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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영 Feb 26. 2016

'한 발짝'의 설렘

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 독후감

어릴 때, 나는 사촌형들이랑 노는 걸 참 좋아했었다. 그렇지만 내가 사촌형들이 보고싶다고 칭얼댈 때마다, 엄마는 ‘또래들이랑 노는 것’을 강조하시곤 했다. 친구들이랑 놀아, 너 형들이랑 같이 학교 다닐 거 아니잖아, 라시면서.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엄마는 내가 또래 친구들과 노는 걸 시시하게 여길까봐 걱정하셨다고 했다. 마치 학원에서 이미 선행학습을 해버린 학생들이 도무지 학교 수업에서 흥미를 느끼지 못하듯이.


더 멋진 것, 더 대단한 것, 더 설레는 것이 반드시 더 행복한 삶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한번 맛보면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최소한 그만큼 멋지고 대단하고 설레는 것들과 함께하지 못하면, 삶은 욕구불만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아, 나는 분명 더 멋진 걸 알고 있는데, 나는 이것보다 대단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인데, 나는 더 설레 봤는데.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의 주인공 역시 비슷한 케이스가 아닐까. 주인공은 15살 때, 34살의 한나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15살과 34살은 어마어마한 차이다. 열다섯의 소년에게 서른넷의 여인은 더없이 성숙하고, 섹시하고, 능란하고, 안정적일 수밖에 없다. 주인공은 어지간해서는 그 때의 희열을 맛볼 수 없다. 그래서 계속 방황한다. 그렇지만 그 때의 강렬함을 다시 추구할 용기는 없다. 그래서 일단 타협한다. 그렇지만 도저히 정을 붙일 수가 없다. 그리고 결국 게르트루트와 이혼한다.


운 좋게, 아니 어쩌면 운 나쁘게, 강렬한 경험을 하게 될 때가 있다. 그렇지만 이 강렬함이라는 것이 계속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강렬함을 붙들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책 읽어주는 남자>의 주인공에게는 세 번의 기회가 있었다. 한나가 수영장 앞에 나타났을 때, 재판장에서 한나를 만났을 때, 출소 직전의 한나와 재회했을 때. 그리고 주인공은 언제나 ‘한 발짝 부족했다.’


주인공이 딱히 못난 사람이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냥 원래 이 ‘한 발짝’은 졸라 어려운 거다. 용기가 흔한 거였으면 용기라는 단어가 생길 필요조차 없었겠지. 평범한 사람이 갖기 힘든 미덕이기 때문에 용기가 용기인 거다.


그렇지만 용기를 내지 못하면, 그래서 ‘한 발짝’을 내딛지 못한다면, 계속 찝찝하게 살게 된다. 그 때만큼 심장이 뛰지 않아서,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내 길은 아닌 것 같아서, 약간의 무력감을 느끼면서 살게 된다. (물론 삶은 그런 우리를 위해서 망각이라는 마취제를 놔 준다.)


별 수 있나. 운 나쁘게 무언가에 강렬하게 끌려 봤으면, 좇는 수밖에. 혹시 아나. 나중에 돌이키면서 ‘그 때’를 운 좋았다고 추억할 수 있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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