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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영 Jun 24. 2018

아쉬운 번역, 누굴 탓하면 좋을까

요즘 레이 달리오의 <원칙>에 빠져 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극 추천중이다. 거의 모든 부분에 적극 공감하면서 읽고 있다. 요즘 가장 행복한 순간을 꼽으라면 <원칙>을 읽을 때다.


(<원칙> 예찬론은 다음에 하기로 하고) 책에서 아쉬운 점을 꼽으라면 번역이다. 어색한 문장이 많이 나온다. 미묘한 뉘앙스를 담지 못해 오해의 소지가 있는 문장도 꽤 있다.


그렇다고 번역가를 마냥 탓할 수는 없다. 한국 번역계의 환경은 열악하다. 최고의 번역을 하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투자해 장인정신을 발휘하면서 남부럽지 않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번역가는 극소수다. 이런 상황에서 번역가에게 소명의식이 부족하다고 비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출판사를 탓하기도 쉽지 않다. 가뜩이나 어려운 출판 시장이다. 더 좋은 번역이 반드시 더 많은 판매로 이어진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출판사더러 번역가의 리스크를 대신 떠안으라고 할 수는 없다.

독자를 탓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책을 많이 사면 출판사가 번역료를 올려주겠지, 그러면 번역가는 더 좋은 번역으로 보답할 거고, 결국에는 내가 행복할 거야.’ 개개인 입장에서 뭐하러 이런 생각에 동의를 해야 하나.


세상 일이라는 게 어느 쪽만 콕 찝어서 탓하기 참 어렵다. 누구나 각자의 사정이 있다. 거대한 불합리는 대개 나름의 합리적인 선택이 모여 만들어진다. 누군가의 악의로 인해 구조적인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의외로 많지 않다.


물론 남다른 역량과 투철한 프로의식으로 고퀄의 번역을 빠른 속도로 해내는 번역가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러면 그 번역가로 인해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번역뿐만 아니라 디자인과 마케팅까지 끝장나게 잘해서 어마어마한 매출을 올리는 멋진 출판사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러면 그 출판사로 인해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때로는 비싸지는 게 오히려 합리적인 가격이 될 수도 있다는 인식을 퍼뜨리는 누군가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러면 그 고객들로 인해 거대한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남다른 선의와 역량을 가진 개인 또는 조직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그 업계를 탓할 수는 없다. 애초에 희귀하니까 남다른 것 아니겠나. 우리는 대부분 평범하다. 평범함을 탓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긍정할 수 있는 사람과 조직은 이 세상에 거의 남지 않는다.


현실을 진짜로 바꾸고 싶다면, 구조를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하는 것 같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가 보이지 않을까. 내가 번역가라면 번역에서부터, 출판인이라면 출판에서부터, 독자라면 소비에서부터.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조금 더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조금 더 능력이 있는 조직이라면 우리를 더 크게 키워보자. 지금, 여기에서부터 선순환의 시작을 만들어 보자. 세상을 바꾸는 건 속시원한 비판이 아니라 묵묵한 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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