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만으로 충분했던 경험(feat, 또 파하르간지에 왔다)
네팔에서 인도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로 결정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돈이었다. 미리 예약하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배낭여행자에게 25만 원이나 하는 비행기 편도 티켓은 비싸도 너무 비쌌다. 나는 의지의 한국인이 아닌가. 여기저기 알아본 끝에 결국 방법을 찾아냈다. 네팔 카트만두에서 인도 뉴 델리까지 환승하지 않고 바로 갈 수 있는 직행 버스가 불과 몇 개월 전에 생겼다고 한다. 네팔 카트만두에서 인도 뉴 델리까지는 버스로 약 30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나 운행 중 노후된 버스의 잦은 고장이 생길 수 있고 비포장 도로 상태 등을 고려하면 40시간이 더 넘게 걸릴 수도 있다.
한 여행사를 통해 알아보니 버스 티켓 가격은 5천 루피(5만 원)였다. 맞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른 여행사에도 물어봤다. 4천3백 루피(4만 3천 원)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현지인이 직접 티켓을 구매할 경우 3천7백 루피(3만 7천 원)에 구매가 가능한 것 같았다. 우리나라 역시 공항 택시를 타거나 시장에 가면 외국인들을 상대로 터무니없는 가격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방영되던 뉴스가 떠올랐다. 그게 이런 거였나 보다.
분단으로 인해 섬나라에 사는 한국인이 드디어 생애 처음 육로로 국경을 이동하는 날이다. 아침 8시까지 버스를 예매한 곳(버스 출발하는 곳)으로 갔다. 내가 탑승하게 될 노란 버스, 근데 어째 느낌이 이상했다. 버스 내부를 보니 전에 다람살라(맥그로드 간즈)를 가기 위해 탑승했던 인도 로컬버스 보다 더 심각할 정도로 노후된 버스였다. 외국인은 없었고 전부 네팔, 인도인들 뿐이었다.
'설마 이 버스로 32시간 동안 계속 달리겠어.'
찝찝한 기분을 뒤로하며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출발과 동시에 구불구불한 비포장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도로 상태는 얼마 전 경험한 카트만두를 출발해 포카라 지역으로 이동하는 길 같았다. 아니 그때보다 도로 상태가 더 안 좋았다.
아무리 달려도 끝없이 펼쳐지는 비포장 도로를 지나 밤 9시쯤 네팔인도 국경에 도착했다. 갑자기 험상스럽게 생긴 군인 두 명이 버스에 올라타더니 여권을 걷기 시작했다. 차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여권을 내밀었다.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상황이다. 잘못한 것은 없었지만 괜히 긴장이 됐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보며 눈치껏 따랐다. 잠시 후 모두 버스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딱딱한 표정의 출입국관리소 직원들 앞으로 자신들의 짐 가방을 들고 줄을 섰다. 나 또한 어리바리하게 줄을 따라섰다. 우리가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려면 수하물 검색대를 통과하는 것처럼 국경을 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전자 장비는 보이지 않았다. 가방 하나하나를 직접 손으로 열고 확인하기 위해 승객들의 모든 짐가방을 풀어헤치는 직원들. 왠지 모르게 엄격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유일한 외국인이었던 나는 가방 안쪽만 살짝 보더니 바로 통과시켰다. 응? 뭐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별다른 일 없이 짐 검사를 통과할 수 있어서 좋았다. 세계여행을 하며 경험한 바에 의하면 다른 국가로 입국 시 해당 국가 직원이 내가 가지고 있는 평범한 물건이나 과자 등을 가지고 꼬투리를 잡자면 끝도 없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불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무 말 없이 통과시켜 준다는 것에 감사했다. 여권, 비자 그리고 짐 검사를 하며 거의 2시간 정도 국경에서 시간을 보냈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드디어 육로를 통해 새로운 국가로 이동하는 순간이다.
'우와! 신기하다.'
국경을 지나자마자 또 다른 문화충격이 다가왔다.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네팔과 달리 국경을 넘자마자 확연하게 달라진 인도의 도로 상태. 그러면서 갑자기 우리나라가 떠올랐다. 우리도 통일이 되면 육로로 국경을 이동할 수 있을 텐데. 언젠가 통일이 되어 38선이 허물어지고 육로로 대한민국에서 북한을 넘는 날이 온다면 이보다 더 심한 빈부격차를 느끼겠지? 너무 늦지 않게 통일이 되어 버스를 타고 또는 걸어서 북한 땅을 밟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션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좌석 덕분에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눈을 붙일 수 없었다. 허리와 무릎이 아팠다. 창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헤드라이트에 의해 보이는 바깥은 안개가 자욱했고 내가 탄 버스는 산 비탈길을 달리는 것 같았다. 버스가 덜컹거리는 느낌으로 추측할 뿐이었다.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오싹한 느낌까지 들었다. 어릴 때 TV에서 방영해주던 전설의 고향이라는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그러나 불편함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의 피로감으로 인해 점점 정신이 흐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비포장 산 비탈길을 운전하는 기사 두 분이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도착해서 내릴 때 나는 두 분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고 이들은 나를 향해 씩 웃어줬다.)
