버지의 산수를,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산수를 미리 알아버린 것이다. 특별히 많이 더하기의 연산은 이뤄지지 않지만, 병든 할머니가 특별히 많은 빼기의 연산을 수행하고 있다. 특별히 불행하고 누군가를 원망해야 할 일은 아니다. 함께 놀던 친구들이 “나? 글쎄 요샌 연예게가 어떨까 싶어”라고 말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그는 그저 말을 삼킨다. 친구들보다 조금은 빠르게 어른이 되어버린 탓일 것이다. 화자는 그렇게 알아버린 산수를 그냥 묵묵히, 더하고 뺄 뿐이다.      


이 소설에서는 명확한 배경을 소개하지 않는다. 이 소설이 2004년 <창작과 비평>에 실렸고, 편의점에서 1시간을 일하면 천원을 받는 다는 것을 봤을 때 아마 21세기 초반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옮겨놨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 이 소설의 배경은 어느 곳으로나 옮겨볼 수 있다. 이 배경을 21세기의 한국으로 바꿔 보아도 큰 어색함이 느껴지진 않는다. 최저시급이 조금 올랐지만, 그것 이상으로 물가는 올랐고, 아르바이트 이외의 일자리는 오히려 그때보다 더 없어졌다. 지금 2020년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그저 각자에게 맞는 산수 문제를 하기 싫은 공부를 하기도 하고, 회색빛의 일터에 나간다. 모두 더하고 빼고 있다.      

    

아버지는 “미안하구나”라는 말로 이 소설에서 처음 등장한다. 아들이 시작한 일에 대한 관심,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닌 사과는 그의 무기력하고 지친 모습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삶의 무게 중심은 높아도 너무 높았다. 개성도 빛도 없는 무슨 상사에 다니는 아버지, “쥐들이 다닐 것 같은 어둑한 복도와, 형광등과, 칠이 벗겨진 목조의 문”에서 자신의 시간을 시간당 삼천오백원의 가치로 바꾸는 일을 하고 있었다. 매일을 간신히 버텨 죽지 않기 위해 매일을 살아가는, 살아가고 있기 보다는 살아지는 그 당시의 무수한 세일스맨의 전형이다.     


화자 역시 비교적 평면적이고 전형적인 인물이다.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특별히 성격이 변하지 않는다. 21세기 초반 녹록치 않았던 한국의 사회를 거쳐 왔던 청년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병든 할머니가 있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특별한 것이 없는 일하는 그러한 계층이다. 적당히 “좀 노는”학생 이었지만, 적당히 현실을 깨닫고 적당한 시점에 철이 들어 홀로 돈을 번다. 그 집단과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화자의 개인적 형상에 투영되어 있다. 화자의 어조는 체념적이다. 자신의 상황을 깨닫고, 특별한 개선의 의지나 불평 없이 체념한 상태다.      


이 소설은 큰 줄기에서 서사적 전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플롯을 보자면 처음 푸시맨을 제의 받고, 푸시맨을 시작하는 이야기와 화자가 아버지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주며 아버지의 삶을 본 것은 인과관계를 가진다.      


플롯의 시작에서 처음 화자의 산수는 천원과 천오백원이다. 조금 덜 힘든 편의점은 시간당 천원, 조금 더 힘이 든 주유소는 시간당 천오백원. 그런 상황 속 코치 형의 소개로 푸시맨 일을 시작한다. 푸시맨을 시작한 것의 이유는 간단하다. 역시 산수다. 시간당 삼천원. 뭐가 되었던 편의점의 3배의 고부가 가치 산업이다.      


그리고 플롯의 중간은 화자가 아버지의 삶을 보았던 경험과 간단한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하며 푸시맨의 일을 수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준다. 이 아버지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주는 모티프는 결합모티프다. 그 경험이 화자의 선택에 인과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계속 나오는 화성과 금성, 지구가 돈다는 이야기는 자유모티프에 해당한다. 이 모티프들은 스토리에 직접적으로 관계되지는 않으나 오히려 작가의 개성을 잘 보여준다. 금성의 기온은 평균 약 섭씨500도, 화성의 기온은 평균 약 영하 63도라고 한다. 도무지 인간이 살 수 없는 온도다. 그러나 살아가다보면 너무도 무더워 정말 녹아버릴 것 같은 여름을, 뼈에 구멍이 날 것처럼 춥고, 마음까지 황량한 겨울을 우리는 지구에서도 만난다. 그럴 때 우리는 문득 지구를 벗어나고 싶다고 느낀다. 작가는 인간의 살기 위한 몸부림과 인간 그 자체를 하찮게 본 것 같다. 우주의 시선으로 보면 인간은 먼지 조각보다도 작은 존재이고, 찰나의 시간동안 존재했다가 사라진다. 인간의 숫자로는 셀 수도 없는 수많은 행성과 태양계 중에서 하나인 지구에 우연히 존재한다. 그 짧고, 아무것도 아닌 삶을 위해 우리는 그렇게도 힘들게 몸부림치며 투쟁하는 것이다. 광활한 우주를 생각하고 있노라면 그렇게까지 아등바등할 것은 아니지 않는가라는 회의감이 들곤 한다.      


