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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겸 Oct 17. 2017

타인보다 민감한 그래서 더 특별한

대학 졸업을 1년 정도 앞둔 어느 시점에 처음 MBTI를 했었다. 당시 학부 동기들과 후배들이 직업 선택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덩달아 같이 해본 검사였다. 그때는 무슨 검사인지 아예 몰랐다. 그보다는 말 그대로 나의 성격과 그에 맞는 직업을 추천해준다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다. 전공을 심화로 이수하고 있었지만 전공을 살린 직업을 선택해야 할지 아니면 취업이 잘되는 직업을 선택해야 할지 한참 고민하던 시기여서 더욱 그랬다. 검사는 어렵지 않았고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한 며칠 지나고 나서 검사 결과를 받았다.


나는 ESTJ(사업가형)이었다.
 

대부분의 민감한 사람들은 내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내향적인 민감한 사람들의 MBTI의 첫 시작이 외향성(Extraversion)의 ‘E’가 아니라 내향성(Introversion)의 ‘I’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도 내성적인 민감한 사람이니 ‘I’로 시작해야 했다. 그런데 반대로 ‘E’로 시작하고 말았다. 성의 없이한 검사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오히려 취업에 도움이 된다는 말에 진지하고 솔직하게 진행한 검사였다. 그런데 왜 그런 유형이 나왔던 것일까? 그건 당시의 어린 내가 자기 자신을 자기기만이란 늪에 깊숙이 빠뜨렸기 때문이었다. 외향성과 非민감성이 빠른 취업을 위해 갖춰야 할 덕목으로 인정받는 경쟁사회 속에서 내향성을 드러내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니 무의식적으로 외향성을 지향할 수밖에. 당시의 나는 늪에서 나올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정말 스스로를 외향적이라고 믿었던 거짓을 진실인 양 탈바꿈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나는 취업할 수 있었다.

MBTI 성격유형 검사 - www.16personalities.com/ko

사실 내향성 보다 외향성이 주목받고 민감성을 불편으로 인식하는 구조에서 민감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각각의 성향을 고유한 특성으로 인식하지 않고 이분법적 논리로 좋고 나쁨을 평가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성적인 민감한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감정적이라 쉽게 화를 내고, 생각이 많아 말 수가 적고, 숫기가 없어 사교성이 떨어진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와 같은 사람들은 불편한 사람들이 아니다. 세상을 채우고 있는 4분의 3이 외향성과 非민감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보니 그들이 세상에 기준이 되어버려서 상대적으로 부당한 취급을 받는 것뿐이다. 4분의 1인 내향성과 민감성을 가진 사람들도 못지않게 충분히 긍정적이다. 단지 그들이 세상에 덜 알려졌거나 스스로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일 뿐이다.




