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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겸 Mar 05. 2021

봄의 초연에서 빼빠의 향연을 기대하며

PAPER를 다시 구독하며

1997년 11월 IMF 외환위기가 터진 후, 집의 분위기는 달과 별을 삼킨 칠흑의 겨울밤처럼 냉랭하고 무거웠다. 아버지는 등록금이 형편에 부친다는 말씀 대신에 군대에 빨리 가라고 하셨다. 그러나 군대 입영 희망자가 이미 넘쳐났었고 입대는 1년을 기다려야 했다. 이내 다시 봄이 찾아왔건만 마음은 겨울이었다. 3학기를 마치고 3개월 동안 항공화물 물류알바를 독하게 했다. 그렇게 번 돈을 4학기 등록금으로 묻어두고 바로 휴학을 신청했다. 운 좋게 입대 영장이 일찍 나온 터였다. 입대까지는 3개월이 있었다. 집안 사정을 생각해 집 근처에 편의점 알바를 시작했다. 그때 계절은 여름의 경계를 넘어 가을의 초입을 들어서는 시기였고 날씨는 그 뒤를 순순히 쫓았다. 어느 날 일하는 편의점 잡지 가판대에서 한 켠에 다른 잡지들에게 가려진 채로 수줍게 빼꼼 내민 머리가 보였다. 잡지를 집어 드니 두 손을 두 뺨에 대고 두 눈은 감은 채 수줍게 비상하는 천사가 드러났다. 어떻게 마음을 뺏겼는지도 몰랐다. 시급을 넘기는 돈을 포스기에 치르고 잡지를 반듯이 가방에 넣었다. 그게 'PAPER(이하 빼빠)'와 첫 만남이었다.


1998년 9월호


20여 년 전을 어제처럼 기억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혼자 '빼빠'를 처음 읽었던 감정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냉엄한 현실에 뒤로 밀려서 어제보다 힘든 오늘을 견디며 캄캄한 내일을 더듬거리며 나아갈 수밖에 없던 우리 모두의 시절에 '빼빠'는 나의 불안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위로해주는 안식처였다. 뚜렷이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힐 때면 무심결에 '빼빠'를 집어 들어 읽곤 했다. 백발두령 김원 님의 사진 위에 황경신 님이 흘겨 내려가는 감성적 글말이 참으로 좋았다. 마치 사진 뒤로 물러난 숨은 전경을 앞으로 끌어당기는 듯했다. 그래서 '빼빠'가 해어질 정도로 봤다. 그렇게 해어진 '빼빠'가 과월호가 되었어도 이달호의 '빼빠'와 함께 보곤 했다. 그러면서 점점 '빼빠'의 집필진이 궁금해져 갔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토록 사람을 멜랑콜리하게 만드는 건지. 결국 전화국에서 단말기를 빌려와서 처음으로 PC 통신 나우누리에 가입하고 '종이향기'를 가입했다. 그리고 난생처음으로 신촌 포차 번개에서 그들과 종이향기 동호인과 만났다. 98년 10월 10일. 가을의 완연함이 짙어가던 시기에 벌어진 내 소중한 추억이었다.   


제대를 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니 많은 것들이 내게 등져 있었다. 아버지는 이제야 형편에 부침이 있다며 앞으로 등록금과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하라고 하셨다. 당장 갈 곳이 없었고, 뭘 해야 할지 몰랐다. 다행히 누나가 마련해 준 반지하 방에서 나의 독립을 시작됐다. 비가 오면 곰팡이가 피어나고 창문 밖의 세상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전부인 반지하였지만 내게는 '안식처'였다. 그때부터 한 학기 복학하고 다음 학기 휴학하는 패턴이 시작됐다. 휴학기에는 등록금과 생활비를 독하게 벌었다. 그때도 여전히 '빼빠'는 나의 친구였고, 나의 글이 '빼빠'의 독자란에 실리기도 했다. 그 얼마나 감개무량하던지. 그러나 동기들보다 2년 늦게 코스모스 졸업을 하고 어렵사리 취업을 하니 내 머릿속은 온통 '돈'에 대한 갈망뿐이었다. 제대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남보란 듯이 성공을 하고 싶었다. 출퇴근 길에 경제와 금융 기사와 관련 서적을 읽으며 투자를 시작했고, 승진을 위한 영어공부와 관련 자격증 취득에 열을 올렸다. 나의 책장은 점점 새로운 경제/재테크 책들로 채워져 갔고, '빼빠'는 낡고 오래된 것이 되어 가장자리 구석으로 밀려났다. 그러면서 나는 점점 더 나은 곳으로, 더 좋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그렇게 나는 '빼빠'를 잊어가고 있었다.


<왼쪽. 가수 김창완님 / 중앙, 작가 황경신님, 만화가 박광수 님 / 오른쪽, 백발두령 김원님>


하지만 '빼빠'를 완전히 잊은 것 아니었다. 나의 20대를 대변해주는 소중한 물건들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으며, 그 속에 '빼빠'의 추억이 고스란하다. 학부시절 동안 애지중지했던 다이어리 속에는 1998년 10월 10일을 기념하는 추억이 온전히 남아있다. 친숙한 글씨체의 빛바랜 싸인 3장. 그때의 추억을 마주할 때면 아주 잠시 멈칫 얼어붙지만 어느새 스며든 온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어져 그윽해진다.

 

2020년 겨울호

1월의 어느 날, 문득 '빼빠'를 다시 읽고 싶다는 마음이 불현듯 일었다. 다행히 '빼빠'는 계간지로 여전히 남아있었다. 살아남아주어서 감사했다. 1년 구독을 신청하고 한 달을 기다려 '겨울호 빼빠'를 받았다. 표지를 보니 작년 11월이 창간 25주년이었다. '빼빠'는 월간지에서 격월지로, 그리고 휴간지에서 다시 계간지가 되어가는 25년 동안에도 홀연히 자리를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오랜 친구를 만난다는 반가움과 설렘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지만, 친구를 마주하니 녀석을 너무 잊고 살았다는 미안함과 죄책감이 밤바다의 연이은 거친 파도처럼 검게 밀려왔다. 딸을 재우고 가족의 귀소를 기다리는 밤. 노르불그스름한 스탠드 빛 아래에 다시 '빼빠'를 읽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방을 울렸고, 창문 밖에는 봄비가 세차게 '쏴아' 내리고 있었다. 봄비가 연주하는 봄의 초연 속에서 나는 다시 빼빠의 향연을 즐겼다. 이 향연이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이어지길 바라고 또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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