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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의 화신 Nov 14. 2024

고요하고 투명한 가을 탓을 하고 일탈한 하루

지리산 노고단 산마루의 늦가을 풍경



나는 고정된 장소에 홀로 잘 머무는 편직장과 집만을 오간다.
봄, 가을 서너 번쯤 정해진 동선에서 이탈하는데 이번 가을은 10월 첫날에 억새밭과 11월 8일 지리산 산마루행이었다.

뇌과학자는 '나이가 들수록 자신과 다른 성향의 타인과 만남을 주저하는 이유는 우리 뇌가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하기 때문인데 현명한 선택을 하려면 나와 결이 다른 타인과 있는 게 유리하다'라고 했고, 자기 개발서에는 '매일 같은 사람과 점심 먹는 사람이 촌사람'이라고 했으며, 인문학자의 강의주제로 '좋은 벗들과 함께 가라'고 강조하는 내용을 듣고 있자면


내가 선택한 것들의 성공여부를 따졌고, 어쩔 수 없는 읍동네 촌녀의 신분임을 재확인해야 했으며, 빈곤한 인간관계를 숨길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한다.


태생적 나태함이 가장 큰 이유가 되지만, 홀로 있는 심심함이 얼마든지 괜찮기 때문이다.


좋은 벗들이 나에게 와 준다면 좋겠지만, 내가

낯선 사람을 찾아 나서야 하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기에 단출한 지금의 일상에 불만은 없는데

가족이나 친분 있는 동료는 집밖으로 나가 보라고 권유를 넘어 강권한다.


브런치에 통과했다는 메일에 '작가가 되신 것을 축하한다'라고 쓰여 있었고
나의 글에 라이킷 한 분의 글에 댓글을 달았더니 '작가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러줘서 어리둥절하고 쑥스러운 마음이 드는 동시에 옳다구나 싶었다.

엄마: 집에만 있지 말고, 다리가 성할 때 부지런히 다녀.
나: 아마추어 작가됐어요. 폼나게 책상 앞에 앉아있으려구요.


집에서 소일거리라곤 읽는 거 말고는 달리 할 게 없으니 책만 들고 있었는데

고전평론가의 강의에서 "읽기는 반드시 쓰기와 연결되어야 해요. 먹기만 하고 배설이 안되면 큰일 나는 것처럼. 모두에게 교육의 기회가 부여되었는데 왜 읽는 자와 쓰는 자가 나누어져 있을까요. 지성의 핵심은, 대학생은 책을 쓸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의 창조물에 접속을 해서 나의 것으로 재창조하는 행위.. 이렇게 해야 존재가 충만해지고 살 맛이 나요"

마음의 변비를 해결하고 살 맛이 나려면 쓰기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해서 블로그에 읽은 책을 올리며 언젠가는 온전한 나의 창작물을 써 보리라 했던 다짐이 브런치로 오게 했다.

이렇게 집과 직장만을 오가며 게으른 글쓰기 연습을 추가로 일상에 순종해 왔는데 고요하고 투명한 가을볕이 정해진 하루를 중지하고 지리산 산마루로 일탈을 감행하게 했다.

나의 근무지는 학교 상담실이다. 학교 자체가 오래된 건물로 곳곳이 후락해져 있는데, 가장 시급하게 보수공사를 해야 할 공간에 있으면서도 스마트 학교로 선정되어 몇 년 후에 새 건물로 탈바꿈할 예정이라 임시방편으로 가볍게 손 보는 거 이외에 큰 공사는 불가능해서 장마철에는 천정에서 빗물이 떨어지고, 요 근래 출근을 하면 건물밖이나 실내의 온도차를 느낄 수 없는 냉기에 이른 아침에 나에게 오는 학생은 창문은 닫혀있는데 왜 이렇게 춥냐고 묻는다.

단순한 낡음은 무엇이든 수용하겠는데, 출근하자마자 켜야 하는 12개의 형광등이 아니면 저녁 어둠이 제법 진행된 조도에 마치 늦은 퇴근시간에 출근한 것 같은 야릇함이 간간이 덮쳐 올 때가 있다.

햇볕 한 줌 들이치지 않는 축축한 공기를 온종일 내뿜는 한낮의 무거움에 전임 선생님은 비염이 심해졌다고 했지만, 나는 우울이 침범하려 해서 틈틈이 고개를 돌려 등뒤에 작은 창밖으로 떨어지는 가을볕을 고개 들어 올려다보기도 하고, 길바닥에 내려앉은 온기를 가만히 바라보기도 하는데

다른 계절은 쉬이 지나쳐갔지만, 유독 가을엔 어려운 일이 된다. 더군다나 학교방역이 있는 다음날 출근을 하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벌레 사체들과 대면해야 하는 섬뜩함이 대기 중인데 어떤 날은 겉옷을 걸어두는 옷장 모퉁이에서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오그라 붙는 경험을 하고부터는 더 이상 옷장 문을 열지 않게 되었다.


