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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건 May 16. 2020

말하는 원숭이를 사람으로 만드신 은혜

어제는 스승의 날이었다. 지난주 중학교 때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중학교 2, 3학년 담임을 맡으셨던 분인데, 내겐 은사님 같은 분이다. 꾸준히 연락을 지속하고 있고, 이번에는 선생님께서 먼저 연락을 주셔서 만남을 가졌다.

훈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듯,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특히,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유난히 학생들이 반항적이었던 것 같다. 나 역시 선생님들이 썩 좋아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지금 돌아보면 제법 싹수없는 언행도 많이 했던 것 같다. 수업을 하면 90%는 수업을 듣지 않았고, 선생님이 나누어주신 유인물은 종이비행기로 날아다녔으며, 수업 시간에 컵라면을 먹는 아이들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간 대 인간으로서 그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18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는 전형적인 10대의 나르시시즘을 이렇게 표현한다. 

"열어섯 살이 되면 청소년은 고통이 무엇인지 안다. 그 자신도 고통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역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한다." -<운명의 과학> p63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있었던 일 같다. 대체 왜 그렇게 10대는 유난스러운 것일까? 십 대는 왜 안하무인으로 묘사되는 것일까?


10대가 특별한 이유는 뇌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우리는 청소년의 Prefrontal cortex(앞이마 껍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영역은 의사결정, 미래계획, 사회인지 등 우리가 생각하는 고등 사고를 담당하는 부분이다. 


10대의 앞이마 겉질은 그런 시냅스 가지치기가 대량으로 일어나는 장소다. (중략) 그 결과로 청소년은 즉각적인 만족과 보상에 대단히 예민해지지만 충동 조절 능력과 의사 결정 능력은 아직 완전히 발달하지 않은 상태가 된다. -<운명의 과학> p64


10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만큼 뇌가 성장했지만,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범위에서 적절하게 그 욕망을 표현하고 억제할 만큼은 뇌가 성장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충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학생들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뇌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성인과 다른 잣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10대들은 다른 시기와 분명하게 구분되는 별도의 형성기를 지니고 있다. (중략) 이것은 결국 더욱 독립적인 정체성을 수립하고 가족이라는 맥락에서 벗어나서 기능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필요성으로 귀결된다.  -<운명의 과학> p66


또한 이 10대의 단계는 뇌과학적인 발달단계에서 필수적인 단계다. 누구나 반드시 적절한 성장을 위해서 겪어야 할 시기다. 

10대가 충동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경험의 레퍼토리를 더 크게 구축하기 위함이다. 이런 경험들은 자기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앞이마 겉질을 다듬는 데 도움을 주고, 이를 통해 미래의 의사 결정 과정과 사고 과정이 정해진다. -<운명의 과학> p68


당연히 지나치게 위험한 행동이나 남을 괴롭히는 행위는 교사로서, 학교에서 제지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10대의 자유분방함을 보장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마냥 어린애들로 보지 말고, 그렇다고 완전하게 성숙한 성인으로 보지도 말고, 조금은 불안정한 10대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준다면 참 좋을 것 같다. 


저번 주에 만나 뵈었던 중학교 선생님은 중학교 3학년이었던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셨던 것 같다. 한창 과학고등학교 입시로 스트레스를 받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입시에는 2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대입으로 비교하자면 수시와 정시였다. 


그 날은 수시에 해당하는 전형의 결과가 발표되는 날이었다. 대체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겠지만, 내 결과를 우리 반 모든 친구들과 함께 확인했다. 떨어졌다. 중학교 때의 아이들을 "말하는 원숭이"라고 표현하던 이야기를 기억한다. 그 당시 아이들에게 위로, 공감 배려는 사치다. 나는 모든 반 친구들의 놀림거리가 되었다. 샤프를 떨어트리더니 "샤프가 떨어졌네"등의 장난을 쳤다. 나도 친구들에게 짖궅던 아이었기 때문에 분노할 명분은 없었다. 그 정도 놀림은 넘어갔어야 했다. 거의 하루 종일 그 장난을 들었어야 했다. 그렇게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를 때쯤, 정색을 하고 더 이상 하지 말라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용케 대부분의 아이들은 나의 심각한 표정을 읽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아무 일도 없으면 섭섭하다. 종례를 기다리고 있던 시간, 그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다른 친구가 뜬금없이 내게 다가와 "우리 집 닭이 알을 낳았는데, 한번 떨어지고, 한번 더 떨어졌더라"를 시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별 의미도 없고 유치한 놀림이지만, 그때는 그것에 폭발했다. 그래서 그 친구와 싸움이 났다. 싸움이 난 후 친구들이 말렸고, 선생님께서 올라오셔서 싸움은 자연스럽게 끝이 났다.


그때는 싸움이 나면 교무실에 끌려가 선생님에게 혼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거기에 나는 반장이었으니 2배로 혼날 예정이었다.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상태로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으니 선생님께서 나를 일종의 상담실에 데리고 갔다.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오신 선생님께서는 의외로 나를 전혀 혼내시지 않았고, 나를 굉장히 성숙한 개인으로 대해 주셨다. 


그 친구가 악의가 없었던 것 너도 알고 있지? 
네... 
화가 난 게 그 친구한테 화가 난 게 아니고 너한테 화가 난 것 같네? 
네...
본인을 너무 몰아치지 마. 

그 와중에도 자존심 때문에 울지도 않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를 보더니 안타까우셨다보다. 


오늘 학교 끝나고 선생님이 맛있는 것 사줄게. 잠시 너에게 시간을 줄테니까 힘들면 힘들어하고, 울고 싶으면 울고. 


그렇게 문을 닫아주고 가셨고, 나는 거기서 엉엉 울었다. 그렇게 마음을 달래고 선생님과 식사를 하러 갔다. 그때 먹었던 음식은 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에 꼽힌다. 


당시 나는 충동을 다스릴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때 그 충동을 다스리지 못한 것에 대해 혼나지 않고, 그 상황을 공감받고 따듯한 위로를 받았기에 나는 한 단계 성숙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기억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때 한 순간의 위로가 나를 참 바른 방향으로 이끌었던 것 같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참고 도서 : <운명의 과학> 한나 크리츨로우 지음, 김성훈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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