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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겸 Oct 21. 2017

소설에만 루팡이 있는 건 아니라고~

추리 소설의 거장 모리스 르블랑(프랑스)의 대표 장편소설의 주인공인 아르센 뤼팽은 괴도(怪盜: 괴상한 도둑) 신사이다. 그는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영화의 최고급 정부 요원처럼 건물과 지붕을 가볍게 뛰고 날아다니는데 쉽게 다치는 법이 없다.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고 가명을 쓰면서 자신을 수도 없이 바꾼다. 그렇게 바뀐 역할을 완벽히 소화해 내는 일품 연기력도 가지고 있다. 그는 부자와 귀족들의 저택에 침입하여 값비싼 보석이나 예술품 등을 훔치고 그것으로 선량한 사람을 돕는다. 로빈후드 같은 의적이다.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의적이 있다면 얼마나 매력적일까? 하지만 없을 것이다. 소설에나 있을 법한 일이고 실제 뤼팽은 소설 속 주인공이다. 그런데 그와 전혀 다르지만 뤼팽의 이름을 비꼰듯이 달고 거침없이 회사를 종횡무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월급루팡'이라고 부른다. 회사에서 일은 하지 않고 월급만 매월 얌체같이 꼬박꼬박 받아가는 직원들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직장생활 13년 동안 가장 기억나는 월급루팡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아르센 뤼팽의 변신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1. 일은 하지 않고 맨날 자리 비우기 (ft. 자기 일 남에게 전가하기)


수년 전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바쁘게 일을 하고 있는데 팀장이 회의를 소집했다. 팀장은 회의실에 모인 팀원들에게 한 가지를 통보했는데, 갑자기 팀원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택 과장이란 사람이 우리 팀으로 전보를 온다는 것이다. 경력직으로 입사한 나는 한 번도 택 과장을 본 적은 없었다. 도대체 그가 누구길래 사람들 표정이 순식간에 썩어 들어간단 말인가? 너무 궁금해서 회의가 끝나자 한 팀원을 밖으로 불러 그가 누군지 조심스레 물었다. 그랬더니 한숨과 섞힌 긴 탄식을 쏟아내며 말해 주었다.


"회사에서 일 안 하기로 소문만 사람이에요.
하도 일을 안 해서 이 팀 저 팀 옮겨다닌 사람인데 인사팀도 반포기 했대요.
그런데 택 과장이 우리 팀장 동기예요.
아~ 진짜 일은 많고 사람은 부족한데 미치겠네요."

며칠 후에 그가 전보를 왔다. 들은 말이 있었기에 그에 대해 내심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웬걸? 같이 저녁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목소리도 좋고 유머도 있고 호탕하게 잘 웃고 사교성 끝내주는 이 사람이 설마 뒤에서 콩깍지나 까먹으면서 일을 안 하는 사람이라고? 그의 발령을 기다리는 동안 걱정하던 팀원들의 생각이 오버랩되었지만 말 그대로 소문이겠거니 생각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같이 가던 팀원도 자기도 오늘 보니 괜찮은 사람 같다며 자기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말도 했다.


"그렇죠?
우리가 너무 사람을
소문으로만 봤네요"

 하지만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우선, 그는 정시 출근을 잘 하지 않았다. 만약 팀장이 일이 있어 오전 반차를 쓰거나 장시간 오전 회의가 있다는 것을 알면 늦게 출근했다. 또는 팀장이 출장을 가거나 외출을 해서 사무실에 돌아오지 않을 경우, 정말 흔적도 남기지 않고 교묘히 조기 퇴근을 했다. 어떻게 몇 시에 나가는 것이 정말 궁금해 다른 팀원들은 그녀의 카드 출입기록을 확인해 보려고 한 적도 있었다. 두 번째로 그는 자리를 자주 비웠고 비우는 시간도 길었다. 그 앞으로 전화가 오면 다른 팀원이 전화를 돌려받은 후 그의 책상에 메모를 해줘야 했다. 같은 일도 한두 번이지 계속 반복되니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세 번째로 그는 능력은 좋은데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맡은 업무를 안 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팀장을 설득해서 정해진 업무 분장을 교묘하게 바꿔서 자신의 업무를 줄여 나갔다. 그 때문에 다른 팀원의 업무가 늘어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업무를 넘겨받은 몇몇 팀원이 참지 못하고 팀장에게 이의를 제기하자 택 과장이 팀장에게 했던 유명한 말이 있다.


