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축복

by 제쏘

아주 오랫동안 나는 잊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너무 많은 말들, 너무 많은 표정들, 너무 많은 상황들이 마음에 흘렀고 결코 마르지 않았다. 마를 때쯤 되면 어김없이 상념으로 홍수가 났고, 그때마다 나는 그 물줄기들을 착실히 복습할 수밖에 없었다. 수 차례 복습된 기억의 물줄기들은 결국 망각곡선에 따라 드넓은 장기기억에 합쳐졌다.


종종 그 기억을 상기하며 언어로 형상화하는 날에는, 나는 자주 고아처럼 쓸쓸해지곤 했다. 내게만 남아 있는 기억의 수면 아래 숨어, 눈물을 참으려 바다소금 초콜릿을 오독오독 씹어 삼켰다.


너무 많은 기억들이 나를 집어삼켰고 나는 거기에 잠겨 자맥질했다.


그런데 약을 먹고 나서부터는 내 마음이 점점 단단해져, 더 이상 물길이 생기지 않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물길이 생기지 않으니 나는 더 이상 복습할 것도 없이 불현듯 사막이 되어버린 뇌 속에 속수무책으로 앉아 있다. 텐트도 없이. 낙타도 없이. 젠장이라고 욕을 하며.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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