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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겸 Sep 20. 2020

나의 ‘직장 내 괴롭힘’ 이야기

『직장 내 괴롭힘』 치유 글쓰기


나는 직장 내 괴롭힘과 왕따로 인해 병을 얻고 회사를 퇴사를 했었다. 사실 다시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한동안 ‘부정적 반추’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가두기도 했었다.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고, 산이 있었고, 글쓰기가 있었다. 글을 쓰면서 고통을 극복하고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 다시 안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따금 어떤 단어 또는 연상 등이 트리거가 되어 과거의 기억을 인출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언젠가는 글로 담담하게 풀어내는 날이 올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그 날이 온 것 같다.


전 직장으로 이직하기 전, 나는 상명하복의 수직적 군대 문화에 진절머리가 나 있었다. 어느 정도의 수평적인 조직문화 속에서 일한 만큼 공정한 평가와 보상을 받고, 일과 삶의 밸런스를 맞추고, 단절이 아닌 소통하고, 부품이 아닌 사람처럼 대우받고 싶었다. 하얀 천에 잉크가 번지 듯 그런 바람이 점점 커져가던 어느 날, 헤드헌터로부터 오퍼를 받았다. 내가 바라마지 않던 조건을 가진 오퍼였다. 기대가 현실이 될 것 같았다. 오퍼를 수락하고 면접을 본 후, 원하는 조건으로 채용되었다. 그곳에서 상사인 K팀장을 처음 만났다. 그를 처음 봤을 때 유쾌한 사람으로 보였다. 나이도 젊었다. 회사에서 마흔 전 팀장은 그가 유일했다. 그는 팀원들과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분위기를 주도하는 외향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간 봐왔던 리더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와 잘 어울리고 싶었다. 서로 끌어주고 당겨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꽤 괜찮은 리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겪어보니, 그는 내 예상의 반대편에서 머무는 사람이었다. 한 번은 그가 사무실에서 말하길 최연장자 팀장에게 말실수를 해서 한동안 피해 다녔는데 갑자기 마주쳐서 90도 인사를 했다고 말했었다. 또는 회사 추계 야외모임에서 술을 먹고 임원의 험담을 했는데, 그 임원이 자기 뒤에 있는 것도 몰랐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팀 내 막말은 늘 있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내가 그의 타깃은 아니었다. 나도 그가 썩 내키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도 나를 겪으면서 내가 자기 성에 차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나는 어느새 그의 새로운 괴롭힘 타깃이 되어 있었다. 그가 나의 인사고과를 쥐고 있는 사람이기에 나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행위별 직장 내 괴롭힘 피해 경험 여부 및 빈도, 국가인권위원회>


그는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데도, 야근을 직간접적으로 종용했다.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면 사무실로 바로 복귀하는 법이 없었다. 근처 커피숍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태우고 수다를 떨었다. 때로는 당구를 치러 가거나 술을 마시고 복귀하곤 했다. 그렇게 6시에 나가면 8시 전에 돌아왔다. 그리고 2시간 동안 업무를 보는 듯하다가 10시가 되면 택시를 불러 퇴근을 했었다. 그리고 정당한 이유 없이 업무로 트집을 잡거나 내 의견을 무시하는 일이 잦았다. 특히 기안서를 올리면 작은 실수 하나라도 잡아서 반려를 주었다. 때로는 굳이 이유를 달지 않아도 다른 부서로 업무파악을 하라며 돌린 적도 있었다. 휴가를 내면 무엇 때문에 휴가를 쓰는지 불쾌한 질문과 답변이 달려오는 꼬리 질문으로 휴가 사용의 압력을 가했다. 미팅처럼 다른 사람이 보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창피나 망신을 주기도 했었다. 내가 참석하지 않은 미팅에서도 나를 깎아내리는 이야기가 내 귀에 들어왔다. 그는 고과와 승진에 있어서도 공정성과 형평성은 없었다. 그는 내게 전략적 승진 기획을 준비했다면서 나의 승진시험 기회를 다른 직원에게 양보시켰다. 나의 퍼포먼스 평가결과에 대해 답변을 요청하면 ‘야근을 많이 해야 승진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야근하지 않고 업무시간에 모든 업무를 소화하는 것이 더 생산성이 높은 것이 아니냐고 강변했지만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아이러니 한건 나의 한 달 야근 택시비가 못해도 20~30만 원은 넘게 나온 적이 많았다.