이래저래 한 일들이 모여 늦가을 나의 하루를 바꿔 주었는데 마침 내담당으로 진행한 학교행사가 끝나고, 나에게 올 학부모가 병원으로 바로 가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 학생은 진작에 전문의 진료가 필요했고, 조심스레 교육청이 지원하는 병원진료를 권유했으나 어머니는 정신과 방문을 받아들이지 못하다 뒤늦게 결정을 내린 경우라 더 가벼운 마음으로 연가를 쓰게 됐다.

산마루 사위에서 쏟아지는 가을볕을 내 몸 가득 채워 스멀스멀 들러붙는 우울 방패막이로 활용하고, 고개 들지 않아도 가을 하늘과 맞닿아 있고 싶어 성삼재휴게소를 경유해 노고단을 향했다.




성삼재에 들어서면 구름과 내가 수평으로 놓인다.




성삼재에서 왕복 2시간 30분이면 노고단 정상으로 오르내릴 수 있는데 쉬운 코스라 중간에 초등생과 함께 온 젊은 부부를 마주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60대 전후로 나보다 연장자였다. 그들을 뒤따라 걸으며 '명랑하고 심오하게 죽음을 탐구'하자고 말했던 60대 저자의 글이 생각나면서 나의 미래를 예측해보기도 했다.


"청년기엔 '뭐가'되어야 했다. 중년기엔 그 '무엇'을 지키고 확장해야 했다. '뭐가 되고 그 무엇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증. 열정 또는 꿈이라 말하지만 사실은 조증과 울증을 넘나드는 시기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더는 '뭐가' 되고 그 '무엇'으로 나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쉽게 말해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을 시간. 삶 그 자체로 충분한 연대기! 그것이 인생 3막이다"

<현자들의 죽음 인용>


는 것 자체가 꿈이고 직업이라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을 시기라고 예찬했는데, 노고단에서 마주쳤던 그분들이 실제 그렇게 인생 3막을 지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서둘렀으나 그들은 느긋하게 나를 앞서가며 일행과 농담을 주고받고 여유작작한 걸음걸이로 직업과 노동에서 해방된 '타임 슈퍼리치'의 삶을 여실히 보여주었기에 나이 듦을 더 이상 서글퍼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은 알아차림을 얻었다.




헐벗은 나무들과 미풍을 맞고 서서, 겨울 안부를 미리 물었다. 그 야윈 밑동으로 겨울을 어떻게 버티겠냐고..



"느낌은 호모 사피엔스의 전유물입니다. 어떤 동물도 느낌 차원까지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느낌은 미술관에서 명화를 봤을 때, 혹은 지금 같은 10월에 설악산 천불동 계곡을 이른 아침에 혼자 등산할 때.. 불타는 단풍을 봤을 때 생기는 겁니다. 그건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입니다. 동물은 생존본능에 의한 감정차원까지는 올라갔는데 느낌까지 승화되지 못했습니다."

<리의 뇌, 창조의 원천 인용>





산꼭대기는 컬러는 초겨울. 눈앞으로 헬리콥터가 지나갔다.



호모 사피엔스의 위대한 능력은 노고단 산마루에서 쉽게 재현할 수 있다. 가을볕이 고운 한낮에 눅진한 어둠과 벌레 사체를 만나야 하는 일과를 탈출한 선택스스로 감탄할 만큼..


감질났던 가을볕이 온몸을 투과하고, 청량한 공기가 폐부를 훑는 느낌이 황홀했다.






돌아오는 길에 근처 천은사와 화엄사 절집을 들렀는데 선연한 초록이 남아있어 가을이 오래 머물기를 바랐다.


홀로 적막했던 구례 산골짝에서 하루 인연으로 나를 스쳐간 모든 존재들과 비감에 사무치는 첼로를 선곡해 준 전주 FM담당자에게 감사했고


무탈하게 살아있어 이 좋은 것들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음에 감사했다.







https://youtu.be/tgLe9m7xUXQ?si=hOjEJkRFqWAjgYS0

오펜바흐 <자클린의 눈물>


첼로 선율에 스며있는 지극한 처연함이 최상의 몰입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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