어제 점심에는 네팔 전통음식인 달밧을 먹었다. 그리고 이후부터 자정을 넘긴 지금까지 식사 시간은커녕 간식 조차 먹을 시간이 없었다. 피곤함은 물론 배가 너무 고팠다. 나는 피곤하거나 배가 고프면 예민해지는 성향이다. 예민함이 극에 다다르기 직전인 새벽 2시쯤 허름해 보이는 휴게소에 도착했다. 아. 드디어 뭐라도 먹을 수 있는 건가. 그러나 나의 간절했던 기대를 모두 짓밟기라도 하듯 주인은 내가 주문하는 메뉴마다 다 안된다며 고개를 양옆으로 저어댔다. 말이 안 통하니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피곤함과 허기가 몰려왔고 이제는 짜증까지 났다.
본능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반쯤 맛이 간 상태로 옆에 보이는 더 허름한 식당으로 갔다. 거기서도 내가 주문할 수 있는 메뉴는 많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계란 프라이 두 개와 짜이(인도의 국민 음료) 한잔으로 저녁 겸 매우 이른 아침을 먹었다. 아. 왜 이렇게 짜. 퉤. 입에 넣은 계란 프라이는 세상에서 제일 짰다. 나도 모르게 오만상이 찌푸려졌지만 뭐라도 먹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었다. 짜이를 마시며 억지로라도 짜디 짠 계란 프라이를 먹었다. 허기를 달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잠깐의 휴식 후 버스에 탑승하였고 나는 다시 잠들기 위해 노력했다. 엉덩이 감각은 전부 사라진 지 오래됐고 좁은 의자 간격은 무릎을 다 펼 수 조차 없었다. 그로 인해 당연히 무릎에 통증이 느껴졌고 오래 앉아있다 보니 뒤쪽 허벅지까지 아팠다.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것 같은 느낌이랄까. 두 다리는 더 이상 내 몸의 일부가 아니었다.
자는 둥 마는 둥 끊임없이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떠올랐다. 아침이 되었으니 잠시나마 휴게소에 정차할 줄 알았는데 그냥 지나친다. 괴롭다. 나는 왜 이 버스를 타고 이 고생을 하는 걸까. 도대체 누가 나한테 이 고생을 하라고 한 걸까. 바보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내가 선택했기에 누군가를 탓할 수도 없는 상황. 출발한 지 꼬박 하루, 24시간이 훌쩍 지난 오후 1시쯤 드디어 휴게소에 도착했다. 어제저녁도 못 먹고 오늘 아침도 못 먹은 상태였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휴게소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고기가 들어간 요리를 기대했지만 알고 보니 채식 메뉴만 판매하는 식당이었다. 인도의 71%가 넘는 채식주의자들을 위해 채식만을 판매하는 식당이 많다. 이번에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건더기가 거의 없어 수프에 가까웠던 카레와 밥을 시켰다. 허기를 달래기에 부족한 양이라는 것을 직감했고 추가로 에그 롤도 시켰다. 점심을 먹고 나니 그나마 컨디션이 조금은 돌아온 것 같았다. 그러나 만약 외국인은 한 명도 없이 나 홀로 쿠션 없는 좌석에 앉아, 끊임없이 산길과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버스 타고, 제 때 식사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을 또 겪어야 한다면 이런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탔던 버스에 외국인이 단 한 명도 타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육로로 국경을 넘기 위해 인터넷에서 관련된 정보를 찾아보는 것조차 쉽지 않았었다. 아무리 백번 천 번을 들어도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나란 존재. 그래도 두 번 다시 경험하면 안 되는 버스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보 같지만 그래도 하나 배웠으면 됐다. 또한 그때의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 나는 그 에피소드를 누군가에게 들려줄 수 있는 거잖아. 그래, 이렇게라도 스스로를 위로하자. 돌아보면 다람살라(맥그로드 간즈)를 여행하며 12시간 동안 탔던 인도 로컬버스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도움 아닌 도움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만약 그런 경험 조차 없었다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겠지.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어찌 됐든 결론은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