"나 같은 고급 인력이 이런 일을 하라고?
그럼 회사가 너무 비용을 낭비하는 거 아냐?

출처 - 비지니스 플러스 (http://www.businessplus.kr)

그는 조리 있게 논리적으로 말을 너무 잘해서 계속 듣고 있다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 묘하게 설득이 되곤 했다. 또한 팀장이 사무실에 있는 경우나 전체 주간 회의를 하면 늘 업무에 바빠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를 개선시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팀장은 그의 말을 항상 들어주었다. 그가 팀장의 친한 동기이기 때문에 팀장은 항상 그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팀장 덕분에 승진도 하고 고과도 잘 받는 일이 생겼다. 이에 상대적인 박탈감을 어떤 팀원은 참지 못하고 더 좋은 곳을 찾아 회사를 떠났다. 다행히 그 팀원은 약간의 고생은 했지만 좋은 공기업에 다니고 있다. 물론, 택 과장도 지금 회사를 매우 잘 다니고 있다. 가끔 생각하면 택 과장이 똑똑하고 나머지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었나 싶다.



2. 야근도 안 하면서 회삿돈 쓰기


퇴근시간이 가까워지면 윤 팀장은 파티션 위로 머리를 불쑥 내밀고는 큰소리로 말하곤 했다.


저녁 먹을 사람?

그렇다. 야근을 하라는 말이다. 자신이 오늘 야근을 해야 하니 팀원들도 야근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에게 있어 팀원의 야근은 자신과 회사에 대한 충성도와 기여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팀원들은 자신들의 인사고과와 승진을 생각하면 야근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일부 팀원들은 편중된 업무분장으로 늘 일이 넘쳐나 야근을 안 할 수 없었지만, 그 외 팀원들은 윤 팀장 때문에 습관적인 야근을 하는 것 같았다. 어차피 칼퇴근해서 윤 팀장 눈 밖에 나는 게 좋을 것이 없으니 일과시간을 인터넷 서핑이나 동영상 강의를 들으면서 여유 있게 일하다가 저녁에 야근을 하고 가는 것이다. 업무 생산성이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반복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사회에서 상사 눈치와 야근 없는 직장생활은 애초에 있을 수 없으니까 말이다. 조금 냉정하게 말하면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부분인 것이다.


제발 이러지 말자


 그런데 윤 팀장은 정도가 매우 심했다. 야근을 위한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가면 좀처럼 사무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녁 6시에 나가면 밤 9시 언저리에 사무실로 돌아왔다. 어쩔 때는 9시를 넘길 때도 있었다. 그의 저녁 스케줄을 대충 이런 식이었다. 회사 구내식당이 아닌 외부 음식점으로 가서 저녁을 먹는다. 저녁을 먹고 나면 디저트라는 이름으로 커피숍에 간다. 테이크 아웃이 아니다. 테이블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면서 한참을 팀원들에게 학생주임처럼 잔소리를 하거나 교장 선생님처럼 연설을 한다. 그러다 얼추 할 이야기를 다 한 것 같으면 그제야 사무실로 돌아온다. 만약 이런 패턴이 지겨우면 팀원들을 데리고 당구장에 가서 짜장면을 시켜 먹고 당구를 치고 오기도 했다. 가끔 윤 팀장 기분에 따라 술을 먹고 올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는 거의 10시 정도에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제야 자리에 앉아 일과시간에 밀린 전자결재를 했다. 이마저도 없으면 핸드폰 게임을 하거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잡담을 했다. 그렇게 시간을 때우다가 밤 11시가 되면 야근 도장 찍고 택시를 타고 퇴근을 했다. 윤 팀장은 야근을 한다면서 저녁부터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지만 식대, 음료, 활동비, 교통비 등의 비용은 회사에 영수증 청구했다. 아무튼 그렇게 화끈한(?) 야근을 하고 11시 퇴근한 다음날 아침이면 가끔 지각을 했는데, 사무실에 오면서 그가 하는 말이 있었다.


미안, 어제 야근을 심하게 했더니
오늘 좀 늦게 일어났네.
내가 커피 쏘지 뭐.
 

