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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쏘 Nov 20. 2021

20211120 오늘을 사는 잠언

어리석어 보였으나 알고 보니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 있는가?

잠언 1장 22절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미련한 자는  현실과 유리되어 있지만 방식은 부류마다 다르다. 이번에 살펴볼 미련한 자는 히브리어로 '페디이',  어리석은 자다. 이는 아무 말이나 덥석 믿는 미련함이다.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는다". 이들은 너무 쉽게 영향을 받아 끌려다닌다. 거창하고 극적인 일에 아이처럼 감동한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해 누가 인정만  주면 강압에도  넘어갈  있다. 화와 번영을 약속하는 독재자를 지지할 사람들이다. 지적으로 게을러서 매사에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일확천금의 미끼에 속아 넘어가기도 쉽다.
물론 어리석은 자도 변화되어 지혜를 얻을  있으나, 반대로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아" 완전히 미련한 자로 굳어질 수도 있다. 어리석게  속는 성질을 세련되지 못함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전에 우리가 목회했던 교회는 회중 전체가 다소 세련되지 못한 편이었으나 전혀 어리석지 않았다. 세상적 기준으로는 세련되지 못해도 지혜로울  있다. 반대로 재물과 인맥과 학력을 두루 갖춘 사람도 충분히 어리석을  있다.

-  켈러, 오늘을 사는 잠언, 01/09


Q. 여태 만났던 사람 중에 어리석어 보였으나 알고 보니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 있는가? 그들이 보여 준 특성은 무엇인가?


 '어리석어 보였으나 알고 보니 그렇지 않았던 사람'을 떠올리려다 보니, '어리석어 보였던 사람'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스스로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 부도덕을 일삼으며 남에게 피해와 상처를 주는 행위를 나는 '어리석다'라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그러한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즉, 다른 사람에게 피해와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다소 강박적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렇지만 그 결과가 정말로 좋았는지는, 다시 말해 내가 스스로를 강박적으로 몰아세운 만큼 다른 사람에게 정말로 상처와 피해를 주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역시도 나의 어리석음의 증거일 것이다. 1)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와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피해와 상처를 입히는 어리석음2) 치명적인 방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행위의 결과물이 의도한 수준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데에서 오는 어리석음.


 그러나 메타적으로 생각하면, 아예 어리석음의 정의에서부터 나는 나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피해와 상처를 주지 않기'로 어리석음을 정의 내리면, 너무나도 맹점이 많다. 그 대표적인 맹점 중 하나가 본문에 나오는 '페디이'의 어리석음이다. 나의 어리석은 기준에 따르면, [평화와 번영을 약속하는 독재자]를, 그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지지하는 어리석은 행위를 할 수가 있다. 또한 나와 소통하는 사람을 의심하여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온갖 말을 믿고, 너무 쉽게 영향을 받아 끌려다니며, 거창하고 극적인 일에 아이처럼 감동하고, 누가 인정만 해 주면 강압에도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사람] 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미련한 것이다.'라는 나의 이 명제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이 역시도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너무 강한 욕구]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는, 일차적으로는 타인에게 주는 피해를 감소시키는 행위로 보인다는 점에서 이타적으로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가?"를 생각해 보면, '결국 나 자신이 미움받지 않고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다.


 그렇다면 그 본질은 '미움받고 싶지 않고,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일 텐데, 그 마음이 과연 채워질 수 있는 마음일까?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는 것은 1) 그 주체가 타인에게 있다는 데에서 내 행위의 목적으로 삼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쉽게 말해서 내가 어떤 노력을 한다고 해도 상대가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은 상대의 마음이고, 내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경향성이 있을 수 있고, 확률을 높일 수는 있을지 모른다. 2) 그러나 만에 하나 어찌어찌 노력하여 상대로부터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또 그것대로 허무함을 가져온다. '내 본모습 그대로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은 게 아니라, 내가 노력했기 때문에 나에게 사랑을 주는 것이겠지. 내가 더 이상 노력하지 않으면 이 사랑은 사라질 거야.'라는 생각으로 결국 본질적인 욕구를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이러한 결과는 당연하다. 3)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은 추구해야 할 본질이 아닌, 본질을 추구했을 때 따라오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추구해야 할 본질이 아닌 현상을 추구하면, 보통은 심지가 없다. 알맹이가 비어있는 겨와 같이, 시시각각 바뀌는 현상에 이리저리 나부낄 뿐이다. 같은 의미로, '유행'과 '인기'는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본질인 것처럼 추구하게 되는 대표적인 것들이다. 아이돌들이 정신적 허무를 견디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너무나 안타까운 일들도 결국에는 본질을 성찰할 기회가 없이 어린 시절부터 인기와 유행이라는 현상만을 추구하도록 외부로부터 부추겨지는 데에서부터 그 원인이 기인한 것이지 않을까?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할 본질로 삼아야 할까? 각자마다 결론이 다를 수 있지만, 나의 경우에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그분과 교제하며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본질로 삼았다. 하나님께서 선과 지혜의 근원이시니, 그 모습을 닮아가는 것을 본질로서 추구한다면, 그 현상으로 더욱 선한 행동과 더욱 지혜로운 행동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나 자신을 더욱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자신을 더욱 사랑하는 마음은 1) 그 주체가 나에게 있으며 2) 본질을 추구하고 그 방향으로 변화하는 내 본모습 그대로에 대한 것이며 3) 그 자체가 현상이 아닌 본질이다. 따라서 내게는 마땅히 추구할 만한 것이 된다.


 이런 이야기가 다소 당연하고 진부하고 촌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하루 세끼를 정해진 시간에 먹고, 10시 이전에 잠에 들어 7시간 이상을 자고, 하루에 만 보 이상 걷고, 30분 이상 햇빛을 보고, 야채를 많이 먹으라는 등의 이야기는 당연하고 진부하지만, 그 당연하고 진부한 이야기만 잘 지켜도 나의 신체 건강은 지금보다 월등히 나을 것이다. 잠언의 지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내 머릿속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고 진부한 개념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며, 내가 행위로써 실천하고 있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나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기 위해서 늘 세련되고 새로운 통찰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온전히 행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기 위해 매일 진리를 묵상하며 나 자신이 본질을 추구할 수 있도록 주님께 은혜를 구할 것이다.



* [] 안의 문구는 본문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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