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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건 Jun 14. 2020

사람은 언제 죽는가?

사람들에게 잊힐 때다.

전통


우리 집에는 전통이 있다. 추석과 설날에는 항상 아버지의 고향에 계시는 할머니를 방문한다. 올해 98세가 되시는 할머니를 뵙기 위해서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할아버지 산소 방문이다. 할머니의 집이자 아버지가 자랐던 집에서 약 5분쯤 걸으면 조그만 동산이 하나 있고, 그 동산을 3분 정도 올라가면 할아버지 산소가 있다.


우리 집은 아버지의 고향과 멀리 떨어져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를 자주 찾아뵙지 못한다. 그래서 명절 때는 빠지지 않고 항상 본가로 내려간다. 명절 때마다 가면 두둑한 용돈과 제한 없는 pc방 방문이 가능했으므로 나는 항상 명절에 본가를 내려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중 산소에 올라가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3분이면 충분히 올라가지만,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 나의 짧은 다리로 그 동산을 오르는 일은 제법 힘든 일이었다. 산에선 항상 절을 계속하며 술을 따르고 돌리는 등 내가 알 수 없는 행위를 했다. 장난기 많은 아이가 느끼기에는 사촌 형들과 어머니, 아버지 모두 갑자기 지나치게 정숙하고 묘하게 무섭기까지 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항상 엄하고 감정을 잘 보여주지 않았던 아버지가 산소에 갈 때면 당연히 감정적, 서정적이 되셨다. 어렸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변화를 느꼈고, 매번 그것이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이제야 겨우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간신히 감을 잡고 있다. 아버지가 중학생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아버지, 벌써 40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아버지는 그곳에 갈 때마다 항상 할아버지께 기대고, 마음속으로 대화를 하며 힘든 감정들을 보내곤 하지 않았을까?


모든 사람은 죽는다. 단 한 사람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우주에서 가장 공평한 원리다. 그렇다면 사람은 죽고 나면 현재의 세상에는 전혀 영향력을 끼치지 않을까? 아니다. 인간은 죽음 이후에도, 그 사람을 기억해 주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교류한다. 그렇기에 인류는 만년이 넘는 시간 동안 죽은 사람을 나름의 형식으로 기록하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교류해 왔다. 사람들은 힘든 일이 있을 때, 좋은 일이 있을 때 산소를 찾아가 말로써 교류하진 않아도, 묵묵히 그 자리에 앉아 있으므로 떠난 사람과 교류했다. 그리고 그 교류는 남은 이에게 큰 심리적 치유로서, 성장으로서 역할을 한다.


지평선을 넘어간 해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노을빛은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죽은 사람도 당장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그들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동안에는 노을빛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우리 곁에 살아있다.


온라인 추모


수만 년의 역사 동안 달라지지 않았던 죽음의 추모 방식이 21세기에 들어 점차 바뀌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로 인구가 지구에 폭등하면서 땅에 사람을 묻어 그들을 추모하는 것은 지속 가능성을 잃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떠난 사람을 추모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그중에서 미래에 가장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방식이 바로 온라인 추모다. 


저자 일레인 카스켓은 <디지털 시대의 사후 세계>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앞으로 온라인 방식의 추모를 어떤 방식으로 활용해야 하며 준비해야 하는지 이야기한다. 

어떤 이를 떠나보낸 사람들에게는 떠난 이를 보내주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죽은 이와 산 사람 사이에서 수많은 형태로 발견되는 지속적인 결속은, 지난 수천 년간 그래 온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고인을 적극적으로 돌보면서 상호작용하든, 단순히 그들을 기억하고 존중하는 선에서 그치든 간에, 그런 행동이 결속을 지속시킨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디지털 시대의 사후 세계> P 97

당연히 남은 이들은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 일상을 보내야겠지만, 그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떠난 이를 보내주는 자신만의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온라인에서는 사진과 영상, 그들이 살아 있을 때 남겨 놓았던 온라인 상의 발자취를 통해서 떠난 사람의 흔적을 보다 더 생생하게 느끼고, 교류할 수 있다. 또한, 나의 경우 미래에 많은 시간을 외국에서 보낼 가능성이 높다. 그럴 때 너무 절실하게 추억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그 사람을 추억하고 싶지만, 실제 묘지를 방문하는 것은 시간적, 경제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이럴 때 온라인 추모의 방식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집에서 편히 앉아 스마트폰으로 유대를 이어나갈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고 있는데도, 계속 실제 묘지를 방문하길 고집하는 사람이 있긴 할까? <디지털 시대의 사후 세계> P 123


추모 계정


2020년의 페이스북 사용자는 20억 명을 넘어간다. 그 어떤 나라의 국민보다도 높은 숫자다. 그리고 21세기가 저물 때까지 약 36억 8천에 달하는 프로필이 추모 상태로 전환될 전망이라고 한다. (P122) 분명히 실제 묘지를 방문함으로써 얻는 의식적 의미는 크다. 그러나 묘지 형성의 어려움, 묘지 방문의 어려움 등의 이유로 묘지에 방문하여 추모하는 방식은 온라인을 통한 추모로 바뀔 것이다.


인간의 죽음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순서가 없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나 역시 수십 년을 앞으로 더 살 수도 있지만, 이 글을 쓰고 갑자기 내일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내 주위의 사람들은 나를 기억하기 위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글들과 페이스북의 사진들을 보며 나를 추억할 것이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미 20세기 후반에 저서 <세계상의 시대>를 통해 우리는 세계"상"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했다.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세계의 "상", 즉 세계를 재현해 놓은 것들이 실제를 이룬다는 의미다. 21세기는 "나"라는 실재보다는 SNS나 온라인 상의 자아에서 보이는 "나를 재현한 이미지"가 더 중심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고 싶다. 멋지고 행복한 모습만 재현한 나의 온라인 자아가 아닌, 우울하고 힘든 모습을 모두 담담하게 드러내 보이고 싶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은 내 삶의 태양이 지평선 밑으로 내려갔을 때 더 아름다운 노을빛을 빚어내리라 믿는다. 


메멘토 모리


온라인 시대의 죽음에 대해 400여 페이지 동안 고민하게 만든 일레인 카스켓은 마지막에 아래와 같은 조언을 주며 책을 마무리한다.

가능한 한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라. 많이 사랑하라. 살아가는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라. 세상의 선을 위해 힘쓰라. 이런 삶에 헌신하다 보면, 그 삶의 유산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될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사후 세계> P 423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격언이다. 인간의 삶의 허무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한정된 삶임을 기억하고, 그 순간을 느끼라는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만약 무한한 삶을 살아간다면 굳이 선택에 큰 공을 들일 필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유한한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한번 한 번의 선택이 의미 깊다. 그 선택들이 모여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가치 있게 만든다. 


내가 쓴 오늘의 이 글도, 내 삶에 충실한 모습의 일부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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