3. 업무시간에 게임하기


 어렸을 때 오락실에 가보지 않은 남자는 없을 것이다. 8비트의 요란한 전자음을 내면서 현란하게 움직이는 전자화면은 당시 남자아이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만약 집이 조금 넉넉한 집의 아들이라면 오락실에 가지 않고 재믹스나 슈퍼 패미콤을 사서 집에서 게임을 즐겼을 것이다. 그러다가 퍼스널 컴퓨터가 널리 보급되면서 집집마다 사내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들까지 게임을 즐기기 시작했다. 나도 컴퓨터로 전략 게임 삼국지 3을 하면서 새벽빛을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삼국지 3은 삼국지 게임 시리즈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리즈였다. 그런데 그 삼국지 3가 나를 크게 난처하게 만드는 일이 있었다.


 첫 직장이었던 중소기업에서 한 두해 보내고 경력을 인정받아 중견기업으로 이직을 했었다. 예전보다 좋은 조건의 이직이었다. 연봉 말고도 나의 커리어 발전을 위해서 도움이 될만한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 나의 회사생활은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다. 만약 회사가 심각한 경영난과 재무건전성 문제로 법정관리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 회사를 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암튼 그런 직장생활에 나를 꽤 고달프게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구차장이었다. 나는 입사할 때는 새로운 팀원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을 많이 했었다. 팀에서 막내이기도 했기에 인사를 넙죽넙죽 하고 시키는 업무에 군소리 없이 일을 척척 했다. 부르는 술자리는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으며, 워크숍을 가면 내가 모든 액티비티를 전부 기획했다. 아마도 내가 주변에서 일을 잘 못한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서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던 것 같다. 팀장과 선배들도 그런 나를 잘 대해주셨고 나도 그것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구차장이 삼국지 3 게임을 하고 싶은데 구할 데가 없다는 하소연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심산에 내일 아침에 USB로 가져다주겠노라고 불쑥 말해 버렸다. 구차장의 표정이 금세 환해졌다. 다음날 아침에 삼국지 3 오리지널 버전 말고도 파워업 키드 버전도 같이 넣었다고 말하며 준비한 USB를 구차장에게 건네주었다. 그 날 이후, 그는 집에서 신나게 게임을 했던 것 같다.


일본 KOEI社의 삼국지3. 정말 엄마의 명품 스매쉬 등짝을 맞아가면서 한 게임이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회사는 조직개편을 했는데 당시 팀의 반이 다른 팀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구차장은 나의 파트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구차장의 파트원들은(나를 포함) 고난의 직장생활이 시작되었다. 파트장이라면 실무형 관리자급으로서 실무도 같이 하면서 팀원들에 대한 관리 업무도 해야 한다. 그러나 구 차장은 관리만 했다. 나머지 실무는 파트원들이 나눠서 해야 했다. 가뜩이나 벅찬 업무에 목이 헉헉 거리는데 구 차장의 업무까지 해야 하니 죽을 맛이었다. 구차장은 파트원들이 한 주 동안 처리한 업무를 보고하면 그것을 자기 방식으로 다듬어서 팀장에게 보고했다. 그게 그의 관리업무의 전부였다. 간혹 팀 내 다른 파트장과 사이가 틀어지면 사무실에 어두운 분위기가 드리워졌는데, 그럴 때마다 중간에 파트원들은 좌불안석이었다. 구차장의 짜증이 파트원에게 자주 튀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구 차장의 사무실 자리는 대형 창문을 등지고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직접 보지 않으면 무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주간 업무보고서를 작성하는 그가 나를 부르기에 그의 자리로 갔는데, 그의 컴퓨터 작업표시줄에 삼국지 3 윈도우 작업창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이 이야기를 다른 파트원들에 하니 나만 본 것이 아니었다. 다른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거의 매일 일과시간에 삼국지 3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파트원 중에 한 명은 내가 삼국지 3을 가져다줘서 이런 불상사가 생겼다는 원망의 한소리를 내게 농담하듯이 늘어놓기도 했다. 그가 그럴 줄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가끔 새로운 삼국지 시리즈가 발매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면 구 차장 생각이 나며 웃음이 난다. 지금도  천하통일을 위해 열심히 마우스를 클릭하고 있을 것 같다.


-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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