이후엔 푸시맨으로서의 일상을 보여준다. 푸시맨의 일은 당연히 쉽지 않다. 시간당 삼천원이 일인데 쉬울 일이 있겠나. 안내 방송은 고장 난 라디오처럼 “승객 여러분들은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 주시길 바랍니다.”를 반복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뤄질 수 없다. 승객 모두의 산수가 그렇다. 신체의 안전선은 안전선 밖에 있지만, 삶의 안전선은 전철 속이다. 안전하지도 않고, 상쾌한 것과는 더욱 거리가 먼 지하철에 승객들은 자신을 던져야 하고, 이미 꽉꽉 들어찬 지하철에 푸시맨들은 승객을 넣어야 한다. 지하철 하나의 칸에는 180명 정도가 타는 것으로 설계가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한 칸에 400명이 탄다. x는 180이 넘을 수 없는 문제에 x를 400을 넣어야 한다. 당연히 말이 안 되는 문제다.



그런 오답이 나오는 일을 일주일 동안 하고 나니 화자는 당연히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그리고 귀 코 귀까지 아프다. 머리 어깨 무릎이 아프다는 화자의 어조는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노랫소리가 들린다. 화자의 웃음을 유발하는 해학적 어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만두면 억울하기 때문에 일을 계속한다. 아침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영혼이라고는 없는 곳에 적정 인원의 배가 넘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화물을 매일 넣는 일은 정서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힘든 일이다. 왜 이렇게 까지 살아야 하는가 싶지만, 이는 그저 개인의 숫자에 불과한 것이라고 억지로 자위한다.      


화자는 지하철에서 일을 하며 변태를 보게 된다. 변태의 존재보다 그렇게 사람이 붐비는 좁고 더운 불쾌한 공간에서 사정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에 더 경악한다. 작가가 이 변태의 등장이라는 자유모티프를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마 “상습범“이라는 내용이 아닐까 싶다. 결국 모든 인간은 상습범이다. 매일을 새롭게 느끼지 않고, 그저 매일 습관이 되어 권태롭게 살아간다. 그런 상습적으로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누군가는 고통을 받고, 누군가는 남에게 고통을 준다. 화자도 지하철에서 그냥 상습적으로 사람을 밀 뿐이다.      


그렇게 일상을 억지로 살아내고 있을 때 아버지를 만난다. 만났다는 표현 보다는 아버지가 지하철에서 배설되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수도 있겠다. 서로의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마주는 것은 마치 옷을 벗은 몸을 보이는 것처럼 수치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 화자는 그 감정을 “옷을 전부 벗어던지고 근처의 화단으로 가 꽃이라도 뜯어먹고 싶은 심정”이라고 묘사한다.      


아버지를 지하철에 꾸겨 넣는 일마저 익숙해지며 여름은 지나갔다. 화성인들마저 부러울 정도로 무더워 일을 하면 온몸이 땀으로 젖는 어려운 여름을 버텼다. 이제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가을이 왔으니 조금은 지낼 해야 할 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더 좋은 계절이 오자 어머니가 쓰러지신다. 산수에서 더하기가 빼기로 바뀌어 버렸다. 안 그래도 정말 간신히 유지하던 계산기가 더 이상 답을 도출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 이다. 아버지는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된 타조처럼”망연자실한다. 심지어 회사마저 힘들어진다. 아버지의 눈에 그나마 있던 생명의 빛이 조금씩 힘을 다해간다.      

그렇게 플롯의 결말에서 아버지는 사라진다. “그런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해서 위로가 될 리 없었다.”는 이야기는 소설의 이야기가 아버지의 실종이 우리에게 언제나 가까운 이야기임을 상기시킨다. 그렇게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 화자는 두 달 임금을 받아내고,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고, 끊임없이 일을 한다. 어머니가 의식을 찾지만 화자는 “퇴원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즉, 더 이상 돈이 들지 않는 이유로 눈물을 흘린다. 화자의 영혼이 이미 많이 다쳤음을 보여준다.      


마지막까지 현실적인 감각을 잘 유지하며 잘 달려가던 이 소설은 갑자기 마지막에 현실의 노선을 이탈한다. 갑자기 기린이 나타난다. 기린이 단정한 차림새의 양복을 입고, 지하철을 아무렇지도 않게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기린은 아버지다.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다. 그렇기에 소설은 진짜 같아 보여야 하는 노력을 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마지막에 그 기린이 등장하며 핍진성을 포기한다. 기린은 위태롭게 자신의 삶을 줄타기 하던 아버지를 잘 나타내 준다. 기린은 목이 길고 말랐다. 현실이 “현실적”으로 설명이 되어야 허구도 현실적으로 보이려는 노력을 할 것이다. 소설은 미메시스로서 대상을 재현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데아의 모방인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소설이다. 2차 모방에 해당한다. 현실은 이데아가 아닌만큼 너무도 힘들고, 한 개인에게 최소한의 삶의 여유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현실을 모방한 소설의 세계는 당연히 이데아적으로 설명할 수가 더더욱 없다. 현실이 ”비현실적“인 상황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아버지의 삶은 설명이 되지 않는 비현실적인 상황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을 갑작스레 현실 같아 보이려는 노력을 포기한다.      