 

<행위별 직장 내 괴롭힘 피해 경험 여부 및 빈도, 국가인권위원회>


어느 늦은 밤, K팀장은 야근하는 나를 자기 책상을 불렀다. 그리고는 그가 당시 다니던 MBA 대학원 필기노트를 펼치며 내게 물었다. 대학은 어디냐? 학점은 얼마였냐? 회계는 좀 아냐? 부채비율은 아냐? 너무 치욕스러웠다. 그를 주먹으로 린치를 가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외벌이 가장이니까. 그는 내게 회계 강의를 했고, 나는 30분 동안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내 손은 무릎 위의 다이어리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지만, 손에서 시작된 분노의 떨림은 내 마음까지 강렬하게 흔들고 있었다. 다른 일도 있었다. 한 번은 백그라운 체크 대행사에서 K팀장에게 전화를 했다. 2년 전 퇴사한 J대리의 레퍼런스 체크 전화였다. 팀장은 거부했다. J대리가 자신에게 먼저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J대리는 속이 바짝 타들어갔는지 내게 연락해서 레퍼런스 체크를 부탁했다. 나는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오랜 실직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어렵게 잡은 기회임을 알기에 해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팀장이 내가 레퍼런스 체크를 해준 것을 알았는지, 그 이후에 그의 괴롭힘은 더해갔다. 그럴수록 나의 육체와 정신은 계속해서 좀 먹어 들어갔다.


<직장 내 괴롭힘 유형별 피해 경험률, 국가인권위원회>
<직장 내 괴롭힘 행위자 (중복응답), 국가인권위원회>



2019년 7월에 시행한 『직장 내 괴롭힘 금지, ‘해고예고 적용제외 사유 정비’ 등을 명시한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은 다음 세 가지를 전부 저질렀을 때로 판단한다.


(1) 사용자(회사)가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 실질적 관계의 우위(연령, 학벌, 성별, 출신, 인종 등)도 인정

(2)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 직접적 업무 이외에도 업무수행에 편승하거나 이를 빙자하여 발생한 경우도 인정

      - ‘적정 범위’란 사회적 통념에 비추어 볼 때 업무상 불요하거나, 행위 양태가 상당하지 않다고 인정되는 경우

(3)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정의

      - 행위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행위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아 근무환경이 악화된 경우

      -  행위자가 일부러 하지 않았다고 변명 또는 주장해도 통하지 않음.

 

<직장 내 괴롭힘 피해 경험에 대한 대처 (중복응답), 국가위원회>


만약,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하는 경우 사용자(회사)는 즉시 이를 조사하고 피해자의 희망에 따라 근무 장소 변경, 유급휴가 명령 등의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만약 이로 인해 신고자 또는 피해자가 해고 등의 불이익을 받는 경우, 사용자에게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


이와 같은 개념과 기준으로 보면 K팀장의 행동과 태도는 ‘직장 내 괴롭힘’이 맞다. 하지만 그때는 사회와 기업에서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인식, 개념/정의, 교육 및 법/제도 등이 미흡했었다. 그래서 피해자가 특별한 대처를 할 수 없었다. 나도 그랬다. 첫째, 처음에는 내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아직 모르는 나의 잘못이나 부족함이 K팀장에게 보였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그의 내부 트레이닝으로 여겼었다. 하지만 이는 행위자의 원인을 엉뚱하게도 피해자에게 찾는 꼴이었다. 둘째, 직장 내 고충처리 창구가 없었다. 그래서 어디의 누구한테 어떤 절차로 알려야 할지 몰랐다. 막연한 생각은 HR의 믿을 만한 사람에게 털어놓는 것이었지만 누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셋째, 업무상 또는 고용상 불이익을 생각했다. 따라서, 내가 대처 한들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고, 나만 불이익과 위험에 노출될 것 같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참고 또 참는 것뿐이었다.  


