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스러운 베를리너 되어보기

베를린에서의 하루

by 제쏘

St. Oberholz

St. Oberholz 에서 CLUB-MATE를 마시며 포스팅.

St. Oberholz는 집 근처 Rosenthaler Platz 에 있는 카페인데, 사방에 있는 사각형 테이블과 멀티탭들 덕분에 온통 맥북+클럽마테 힙스터 천지다. 그 덕에 Mein-Hous-am-see보다 공부하고 글쓰고 그림 그리고 하기에는 월등히 적합하다. MHAS는 좀 더 정신 나간 마리화나 필 가득한 (실제로 페이스북 페이지 프로필 사진을 보면 Will you maryjane me? 라고 쓰여있는데, maryjane은 이쪽에서 마리화나를 지칭하는 은어로 쓰인다.) 히피 분위기라 다들 술마시면서 옆사람이랑 잡담하거나, 이 세상에 자신과 상대 이외에는 그 어떤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만이 할 법한 애정행각을 벌이는 커플들로 가득 차 있는데, 여기는 너드들의 모임같은 느낌이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공부를 하거나 맥북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어쩐지 리뷰에, 혹시 이 카페 출입하려면 맥이 mandatory냐고 냉소적으로 적혀있던데, 실제 와보고 실소가 터져나왔다.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맥에 클럽마테를 마시고 있을까. 그래서 나도 맥을 열고 라떼마끼아또를 주문했고, 다 마시고 나서 클럽마테를 시켜보는 촌스러운 짓을 했다.


실로 촌스러움은 이런 데서 나온다. 서울에 이런 카페가 있었다 해도, 그 카페 가서 맥을 펼치고 모두가 주문하는 음료를 의도적으로 주문하며 뭔가 완수한 듯한 기분을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소름돋고 오글거린다. 그런데 나는 아직 베를리너가 아니니, 이런 것들이 must do 처럼 느껴지는 거다. 의도한 촌스러움'은 가끔 극단의 세련됨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지금은 반대 상황이다. 의도한 세련됨' 이라는 개념은 없다. 세련됨에 의도가 들어가는 순간,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촌스러움으로 귀결된다. 이런 현상은 절제가 결여될 때 더욱 극단적으로 두드러지는데, 내가 유행을 따르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거기에 있다.


https://g.page/stoberholz-ros?share

(클럽마테를 마시지 않거나 맥북을 소지하지 않은 자는 들어올 수 없다는 풍문을 가진 카페의 위치.)


이 곳에 오기 전에는 DUDU에서 아침 겸 점심 겸 저녁을 먹었다. 소문대로 환상적인 맛이었고,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그런데 요즘 참으로 의문이 드는 게, 내 양이 줄어든 것인지, 독일 레스토랑의 음식 양이 비정상적으로 많은 건지 모르겠다. 혹은 둘다일까? 어쨌거나, 요즘엔 하루에 한 끼만 먹는데, 편하고 좋은 것 같다. 역시 최근 몇년간의 폭발적인 식욕은 스트레스 받는 환경에서 생긴 비정상적인 욕망이었다. 지금 나를 아는 사람들은 믿을 수 없겠지만, 인생의 대부분의 시기동안 사실 나는 식탐이 거의 없었다. 끼니 때우는 게 귀찮아서 칼로리바로 대신 할 정도로. 이곳에서 여유롭고 편안하니, 다시 본래 모습을 되찾는다. 그렇지만 가끔 배가 고플 땐 금성무가 영화보며 샐러드 집어먹듯 젤리나 초콜렛이 뭍은 작은 비스킷 따위를 넣어둔 그릇으로 손을 뻗어 잡히는 대로 입에 넣고 씹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얼굴에 멍청이같은 미소가 번진다. 으. 단것! 5년 전부턴가 하리보에 집착했는데, 여기 오니 진짜 천국이 따로 없다.


