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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겸 Apr 24. 2022

인사팀입니다. 회사 출근 하세요.

재택이 끝났습니다.

1.

어제와 같은 하루가 오늘도 이어질 거라는 막연한 믿음 속에서 메일이 날아왔다. 인사팀이었다. 2년 간의 재택이 끝나고 출근명령을 알리는 짤막한 메일이었다. 문자를 무심히 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창문 밖 봄바람에 서걱거리는 나무들을 바라봤다.


"차르르르르".


봄볕에 반짝이며 출렁거리는 나뭇가지에 눈이 부셨다. 이제 이런 당연한 일상의 순간들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자못 속이 상했다.


이제 아침에 차를 마시면서 할 일을 메모하는 여유로움은 누릴지 못할 것이다. 대신에 시간에 쫓기며 내달리는 만원 버스와 지옥철 속에서 치이고 밀리며 울렁거릴 것이다.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할 겨를도 없이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 밖에서 줄을 서고 차례를 지켜야 할 것이다. 간결하고 짧았던 화상회의 대신에 릴레이로 진행되는 미팅의 파고 속에서 허우적 될 것이다. 저녁에 무슨 책을 읽을지 고민하며 책장 앞에 서성대기보다는 아침에 뭘 입어야 할지 고민하면서 핸드폰 화면 위로 엄지가 빠른 속으로 움직일 것이다. 그날 오후, 팀 전체 화상회의에서 팀장은 선홍빛 얼굴로 상기된 채 회사 복귀 명령을 공식화했다.

We have to go back to the office (SCREAM PARODY) / 22 minutes youtube


2.

코로나 팬데믹은 돈과 권력을 가진 의사결정자들로 하여금 과거에 실패로 간주되었던 것을 강제로 하게 했는데 그중에 하나가 재택근무 전환이었다.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실패로 간주했던 재택근무는 성공적이었다. 회사의 생산성을 향상했을 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생산성도 향상했다. 직원들의 향상성은 회사 업무에 머물지 않고 집 안팎으로 위로 뻗어나갔다.


출퇴근 러시아워 속에서 낭비됐던 에너지를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마음껏 분출할 수 있었다. 자녀의 등교 준비를 더욱 세심히 챙길 수 있었고, 아이의 하교 시간에 맞춰 학원차를 보낼 필요도 없었다. 저녁을 일찍 먹고 가족들과 함께 휘영청 둥근달을 바라보면서 산책을 했었고, 밀렸던 책을 차분히 곱씹을 수 있는 시간을 자적하게 누렸다.


그렇게 삶의 질이 올라가니 업무와의 균형도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당연히 생산성은 더 향상되었다. 앞으로 재택근무가 치명적인 전염병의 대규모 확산을 막는 즉각적인 도구로만 묻힐 이유는 없어 보였다. 이미 삶과 일의 균형에 최적의 도구라는 것을 입증했다.


국가 생산성 향상이라는 관점에서도 재택은 좋은 선택이다. 한 가지를 매달리는 것보다는 동시에 여러 실험적인 아이디어를 실패의 부담 없이 실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의 관리자와 임원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부려야 하는 직원이 한 장소에 있어 그들 통제하에 두는 것 만이 회사의 성장과 발전의(유일하지 않지만) 최고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직원들이 OTT 서비스를 보거나 유튜브 보면서 일을 한다고 못마땅해한다. 하지만 그 직원들이 팬데믹 이전에 달성했던 성과보다 높은 생산성을 올렸다는 사실에는 여전히 굳게 입을 닫고 있다. 단순히 일을 안 한다고 불만을 갖는 게 아니다. 그들은 직원들이 자기 사업을 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조차 주기 싫은 것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 혁신의 파고는 막을 수 없을 것 같다. 주 4일제가 서구의 몇몇 기업과 도시에서 성공적으로 증명되었고, 미국의 5 Big Tech 기업은 여전히 재택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애플 빼고. 애플은 전일 재택 제도를 없애고 순차적 회사 복귀를 명령했다. 복귀를 안 하면 아웃소싱 시킨다고) 일하는 사람을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인 미국의 기업들은 재능 있는 인력이 재택근무를 원할 경우 줄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변하고 있다. (퇴사하고 다른 곳으로 이직함)


사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 사회는 한 번도 체제와 경제의 현상 유지를 목표로 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과거보다 나은 향상을 원했다. 만약, 이전 정부만큼의 수준을 유지하겠다는 정치인이 있다면 아마도 당선될 확률은 바늘 속에 낙타가 통과할 확률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주 4일제나 재택근무 관해서는 바늘을 통과한 것 같다.


4.

재택근무를 하면서 부모의 역할이 나누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는데 회사 복귀는 흐릿한 경계에 선을 진하게 그릴 것이다. 공동의 보육가 아니라 상황에 따른 역할 보육으로 강제 당하는 것 같다. 나는 밖에서, 배우자는 안에서. 그것이 이미 최고는 커녕 최선의 방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배우자는 크게 실망을 하는 눈치다. 배우자의 재택근무가 나 못지않게 쏠쏠했던 배우자는 어렵게 다니던 회사를 그만둬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아이를 학교 끝나자마자 빈 집으로 향하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교하는 아이를 학원으로 뱅뱅 돌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 또한 어렸을 적에 목에 매달고 다니던 집 열쇠로 현관을 열고 집에 들어가면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이 익숙한 듯 낯설었다. 내 아이도 그렇게 두고 싶지는 않다.

Finance Yahoo.com

수변공원 너머 뒷산으로 불그레한 해가 뉘엿 넘아가고 땅거미가 서서히 깔리는 것을 보니 저녁이 오려나 보다. 아이를 재우고 나면 배우자와 함께 까칠한 목을 맥주의 홉으로 가라앉히며 도란대야 겠다. 그래도 일단 출근도 해야 하니까.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뾰족한 수가 솟아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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