군대에 있었을 때 일이다. 나는 대대 작전과에 행정지원병으로 군 복무를 하고 있었다. 그 당시 본부중대에 TO가 부족해서 일반 중대에서 한 명을 차출하여 지원을 보냈는데 그게 나였다. 작전과 선임들 중에는 정보병 보직의 최일병이 있었다. 그는 신촌 소재의 어느 명문대 출신으로 똑똑한 평가를 받아 아예 보직을 정보병으로 받고 사단 교육까지 이수하여 자대 배치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보다 한 살 어리지만 일 년 먼저 입대한 선임인 김상병이 있었다. 김상병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대를 한 사람으로 본부중대에 자대 배치를 받고 나서 정보병과를 받은 사람이었다. 내가 처음 작전과에 배속됐던 날에 김상병은 최일병을 크게 나무라고 있었다. 최일병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좋을 수 없었다. 짧은 머리에 뿔테 안경을 쓰고 부동자세로 혼나고 있는 그의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는 분노와 우울이 보였다. 언뜻 봐도 그 두 사람이 잘 어울리기는 힘든 일처럼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 부임하신 작전과장님의 배려 하에 본부중대 행정병들을 위한 회식이 간부 식당에 마련되었다.(나는 일반 중대 소속이었기에 참석할 수 없었다) 행정병의 노고를 위로하는 자리라 약간의 음주도 허락되었다. 한참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최일병이 벌떡 일어나 비틀거리는 몸으로 주사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는 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한 사람을 지목하며 그에 대한 욕과 원망을 거침없이 내뱉고 있었다. 회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은 적잖이 놀란 모습이었다. 어렵게 마련된 회식 자리에서 전혀 그러지 않을 것 같은 그가 보인 예상치 못한 행동에 모두 당황스러워했다. 그의 주사는 빠르게 수습되었지만 딱 한 사람 지목을 당한 김상병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민감한 사람들에게는 민감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넓은 반경의 큰 안테나를 가지고 있다. 그만큼 민감하지 않은 사람들이 잡아내지 못하는 자극을 민감한 사람들은 잡아낸다. 민감한 사람들은 긍정적인 자극을 받으면 민감하지 않은 사람보다 느끼는 행복이 배로 크다. 그래서 자신을 더 고무시키거나 성장시킬 수 있는 원동력을 얻는다. 그러나 문제는 부정적인 자극이다. 이 자극을 적절히 걸러내거나 다른 방향으로 인식을 전환시켜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감한 사람들은 부정적인 자극을 계속 받다 보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분노를 폭발시킬 수 있다. 그리고 나면 깊은 좌절과 슬픔에 빠져 버린다. 안타깝게도 민감한 사람들의 이러한 감정적 반응과 표현은 민감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사교적인 못한 것으로 비친다. 즉, 시의적절하지 못한 상황과 분위기에 터트리는 일종의 감정 폭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모임이나 회사에서 민감한 사람이 자신의 민감성을 억압하거나 자신의 주관적인 평가를 부정적으로 내는 사람에게 적절하지 못한 상황에 분노를 터트리는 장면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고 나면 항상 괴로운 사람은 민감한 사람뿐이었다. 일종의 낙인이 찍히기 때문이다. 원래 민감하니까 저러는 것이라 평가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민감한 사람들은 그런 대우와 취급을 받아도 참는 경향이 있다. 또한 민감한 사람은 이유를 불문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싫어한다. 상대방의 괴롭힘에 의해 폭발해버린 정당한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해한다. 수치심이 생기고 죄책감으로 이어진다. 만약 이런 일들이 계속된다면 민감한 사람은 고립되다가 결국 모임이나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다. 나 또한 그랬다.

그러나 민감한 사람이 자기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다스리지 못한다는 생각은 편견이다. 오히려 민감하지 않은 사람보다 자기감정을 잘 들여다보며 이해한다.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과정뿐만 아니라 결과에서 느끼는 여러 감정을 느낀다. 그런 감정 중에 깊은 인상을 준 것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고 내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민감한 사람이 일을 할 때 즉각적인 의사결정과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그런 행동을 취하기 전에 사건과 현상을 면밀히 관찰하고 분석한다. 그리고 행동이 야기하는 결과를 앞서 예측한다. 또한 발생 가능한 변수와 예기치 못한 리스크에 대해 신중히 고려한다. 또한, 일뿐만 아니라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팀의 리더가 민감한 사람이라면 의사결정을 독단적으로 내리지 않는다. 의사결정은 리더가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주변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그리고 그들과 대화할 때 상대방의 감정과 상황을 관찰하고 어떻게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어 나갈지 고민한다. 민감한 리더는 그 대화에서 자신이 놓쳤거나 간과했을 문제들을 그들로부터 발견하고 수정한다. 그래서 민감한 사람이 프로젝트 매니저가 되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경우에 성공하는 프로젝트를 많이 봐왔다. 그러나 흔한 일은 아니다. 민감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환경과 시간이 제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바쁘고 치열한 시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하루 8시간 정규 근로시간을 쉼 없이 일하는 것도 모자라 야근을 하는 상황에서 감정을 들여다볼 시간은 허락되지 않는다. 오히려 수많은 자극과 긴장 속에서 에너지를 다 소비하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오면 침대에 쓰러지기 일쑤다. 그래야 그다음 날 겨우 출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성적인 민감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수신 자극 안테나’ 덕분에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공감능력이다. 높은 공감 능력 때문에 민감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상대방의 감정을 직관적으로 잘 읽어낸다. 만약,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나 호감이 있는 상대방이 어려운 경우에 처해 고통을 받고 있다면 내 일처럼 생각하며 깊은 관심을 보인다. 정도에 따라서는 해결책을 같이 찾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또한 이들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한 원천적인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으려 애쓴다. 그래서 민감한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필요한 존재가 된다. 가끔, 극도로 민감한 사람들 중에는 공감 능력이 너무 과도하여 자신의 손해를 염두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타인의 행복에 관심을 쏟고 행동한다. 이런 사람들의 전형적인 예는 남부 수단 톤즈의 이태석 요한 신부, 알버트 슈바이처, 마더 테레사, 미국인 정일우 신부 등이 있다. 이 사람들은 세상의 1%로서 자신이 바라는 이상향을 위해 끓임 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이 들의 삶은 매우 명료하다. 진정한 사랑과 인간애로 타인의 삶을 돕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를 아끼지 않고 스스럼없이 내던진다. 1% 덕분에 99%의 세상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민감한 사람이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그러나 민감한 사람이 자신들의 공감 능력 때문에 마냥 행복해하는 것은 아니다. 공감 능력이 좋다는 말은 다른 의미에서 타인의 자극을 거르지 못하고 자동으로 수용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타인의 감정을 자신으로부터 멀리하지 못하고 자기 안에 담아둔다. 쉽게 말하면 다른 사람의 기분에 따라 울고 웃는다는 것이다. 특히 민감한 사람은 자신이 속해 있는 그룹과 그 구성원들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할 때 정신적인 에너지를 많이 소비한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직장 동료에게 닥친 과도한 업무에 자기감정을 쏟아내거나 직장 상사가 답답한 상황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면 그 분위기에 눌려 힘들어한다. 또는 친한 친구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면 불편한 긴장감을 참지 못하고 어떻게든 화해를 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가끔 극도로 높은 긴장감이 지속되면 이런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 무리한 해결책을 제안하기도 하는데 이는 매우 위험하다. 자칫 잘못하면 상대방이 자신을 쉬운 사람 또는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 방금 위에 언급했던 예를 확장시키면 이렇다. 긴장감을 피하기 위해서 직장 동료의 업무를 자진해서 떠맡고, 직장 상사의 감정적 쓰레받기를 자진한다. 또는 친구를 화해시키려고 뜻밖의 지출을 생각 없이 감행하기도 한다. 이런 행동이 반복되면 주변 사람들은 민감한 사람을 아무것도 부탁해도 들어줄 사람으로 각인하고 만다.

