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내리기

아니, 그 차이는 거 말고요.

by 제쏘


1.

대학 시절 어떤 학기에 나는, 다음 학기 기숙사 선발에 떨어질 성적임을 직감했다.


모종의 이유로 한 학기에 전공과목 5개, 전공 실험 3개 총 전공과목 8개를 신청했다. 게다가 전공과목 8개를 한 학기에 소화할 체력을 기른다는 이유로 태권도 1개까지 총 19학점을 신청해버린 나, 제법 도전적이었다. 그러나 전공 8개를 조지고자 하는 나의 무(모)한 도전과 달리, 조져진 건 나였다. 결국 나는 부모님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다음 학기 기숙사 떨어질 것 같아요'를 고백하며 자취의 필요성을 암시했고, 결국 자취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하방에 풀옵션으로 들어간 원룸이었지만, 그 안에서 나는 펜트하우스 부럽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친구를 초대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신났다. 남들은 내 자취방이 아지트로 쓰일까 봐 걱정되어 친구를 부르지 않는다는데, 난 반대였다. 모든 친한 친구에게 내 방을 아지트로 쓰라고 선포하고 비밀번호까지 공유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의 저조한 직전학기 성적으로 인해, 기숙사비의 3배 정도 되는 방세를 감당해주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사치를 부릴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옵션으로 갖추어진 가구만 사용하고 일체의 가구를 들이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입한 가전이 딱 한 개 있다. 바로 커피메이커다.


2.

가난한 대학생이 필수품도 아닌 사치품의 영역에 들어가는 커피메이커를 산 이유는, 집에 놀러 온 절친한 친구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야, 커피메이커 사봐. 아침의 질이 달라져. 향긋한 커피 향이 부드럽게 잠을 깨우는 고급스러운 아침을 생각해 봐라. 몇 끼 굶어서라도 사고 싶을걸?


상상력이 풍부한 죄로, 듣자마자 상상 해 버린 나는 그 길로 인터넷에서 커피메이커를 주문했다. 드디어 며칠 뒤 커피메이커가 도착했다. 은은한 무광블랙으로 빛나는 그 자태를 보며, 나는 ‘고급지고 향긋한 아침’을 맞이 할 생각에 설레서 어쩔 줄을 모를 지경이었다.


3.

그러나 커피메이커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었다. 종이 필터도 있어야 하고, 원두도 사야 하고, 갈아진 원두가 아니라면 그라인더도 있어야 했다. 커피는 단골 카페에서 핸드드립용으로 갈아달라고 해서 사 오면 되는데, 필터는 어디서 사지? 그때부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땐 2011년이었다. 쿠팡 로켓 배송도 없었다는 얘기다.


결국 페이스북에 필터 있는 사람을 수소문했고, 동아리 오빠 중 커피에 조예가 있는 오빠가 자신이 주겠다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사려 깊은 오빠는 필터뿐만 아니라 원두도, 심지어는 오렌지도 담긴 쇼핑백을 내밀었고, 그다음 날 나는 말 그대로 과분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름답고 향기로우며 사치스러운 아침을 맞이했다. 얼마나 행복했던지, 커피 메이커가 내는 그 증기기관차 같은 소리도 아름다운 하모니로 들릴 지경이었다.


4.

그때로부터 꼭 십 년이 지났다.


그 십 년 동안, 사실 커피와 사이가 좋기만 했던 건 아니다.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커피. 너무 가깝게 지내면 어느새 불면증에 시달렸고, 불면증에 시달리다 보면 너무 피곤해 자연스럽게 커피와 소원해졌다. 그러나 오래 못 볼 수록 커피와 함께했던 행복한 아침들과 부드러운 향기가 너무나도 그리워졌고, 그 치명적인 매력에 결국 또다시 커피를 찾았다. 그리고 또다시 불면증에 시달리고, 또 소원해지고의 반복.


그러나 지속 가능한 모든 관계가 그렇듯, 나와 커피 씨도 결국 멀어지고 가까워지며 적절한 거리를 찾아냈고, 지금은 안정적이고 행복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요즘의 나는 온두라스 엘 파라이소 디카페인 커피와 함께 아침 루틴을 함께하고 있고, 커피씨에게 더욱 예를 갖추기 위해 핸드드립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내가 원두를 고심해서 고르고, 원두를 적절한 크기로 갈고, 물 온도를 재고, 물줄기의 세기를 미세하게 조정하며 정성을 쏟을수록, 커피도 그에 상응하는 맛과 향기로 내게 보답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자체가 하나의 예술과도 같이 아름답게 느껴져서 아침을 시작하는 내게 극진한 행복감을 준다.


아래에는 내가 매일 아침 참고하는 나의 궁극의 레시피를 정리하겠다. 10년 전 내 친구의 한마디가 그러했듯, 나의 팁들이 당신만의 향긋하고 아름다운 아침을 찾아가는 여정에 좋은 지도가 되기를.


PS. 커피 내리기라고 했지만, 사실은 차여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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