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을 좋아합니다.
산을 오르며 차분히 사색하는 것도 좋고, 나뭇가지의 새싹과 들꽃들의 색감, 풍겨오는 향기도 참 좋습니다. 강요받지 않고 내 페이스대로 차분하게 오르며, 차가운 산 공기가 좋아 가끔 등산을 합니다.
그런데, 직장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등산 예찬론자인 부서장>은 등산의 묘미를 이야기합니다. 그는 산의 공기와 푸릇한 자연을 즐기며 정산에 오르면 그렇게 좋고 힐링이 된다며 직원들에게 권유를 했습니다.
물론, 나 또한 공감했고 대부분의 직원들도 <단련된 말투로> 호응을 했습니다. 거기까지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여지없이 누군가 훅 치고 들어옵니다.
매월 부서 정기산행을 제안합니다.
부서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맞장구를 치며,
아이디어를 낸 직원에게 눈빛으로 상을 줍니다.
그렇게 부서의 정기산행은 시작되었습니다.
난, 산행을 즐기는 편이지만, 이렇게 강요된 산행은 <일의 연장>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취미로, 놀이로, 즐거움>으로 끝내는 것이 맞지만,
<비자발적 산행>은 들꽃과 새싹과 풍경, 산 공기는 <그저 사무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물론, 부서의 정기산행은 자발적으로 원하는 직원만 참석하는 것이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는 직원 외에는 전부 참석하는 <업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럴 때 자유의지란 작동하기 쉽지 않습니다. 결국 각자의 경험상 불참하는 것은 여러모로 손해가 뒤따르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게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꼰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마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서장은 순수한 마음으로 직원들에게 좋은 취미를 느끼도록 의도했을는지 모르지만, 그 당시 대부분의 부서원들은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취미와 놀이>는 자발성이 없어지는 순간 <노동> 일뿐입니다.
예전에 자원봉사를 갔을 때,
문득 느낀 것이 있습니다.
노후된 버스정류장을 페인트 칠해 보수하는 자원봉사입니다. 저는 자원봉사로 참여해서 처음 본 사람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자원봉사를 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풋풋한 생기>가 흐릅니다. 웃음은 언제나 경쾌하고, 나이와 상관없이 푸릇한 풀잎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약간의 벽화작업이 필요해서 <돈을 받고> 참여하신 작업자 분도 있습니다.
자원봉사들과 뒤 썩어 비슷한 작업을 하지만, 그분들의 얼굴은 사뭇 다릅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본 것 같이 너무나 익숙한 표정입니다.
직장에서 매일 보아온 사람들과 비슷한 표정이라 그런 듯했다.
그분들에게 없다는 것은 아마도 <자유의지>였을 것입니다.
물론 그 일을 택한 것은 자유이지만, 돈을 받기 위한 페인트 작업은 <수단> 일 것입니다. 수단을 위해 비자발적인 선택입니다.
<부서 정기산행에 온 직장인>과 <자원봉사장에서 본 페인트공>은 서로 닮아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서로 같은 표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직장인이 많이 느끼는 <고독>이며, <버팀> 일 것입니다.
한동안 생각으로 느낀 저의 결론은, <노동>과 <놀이>의 차이로 결부되었습니다. 둘의 가장 큰 차이는 자발성과 자유의지입니다.
즐거운 놀이도 시간을 정하고, 잘 놀고 있는지 평가를 받고 간섭받게 되면 자발성은 상실됩니다. 그 또한 일이 되고 버팀의 영역에 들어서게 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남이 시키는 것을 싫어합니다. 잠재된 열등감과 자존심은 자신이 하려는 일에 <지시>가 개입되는 순간, 자율성과 창의성을 헝클어 놓고 말아 버립니다. 충만한 에너지와 열정은 금세 식어 다시 끊어 올리려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직장 외 <B프랜>을 짜고 이행합니다.
강력한 에너지로 말입니다.
직장에서 벗어나 <놀이>처럼 두근거리고 몰입하며 그 자체에서 충만감과 행복감을 얻는 일, 누구도 지시하고 간섭받지 않고, <오로지> 내가 기획하고 실행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마땅히 지는 곳으로 가는 것, 그것이 나의 길입니다.
그 길로 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빠짐없이 이곳에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