<직장 내 괴롭힘 피해 경험에 대해 특별히 대처하지 않은 이유 (중복응답 / 국가인권위원회>
<직장 내 괴롭힘의 영향: 건강, 국가인권위원회>


결국, 몸에 이상이 오고 말았다. 마음의 병이 몸으로 발현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갑작스러운 몸의 변화에 으레 이러다가 말겠거니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될 뿐, 나아지지 않았다. 병명을 찾으려고 전문병원과 대학병원을 오갔다. CT와 MRI를 찍고 여러 검사를 하면서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아내의 큰 눈을 보자니 겁이 덜컥 났었다. 내 몸이 아파서 겁이 난 것 아니었다. 혹여 예상치 못한 큰 병으로 가족에게 급작스러운 걱정과 재정적인 불안을 안겨줄까 봐 겁이 난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이 상황을 그대로 두면 안 된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아프지도 말고 돈도 벌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K팀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HR 중간관리자에게 찾아가 그간의 모든 사정을 말하고 부서이동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나중에는 HR 임원의 요청으로 별도 대화를 하기도 했다. 임원은 K팀장을 두둔하지 않았지만,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말했다. 또한 나를 지지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 문제를 흔히 있는 사소한 건으로 여기는 듯했다. 임원이 팀장에게 주의를 주었다는 말만 내 귓가에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점점 벼랑으로 내몰리는 기분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마지막 몸부림이라도 치고 싶었다. 결국, K팀장에게 1:1 대화를 요구했다. 아무도 우리를 못 보는 회의실에서, 나는 그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그동안 당한 모욕, 무시, 혐오, 차별, 불공정, 불이익을 차근차근히 말했다. 그리고 나는 팀장과 팀원들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도 않으니 나를 조용히 다른 부서로 보내달라고 했다. 그것이 내가 그에게 원하는 마지막 요구라고 했다.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부끄럽지 않고 싶었기에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용기 있게 말했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면서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의 말도 안 되는 구차한 해명을 듣고 있자니 맥이 풀리고 허탈했다. 내가 고작 이런 사람에게 그렇게 당했나 생각하니 나 스스로가 정말 한심하고 바보 같았다.

<직장 내 괴롭힘 피해 경험에 대한 대처의 효과 / 국가인권위원회>


그 후에도 나는 여전히 팀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뀐 것은 있었다. 예전 같은 괴롭힘은 많이 줄었고, 그가 내게 거리를 두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HR이나 팀장에게 추가적인 면담을 요청하지 않았고, 되도록이면 마찰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여전히 그의 밑에서 일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과거에 비해 나으니 버틸 수는 있었다. 그로부터 약 1년 후, 사내의 대대적인 조직변경이 있었고 K팀장은 팀장 타이틀을 내려놓고 타 부서로 이동하게 되었다. 나의 몸부림이 팀장을 떠나게 한 주된 요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영향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K팀장과 사이가 좋았던 몇몇 팀원들에게는 내가 세상에 나쁜 놈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내게 세상 악한 사람이었지만, 몇몇 팀원에게는 세상 선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때 모든 사람에게 선과 악 또는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존재하며, 그 경계에 회색지대가 있다고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왜 그와 그렇게 되었을까?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의 대처로 인하여 괴롭힘 행위자에게 발생한 결과, 국가인권위원회>
<주관적 피해자의 피해 유형별 직장 내 괴롭힘의 영향: 업무 및 관계 / 국가인권위원회>


