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훈련소 불침번이 도와준 목표
이 이야기는 핀란드에 오기 전부터 시작한다.
왜 교환학생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는지부터 어떻게 준비했는지까지.
핀란드에 가서는 뭘 했으며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시작한다.
1. 불침번
#2016년 3월 14일. (정확히 날짜까지 기억이 난다.)
훈련소에 입대한다.
앞으로 2년의 시간을 강원도에 묶여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참 갑갑하다. 당일 내내 정신이 없다. 여기저기 검사를 받으러 끌려다니고 물품을 받았다. 정신없이 하루를 끝내고 나니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20명이 작은 방 안에 앉아있다. 앞을 봤더니 빡빡이가 앉아 있다. 왼쪽을 보아도 빡빡이, 오른쪽을 보아도 빡빡이. 심지어 내 머리를 만져 보아도 빡빡이다. 이제 군대에 온 것이 실감이 난다. 점호를 받고 누워서 잠을 자란다.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든다. 내 인생을 쭉 훑어본다. 얼추 잘 산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6년 3월 15일.
잠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잠에 들었다. 일어나 보니 군대이다. 또 이런저런 훈련이 있다. 오늘은 우리 쪽이 불침번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 소대는 24명이었다. 3명이 전우조를 이뤄 총 8조이다. 수면시간은 총 8시간이다. 10~6시. 8시간의 수면시간 동안 2시간씩 나눠 4조의 전우조, 즉 12명이 불침번을 선다. 이틀에 한 번씩은 불침번을 섰다.
불침번을 서는 동안 딱히 하는 것은 없다. 그냥 서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해서는 안된다. 앉아서도 안되고 전우조와 이야기를 해도 안된다. 멍하니 2시간을 서있으려니 시간이 정말 가지 않는다. 이때 보통들 자기 인생을 정말 상세하게 훑어본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훑기 시작한다.
바둑대회에 나가 우승했던 것. 과학영재원을 다녔던 것. 과학이 좋아 과학고에 가겠다고 생각한 것. 과학고에 가서 열심히 공부했던 것.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것. 서울대에 들어와 연극을 열심히 했던 것. 많은 멘토링을 했던 것. 내가 교육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깨닫 던 것. 이렇게나 많이 훑었는데 30분이 남았다.
30분 동안은 특별한 생각을 하진 않는다. 시간이 왜 이렇게 느린 것일까. 계속 시계를 보고 있는다. 시침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건 확실히 시계가 망가진 것이 분명하다.
그 순간 시침이 움직인다. 시침이 움직이긴 움직였다. 그냥 지루할 뿐이다. 그렇게 시계와 눈싸움을 하다 보니 30분이 흘렀다.
#2016년 3월 17일
오늘은 전략을 준비했다. 본격적으로 훈련소 이후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남는 시간에 책도 읽고 영어공부도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해서 멋진 몸을 만들겠다. 좀 더 구체적인 수치화까지 하는 것이다. 아주 많은 계획을 세웠다. 철학적인 고찰도 많이 했다. 뿌듯하다. 2시간 동안 성찰을 했다.
#2016년 3월 18일
일어나 보니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충 열심히 살겠다는 다짐 말고는 철학적 고찰도, 계획도 기억이 나진 않는다.
#2016년 3월 19일
오늘은 몰래 펜과 조그마한 노트를 주머니에 넣어놓았다.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들을 보이지 괴발 쇠발 노트에 적는다. 내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다시금 생각을 하다 보니 교육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든다. 나는 공부를 좋아했다. 그래도 우리나라 교육엔 뭔가 문제가 많아 보였다. 친구들은 참 많이 힘들어했다. 대학입시 때는 나도 정말 힘들었다. 공부가 재미있긴 한데 가끔 너무 힘들 때가 많았다. 졸려 죽겠는데 왜 잠을 참고 일찍 일어나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할까. 왜 남들보다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할까. 이런저런 의문이 많았다. 그런 의문을 어른들에게 물었다. 어른들은
"대학 가서 고민해도 늦지 않아"
그렇게 말했다. 사실 공부가 재미있기도 하고 늦지 않다고 하니 믿어보기로 했다.
아주 운이 좋게 남들이 그렇게도 좋다고 하는 서울대에 들어갔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제는 공부에 질려버렸던 것 같다. 공부 말고도 세상에 재미있는 게 많아 보였다. 그렇게 나는 연극을 했다. 공부보다는 더 재미있었다.
1년쯤 연극을 신나게 했다. 나중에 뭘 먹고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을 한다. 연극은 너무 재미있긴 한데 이걸로 먹고살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나름의 아주 심각한 고민 끝에 (한 줄로 정리하기엔 제법 긴 성찰이 있었다.) 교육이라는 것에 기여하겠다는 결심을 했었다. 그래서 군대에 지원했다. 운이 좋게도 한 번에 합격을 해서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 정말 좋은 게 맞은 건지 잘 모르겠다.
#2016년 3월 21일
엊그제 작성해 놓았던 노트를 다시 펼쳐보았다. 아무것도 못 알아보겠다. 글씨가 전부 겹치고 난리 부르스가 났다. 안 그래도 좋은 글씨는 아닌데 암흑에서 받치지도 못하고 글씨를 쓰니 알아보기 너무 힘들다.
그래도 다시 생각을 한다. 교육을 고치고 싶다.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히 교육은 행복해지려고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적어도 내가 학교 다니면서 본 친구들 중에 90% 이상은 학교 때문에 행복해 보이진 않았다. 학교가 끝나거나 방학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행복해 보였다.
대단히 똑똑한 사람은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그것 하나는 알았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싫어한다면 그건 뭔가 이상한 것이다. 나도 그런 학교를 한번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나는 공대생이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열심히 또 적는다.
#2016년 3월 22일
그렇게 아침에 일어나 어제 적었던 노트를 다시 펼쳐본다. 역시나 정말 못쓴 글씨이고, 심지어 줄이 겹쳐 있다. 그러나 대충 알아볼 수 있다.
핀란드 교환학생
이 글자는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언젠가 봤던 핀란드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기억한 것이다. 그곳의 아이들은 참 행복해 보였다.
그렇게 나는 핀란드에 교환학생을 가기로 마음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