 



민감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관대해도 자기 자신에는 상당히 엄격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를 민감한 사람은 쉽게 용납하지 못한다. 민감하지 않은 사람이 같은 실수를 했다면 ‘뭐 그럴 수도 있지. 다음부터 잘하자’라고 가볍게 넘긴다면, 민감한 사람은 ‘같은 실수를 절대 반복해서는 안돼. 이번 실수는 이번 한 번 뿐이야’라고 스스로를 강력히 단속한다. 이런 성향 덕분에 민감한 사람은 성실성과 책임감은 거의 타고났다. 남들보다 배로 일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게 일하는 덕분에 자신이 맡은 분야에 두각을 나타낸다. 여기에 시간과 경험이 더해지면 두각을 멈추지 않고 전문인으로 높이 성장한다. 그래서 주변으로부터 존경과 부러움의 시선을 받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민감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엄격한 기준을 강요하며 쉬지 않고 부단히 노력하는 걸까? 그것은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다. 내향성을 가진 민감한 사람의 존재 자체로서는 외향성의 세상과 민감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부족하니 남들보다 더 노력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그 부족분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극도로 민감한 사람들은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게 구는 경우가 있는데,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신으로 돌릴 경우이다. 어떤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할 경우 구조적인 문제가 많은 부분을 차지함에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 버린다. 쉽게 말하면 내가 잘못해서 벌어진 결과라고 자책하는 것이다. 남 탓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사악한 사람들로부터 교묘히 이용당하기도 한다.




민감한 사람은 외부 자극에 대한 저항력을 키워야 한다. 자극에 민감하는 반응하는 수준을 매우 낮게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저항력을 키우면 과도한 자극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고, 모든 자극을 수용하지 않고 걸러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체적인 활동이 우선해야 하며 이에 따른 정신적인 훈련이 뒤따라야 한다. 나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퇴근을 하고 정자역에서 집까지(약 6킬로) 달리기를 했다. 온몸에 땀을 흘리고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를 들으며 뛰었는데 이는 긴장감에 식은땀이 흐르거나 가슴이 두근거릴 때 덜 민감해지는 효과를 보았다. 그렇게 운동을 한 날에는 자기 전에 간단한 명상과 호흡을 통해 마인드 컨트롤을 했었다. 코로 전해지는 들숨과 날숨을 느끼며 자연스럽게 호흡하다 보면 정리되지 않던 일상의 문제들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이렇게 민감한 사람은 혼자만의 시간을 필수로 가져야 한다. 회사 업무와 생활 여건상 자신만의 시간을 낼 수 없다면 가족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폭주기관차처럼 쉬지 않고 앞만 보고 내달리다가 결국 지쳐 쓰러지는 것이다. 지쳐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혼자만의 시간보다 더 오래 걸린다.