 K팀장이 떠나고 새로운 팀장이 와서 새 출발을 했지만, 나에 대한 팀원들의 냉담한 반응은 무시할 수 없었다. 직접적인 괴롭힘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동료로서 느끼는 연대는 없었고 보이지 않은 따돌림을 느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 후인 어느 날 오후, 텅 빈 회의실에서 중요한 회의 준비를 하다가 익명의 문자를 받았다. 팀원들이 내 메일을 서로 포워딩하며 험담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한 숨을 크게 내쉬며 회의실 창문을 바라보니 붉은 해가 구름을 검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대형  창문에 바짝 다가가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면 생각했다. 이제 충분하다고. 정황상 알고 있던 사실을 이제 알았으니, 이제 충분하다고. 그 해 이미 두 번 쓰러졌기에 몸도 마음도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아내는 감사하게도 이해해주었다. 다음 날 팀장님에게 퇴사를 통보했다. 팀장님의 반려가 있었고, 인사팀장의 면담이 있었으나 나는 퇴사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리고 한 달 후에 나를 가장 싫어했던 여직원에게 내 사원증을 반납하며 잘 있으라는 인사를 뒤로 한 채 사무실을 미끄러지듯이 빠져나갔다.


<주관적 피해자의 피해 유형별 직장 내 괴롭힘의 영향: 이직 이유/ 국가인권위원회>


 어느 때와 같이 K팀장에게 괴롭힘을 당한 어느 새벽에,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잠에서 깼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나서 침대 시트가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옆에서 놀란 아내는 '왜 그러냐며, 무슨 일이냐며' 나를 안아주며 울었다. 그날 나는 사람을 죽이는 악몽을 꾸었던 것이다. 영화 '친구'의 유명한 장면처럼 사무실에서 K팀장에게 린치를 가한 후, 홀로 빌딩 옥상에 올라가 떨어져 자살하는 꿈이었다. 이러한 고통이 수년간 이어지면서 우울증을 겪었다. 많은 사람들이 붐벼서 옴짝 달짝 못하는 곳에 가거나, 만원 지하철 또는 만원 승강기를 타면 가슴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고 숨을 쉬지 못했다. (지금은 그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이제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것을 싫어한다.) 결국, 시력이 극도로 나빠졌고 난청과 어지러움이 더해지면 계속 회사를 다닐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서 상담심리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실제 1:1 상담심리를 받기도 했다. 또한 아무도 없는 늦은 밤에 무심히 흐르는 천(川)을 따라 달리면서 밤을 깨우기도 했다. 그런데 내 메일을 가지고 팀원들이 조리돌림 하고 있다고 해서, 내가 다시 누군가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일은 무용한 일이었다. 사실 이미 해봤기에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회사를 그만두고 우리 가족은 이사를 갔다. 새로운 곳에서 새 출발을 하고 싶었다. 다행히도 좋은 곳에서 정착할 수 있었다. 약간의 행운도 따랐다. 그곳에서 몸은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고 마음도 점점 예전의 건강한 나로 돌아왔다. 과거의 실패 속에서 경험한 교훈을 간직했지만 그렇다고 나를 애써 바꾸려 하지 않았다. 마치 흐르는 강물에 떠 가는 공처럼 나의 마음을 두다가도, 강물이 격랑에 휩싸일 것 같으면 공을 건져내 가방에 넣듯이 내 마음도 건져내어 내 안에 안전하게 두었다. 덕분에 좋은 직장을 구했다. 따뜻한 직원들의 환대 속에 지금까지 동료들과 함께 하고 있다. 아직까지 그들과 함께 하고 싶다.


 지금에 와서 이런 글을 쓰는 이유를 물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이 글을 통해 마지막 남은 내 상처가 치유될 것이고, 남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고 싶기 때문이다. 많은 작가와 철학가 그리고 여행가들은 글쓰기를 자기 치유로 삼아왔다. 소설가 김형경도 작가가 ‘사람 풍경'이란 에세이를 통해 자신을 치유했다. 또는 대중철학자 강신주는 어떤 강의에서 고통을 글로 말하는 순간, 그 고통은 내 것이 아니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런 글을 쓸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저 이때를 기다린 것뿐이었다. 그러나 오해는 마시길. 나를 괴롭힌 사람을 용서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그랬던 사정을 이해했을 뿐이다. 이해와 용서는 엄연히 다르다. 나를 위한 치유이면서 그들에게 해가 없기를 바라기에 전부 가명 및 이니셜 처리를 했다. 이제 모든 사정을 뒤로 한채, 나는 이제 앞으로 나아간다.



※ 커버 스토리 : 빈센트 반 고흐, The Starry Night, 1889; Saint-rémy-de-provence,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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