이 소설에서는 세상을 하나의 열차로 표현한다. 지하철처럼 세상은 답답하다. 정답이 없는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과 같다. 루카치는 소설을 “신에게서 버림받은 세계의 서사시”로 정의 한다. 이 소설, 혹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세상은 총체성이 붕괴해버렸다. 그렇기에 이 세계를 살아가는 한 개인은 근본적으로 불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전제가 잘못된 문제를 풀어야 하는 상황이다. 아무리 문제를 풀어도 오답을 구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문제적 개인이다. 가족을 버리고 사라져 버리는 선택은 올바른 세계에서 본다면 당연히 옳지 못한 선택이다. 그러나 그런 선택은 아버지가 처한 힘들고 오직 산수의 차가움이 느껴지는 세계에서는 어쩔 수 없다. 아버지의 실종은 아버지 나름대로의 가치를 추구하는 서사다. 골드만은 소설을 “문제적 인물이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방식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서사양식”이라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선택한 방식은 사라짐이다. 사라짐도 분명한 선택이다. 물론 타락한 방식이지만, 타락해버린 사회에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는 없다. 오히려 타락한 사회에서의 타락한 선택이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플롯은 루카치의 분류에 의해 “환멸의 낭만주의”로 볼 수 있다. 아버지에게는 무언가 열심히 노력해 보아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어도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참고 견딘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제도 오늘은 어제와 같았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빠질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세계와의 대결을 회피하고 사라진 것이다. 그 사라짐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자기방어이었던 것이다.      

화자가 플롯의 마지막에서 기린을 만나는 것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는 화자의 성장, 어른이 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기린을 만나기 전까지는 사라진 아버지를 마음속으로 보내지 못했다. 너무 힘들기도 했고, 정신이 없었다.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사라진 아버지를 보낼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버지가 언젠가는 돌아오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깨어나시고, 일을 다시 시작하며 본인의 병원비를 벌 정도의 수준이 된다. 시원한 화성이나 춥지 않은 금성에서도 부러워 할 정도의 봄이 온 것이다. 봄이 오자 아주 약간의 숨 쉴 여유가 생긴다. 그러자 아버지를 마음속으로 보내줄 수 있게 된 것이다. 화자는 아마도 힘들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쓰러져있고, 아버지는 실종되었으며 할머니는 요양원에 가있는데 본인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누구에게 하겠는가. 그 쌓여 있던 울분을 기린을 만나 토해낸다.     

이제 어머니도 깨어나셨고, 화자도 일을 열심히 하며 부동산 일도 배울 수 있었다. 신용등급도 좋아졌다. 정말 아버지만 돌아온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많은 산수의 변화가 있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모두 함께 모여 묵묵하게 자신들의 산수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린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정체를 확인시켜주지 않는다. 잿빛의 눈동자로 화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앞발을 손위에 포개 놓으며 이야기 한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그렇게 소설은 끝난다. 

     

이 말을 통해 독자는 느낄 수 있다. 아마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아마도 아버지는 자신이 가족을 떠나버린 죄책감 때문에라도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참 슬픈 결말이다. 부유한 사람들의 수학을 하지 못하는 것에 불평하지도 않고, 묵묵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산수를 하려고 했던 화자다. “살아, 있다. 무사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유사한 산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삶의 축복인가. 사라지기 전에, 사라지기 전에 말이다.”에서 마지막 “사라지기 전에 말이다.“를 전하는 화자의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억지로 자위를 해보려 하지만,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화자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아프게 한다. 고작 산수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마음은 얼마나 사무치겠는가.  

    

2020년 5월 성균관대학교에 다니는 한 학생이 기숙사에서 자살을 했다. 기사화 되지도 않았지만, 취업준비에 느꼈던 스트레스와 경제적 압박감이 이유였다. 2020년 한국에 사는 우리도 역시 자신의 산수를 하다가, 그 산수가 도저히 풀리지 않아 사라짐을 선택하고 있다. 이 소설은 시대를 초월하여 언제나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을 읽어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세상이 온다면, 이 소설이 읽히지 않아서 슬프기 보다는 그런 세상이 왔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게 느껴질 것이다.      


만약 지금까지 그렇게 사라진 수도 없이 많은 누군가들을 기린으로서 지하철의 한 개찰구에서 만난다면 그들에게 따듯하게 한마디 해주고 싶다. 그 긴 목을 지탱하느라 항상 고생이 많았다고, 이제는 조금 편하게 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소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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