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덕의 <서울선언>을 읽고
어떤 문학 연구자들은 문학적 가치로 작품이 좋고 나쁘다고 판정합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사료 가치가 있고 없다거나, 일급 사료니 사료 가치가 적다느니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저 같은 문헌학자는 어떤 문헌의 사료적 가치가 높은지 낮은지, 문학적 가치가 높은지 낮은지를 판단하기 전에, 눈 앞에 있는 문헌이 저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 있는 수억 원짜리 책도, 노량진역 육교 위에서 노인이 펼쳐 놓고 있는 1980년대의 당사주책도 저에게는 똑같이 귀중합니다.
서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 시대에 산수화에 그려져서 그 유래를 전하고 있는 사대문 안 관청과 대갓집들, 지배층이 한강가에 세운 정자들만 서울의 역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울의 모든 동네, 모든 건물은 그 모습 그대로 전부 뜻깊고, 전부 읽어 낼 거리가 무궁무진합니다. 이제까지 서울을 말해 온 사람들이 조선 시대 궁궐과 왕릉, 양반의 저택과 정자들을 주로 거론해 온 것은 대단히 편협한 귀족주의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모든 옛 책이 동일하게 귀중한 것과 마찬가지로, 서울 속의 모든 공간과 사람도 동일하게 가치 있는 존재들입니다.
부동산으로서의 투자 가치 말고는 그 어떤 의미도 부여받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아낌받는 일 없이 철거되어 버리는 사대문 바깥의 서울 곳곳에서 어떤 의미를 읽어 낼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저는 오늘도 서울을 구석구석 걸어 다닙니다.
이 책은 찬란한 <우리 문화유산>을 찬미하려고 쓴 게 아닙니다. <아픈 근대의 흔적>을 반추하고자 쓴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역사성, 상징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건물이나 공간의 그늘에서, 그 의미를 생각해 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서울 곳곳의 건물과 공간들을 살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적인 도시 한복판에서 의미를 읽어 내려고 시도하는 것은, 말하자면 <생활 속의 모험>을 즐기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이 예전과 다르게 보이는 경험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높은 사람들이 살던 궁궐과 기와집과 정자만 귀중한 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주택과 아파트, 우리가 걷고 있는 길, 낮에 들르는 가게와 식당도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저는 서울을 사랑하고 서울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 가려는 사람들의 뒤에 남아서, 그들이 필요할 때 찾아 쓸 수 있는 근거 자료와 논리를 제공하려 합니다. 누군가 문득 <이곳의 예전 모습은 어땠더라> 라고 궁금해하거나 <왜 여기는 이런 식으로 개발이 된 걸까> 하고 의아하게 여길 때, 이 책에서 흔적과 힌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김시덕, <서울선언> 중
기로에 설 때마다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인생에서 거울로 삼는 사람들이다. '이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이런 결정을 한다면 이들은 내게 뭐라고 할까' '이 길을 계속 걸으면 나는 이들과 계속 함께하게 될까 아니면 멀어지게 될까' 등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다 보면, 문제 자체에 천착할 때보다 한결 현명하고 슬기롭게 삶을 살아나갈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시덕님도 그런 분 중 하나다. 그를 떠올렸을 때 크게 부끄럽지 않다면 내 인생이 그렇게까지는 엇나가고 있지 않다고 믿을 수 있다. 위와 같은 글을 쓰는 사람인데 어떻게 흠모하고, 동시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나. 이런 분을 트레바리의 클럽장으로 모시면서 함께할 수 있어 늘 감사하고 뿌듯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