6.46 km running - Friday, Aug 12, 2016

신체적 활동과 정신적 훈련이 지속해서 자극에 대한 내성이 커지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선택적으로 거를 수 있으며 필요한 만큼 공감 능력을 발휘하여 적절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키울 수 있다. 또한 누군가 과도한 요구를 할 경우 침착하게 ‘아니요’라고 거절할 수 있는 의사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또한, 상황에 맞지 않은 급작스러운 분노를 폭발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할 수도 없고, 모든 책임을 떠맡을 이유가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물론, 거절을 하면 사람들이 떠나갈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곁에 남은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가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히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나는 나의 주변 사람들과 가깝지도 멀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고 과도한 요구를 당당히 거절했다. 내 핸드폰 주소록에 사람들이 지워질 때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여전히 남아있다.


또한 민감한 사람은 자신에게 못 박은 엄격한 기준을 내려놔야 한다. 그러한 기준에 맞춰 사는 것은 과도한 부담감에 허우적거리며 사는 것과 같다. 물론 왜 그러한 기준을 세웠는지 안다. 민감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받는 부정적인 평가에 취약하다. 부정적인 평가가 반복되면 낮은 자존감이 생겨나서 그 자존감을 보상받기 위해 높은 기준을 세우고 남들보다 배로 일하는 것이다. 하지만 평가 불안은 민감한 사람만 취약한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취약하다. 부정적인 평가를 반복해서 들으면 누구나 자존감이 낮아진다. 민감하기 때문에 자존감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과도한 기준도 과감히 버려야 한다. 오히려 민감한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자신의 본질에 맞는 기준을 세우고 실행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긍정적인 경험하게 되고 훌륭한 결과를 갖게 된다. 나도 그런 기준을 세우고 실행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사람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거나 타인의 기대를 완벽히 만족시키는 삶은 애초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나 자신을 긍정하고 인정할 때 모두가 나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완벽하지 않아도 언제나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은 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커진 자존감은 더 이상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나의 탓으로 돌리지 않게 해주었다.


하지만 민감한 사람들이 그들의 노력을 문제를 개선할 수는 있어도 정체성까지 바꿀 수는 없다. 수잔 케인의 저서 '콰이어트(Quiet / RH Korea)를 보면 이에 대한 명쾌한 내용이 나온다.


우리는 성격을 개조할 수 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까지다. 타고난 기질은 우리가 어떻게 살았든 간에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라는 존재의 상당한 부분은 유전자, 두뇌, 신경계에 따라 정해진다. 하지만 몇몇의 고 반응성 십대들에게에서 나타난 융통성은 이와 반대되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고 우리가 그것을 이용해 성격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의지는 우리를 상당히 멀리 데리고 갈 수는 있어도 유전적 한계를 넘어서까지 뭐 한대로 멀리 데려가 주지는 못한다. 빌 게이츠가 아무리 사교 기술을 갈고 닥 낸다고 해도 빌 클린턴이 될 수는 없고 피아노 클린턴이 혼자 컴퓨터를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해도 빌 게이츠가 될 수는 없다. (187 페이지)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결정하는 생리학적 한계가 있다는 점을 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능한 그 범위 내에서 행동을 조정하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행동해야 할까? (316 페이지)

솔직히 말해 그녀의 글을 통해 나는 맥이 탁 풀려 버렸다. 나의 민감성에 개선해야 할 부분을 훈련을 통해 수정해서 다시 거친 삶으로 나아가야 하는 건지 아니면 나의 민감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만의 삶을 개척해야 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무엇이 올바른 정답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을 두고 생각을 해보니 애초에 올바른 정답이라는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이것은 개인의 선택의 문제였다. 성격을 고쳐서 살든 생긴 대로 살든 말이다. 그래서 선택을 했다. 어떠한 선택을 했을 것 같은가? 간단하다. 고칠 건 고치고 남길 건 남기기로 했다. 나의 민감성을 무리해서 바꿀 만큼 내가 그리 못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민감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생각하기를 바란다. 세상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그 증거일 수도 있겠다. 나는 민감한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를 올바르게 인식하기를 바란다. 외상형과 非민감성 세상에 만들어 놓은 기준을 자신의 이상향과 목표로 세우지 않았으면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히 알고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 가기를 바란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회피하지 말고 당당히 직면하기를 바란다. 민감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면 영원히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마지막으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한다. 아무리 특별하다고 해도 사람은 혼자서 살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이 모든 말은 내가 나를 위해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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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ver Picture: Cover Design for Film Magazine, 1987 Fajr Film Festival Special Issue

                            / AYDIN AGHDASHLOO (이란 화가)

※ 사진 출처

    - Painting: Wikiar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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