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와 공존하기
에크뤼튀르와 파롤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다. 파롤의 에크뤼튀르적 특성때문에 오해가 생긴다. 그러나 그렇다고 소통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그냥 염두에 두고 그것의 한계를 인정하고 되는 데까지는 해 보아야 한다는 데리다의 철학에도 공감한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또 항상 그렇게는 못했겠지만, 20대 중후반까지 내가 지향하는 행동의 방향성이 있었다. 나는 많은 경우 낙관적이지만, 눈을 가린 낙관은 내가 지향하는 바는 아니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팔을 걷어붙이는 낙관을 지향했다. 근데 그것은 힘이 많이 들어간다.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한계에 대해 외면하지 않고 정확하게 인지한 상태에서 그것을 나의 의지와 행동으로 극복하려는 낙관. 이를테면, 뇌과학을 공부하고자 하였을 때, [뇌과학 연구에는 뇌를 연구하기 위한 기기들의 발전 속도로 인해 한계가 있다]는 것을 파악한 후, '그러면 그 기기의 발전을 위해서는 연구가 필요하고, 연구 속도는 연구비의 지원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니, 그 연구에 내가 천문학적인 수준의 돈을 투자할 수 있을 만큼 돈을 버는 것까지 해야겠다'라고 결심하고 돈 버는 목표부터 세우는 식이다. 그러니 힘이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가졌으니 오랜 시간 자기 혹사가 뒤따랐던 것일지도. 어떤 문제든 파악하고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해결 방식이 온통 나를 갈아 넣는 방식이니까.
그러나 신앙이 강해지고 나서는 그런 태도의 극단이 교만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점점 알게 되었다. 나를 갈아 넣어 무조건 해결하겠다는 태도는, 내 지성과 내 노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자기를 희생하여 무언가를 달성하려는 강한 의지로 볼 수도 있고, 특히나 그 달성하려는 것이 자신이 생각했을 때 선한 방향성을 가졌다면, 선한 가치를 달성하려는 숭고한 헌신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제에는 정말 큰 교만이 숨어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혹은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주는 불안이 싫어서 그랬을까? 그랬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만으로 서른여섯이 되었다. 세는 나이로 하면 서른일곱. 한국에서는 받침에 ㅅ이 들어가는 때는 중반, ㅂ이 들어가는 때는 후반으로 본다는 말이 있다. 여섯과 일곱의 사이, 또다시 삼십 대 중후반이라는 이 절묘한 틈에서, 그래서 여기까지 온 지금의 나는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언어화해 본다. 재밌게도, 글로 쓰고 있으니 에크리튀르의 한계가 있겠지만, 그냥 그 한계를 인정하고 되는 데까지만이라도 쓰는, 프랙탈처럼 바로 이런 태도가 지금 내가 지향하는 태도다.
즉, 1) 지향하는 목표와 가치가 있고 2) 한계도 명확하게 파악하고 인정하지만, 그것을 나를 갈아 넣어서 극복하려는 태도가 아닌, 3) 그저 그것이 있음을 인정하고 되는 데까지 해 나가는 태도. 즉, 한계를 극복하고 없애려는 게 아닌, 한계와 함께 가는 태도다. 이런 태도에서는 결국 목표와 가치에 끝내 도달할 수 없을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향으로 가보는 것, 그렇게 해 보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결국 신앙적인 태도와도 연결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그 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주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는 것이다. 혹시라도 내 머리로 생각하고 계획한 대로 일이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내 뜻보다 크신 주님의 계획을 신뢰하며 묵묵히 내가 할 일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힘을 빼고 노력을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물론 최선을 다 해야 한다. 그러나 이전에는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책임감을 지고 스스로를 혹사하고 갈아 넣으면서 인생의 다른 중요한 가치들, 이를테면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랄지, 등을 희생하는 것까지였다면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한계에 대한 부분은 주님께서 일하실 것을 믿고, 나는 행복한 상태로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혼자서 모든 짐을 짊어지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에너지까지도 전부 본질적인 노력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이 편이 더 합리적이기도 하다.
힘을 빼고,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태도. 이런 태도를 가지면 여유가 있다. 여유가 있으면,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도 잊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득실보다는 관계, 세상의 인정보다는 하나님의 인정, 능력주의보다는 약자를 보호하는 것, 예술의 인지도 보다는 개성에 더 무게를 두는 방향으로 가고정 된 상태다. 지금은 이런 태도로 작곡도, 창업도, 관계도, 건강관리도 해 나가고 싶다.
40대 중후반에는 또 어떤 태도를 지향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