젤리나 사탕, 초콜렛 따위에 집착하는 나를 인지할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거쳐야 할 단계를 다 거치긴 해야 하나보다. 철 없던 사람도 죽을 때 되면 갑자기 철드는 것처럼. 혹여 그 순서가 조금 뒤바뀌더라도 어쨌든 거쳐야 하나보다. 난 어릴 때 난 초콜렛이나 젤리를 싫어해서 정말 아예 먹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런게 없으면 힘들다. 한번은 같이 자취하던 M이 내가 자다가 아침에 눈 뜨자마자 초콜렛 있는 곳으로 기어가서 껍질을 까서 입에 넣는 걸 보고 기절초풍한적도 있을 정도로 단 걸 좋아한다. 그리고 어릴 때 엄마가 우리 젯소는 언제 철드나, 하는 말을 하실 때마다 어른스럽게 행동해야지 하고 다짐한 탓에 어리광을 부리거나 떼를 쓰는 건 상상 할 수도 없었고, 규칙에서 벗어난 행동같은건 절대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지금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친해지기 전에는 어른스러운 듯 행동하다가) 친해지고 나면 어릴때와는 전혀 달리 알게 모르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옆에 있는 언니들의 손을 가져다가 내 머리에 올리고 내 머리를 그 손으로 쓰다듬는 행동 같은 것들. 그러면 언니들은 아이구, 젯소, 머리 쓰다듬어줘? 그러면 나는 히히 하고, 언니들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지나온 20대를 돌아보면, 사랑을 갈구하는 강아지같은 행동들을 하는 내가 보인다. 그리고 철두철미해 보이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철없이 밥도 잘 안먹고 무리하고 나를 잘 돌보지 않는 모습을 주변 사람들에게 자꾸 들킨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사람들이 나를 챙겨주고 걱정한다. 심지어 동생들한테까지 그렇게 보이는지 M이랑 D는 연락 하기만 하면 내 걱정부터 하는데, 근데, 사실은, 내가 그 안에서 어떤 은근한 안락함을 느끼는 것 같다. 해피엔딩을 마주한 애정결핍처럼. 그 외에도, 어릴 때 엄마가 넌 애가 너무 차가워서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안나울 것 같다고 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너무 과한 감정들과 너무 과한 내면화에 힘들다. 싫은 소리 못하고, 감정적이고, 예민하다. 애어른의 결말은 어른아이 인 걸까. 그래도 뭔가 안도감이 드는 것은, 지금 애처럼 행동 안하면 뭔가 치매라도 걸려서 그렇게 될까봐 걱정되니까. 엉뚱한 상상일 지 모르지만, 너무 어른스럽게만 산 사람만이 치매에 걸리는 게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어쨌든.


베를린 한복한을 가로지르는 강1
베를린 한복한을 가로지르는 강2

DUDU에 가기 전에는 베를린 한복한을 가로지르는 강을 따라 걸었다. 걷는 내내 여름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울 지 상상. 그리고 함께하면 좋을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엄마, S, M, 등등. 곳곳에 그 사람들과 내가 함께 산책을 하거나, 벤치에 앉아 있거나, 계단 옆 돌난간에 기대앉아 있는 모습이 환영처럼 생기고, 사라지기가 반복. 그런데 여기에는 유달리 MHAC 타입의 연인들이 많이 보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럴만 한게, 발렌타인 데이였구나.

장벽

강변을 걷기 전에는 베를린 장벽에 갔었다. 날씨 좋은 날에 잔디밭을 걸을 수 있어서 좋았고, 하늘이 넓게 보여서 좋았다. 장벽에 별 감흥은 없었다. East side gallery에 가면 좀 감흥이 있을까. 장벽을 보는 내내 헤드윅이 생각났다. 불쌍한 헤드윅. 그래, 미국 산 구미베어는 훨씬 더 말랑말랑하고 달콤하지. 불쌍한 헤드윅.

베를린 장벽에 가기 전에는 사운드 클라우드를 기웃거렸다. 집에서 사운드 클라우드로 가는 길에는 어제 산 검붉게 익은 자두를 하나 베어 물고 있었다. 토요일이라 아무도 없는 베를린 스타트업 센터는 꼭 폐허처럼 보였다. 조금 무서웠다. 월요일에 갔을 땐 좀 활기찼으면 좋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커피 내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