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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겸 Nov 13. 2017

인간적인, 말할 수 없이 인간적인

  수년 전의 일이다. 나는 어느 대기업의 구매 본부에 운 좋게 입사를 했었다. 내가 입사할 당시 회사는 조직개편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였었다. 알고 보니 회사는 계속된 영업 적자에 대한 돌파구로 대대적인 조직개편에 나섰다고 했다. 으레 조직개편이 일어나면 어수선해지기 마련이다. 사업부가 많은 대기업은 오죽하겠는가? 본래 사업부에 소속된 부서들이 쪼개지거나 합병되고, 어떨 때는 한 개 부서가 타 사업부로 통째 이동하기도 한다.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채용될 수 있었던 것도 이 어수선한 상황에 발생한 예기치 않은 공석 덕분이었다.

포스코 조직개편 (2010년, 경북제일신보)

  일반적으로 조직개편이 발생하면 임원과 팀장의 교체나 이동이 일어난다. 내가 입사하기 전에 부임했다는 구매 본부 홍 상무도 그런 연유로 임원이 된 사람이었다. 그는 임원치고는 키가 작고 약간 왜소한 체형을 가지고 있어 불안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회의나 사업부 전체 회의에 참석할 때면 은색 무테안경을 쓰곤 했는데, 안경 너머로 느껴지는 압도감과 안정감이 꽤 묵직했다. 또한 그는 어떤 주제도 가볍게 흘리지 못하게 하는 진중한 목소리 톤과 빠르기를 가지고 있어 상대방이 경청하여지도록 하는 능력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가 부임한 이후로 구매 본부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제법 빠르게 정리하고 안정을 찾아갔었다.

 그러나 홍 상무의 안정된 리더십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불편한 기색을 크게 드러내지 못해도 숨기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외주관리팀의 문 팀장이었다. 구내식당에서 구매기획팀 동료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이랬다. 그 동료는 홍 상무가 매주 금요일에 주관하는 팀장 회의에 기록담당으로 참석해서 대부분 내용을 듣고 기록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문 팀장이 홍 상무의 의사결정이나 지시내용을 거역은 못 해도 흠집을 내거나 부정적인 의견을 자주 했었고, 처음에는 홍 상무도 합리적인 의견 개진으로 생각해서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으나 계속 반복되니 문 팀장을 제외한 모두가 불편한 모습이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홍 상무는 화를 내지 않고 그를 잘 다독이거나 설득해서 회의를 마무리했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은 나와 동료들은 문 팀장의 무익한 행동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고 말을 보탰다. 한 동료는 조만간 문 팀장이 이직할 것 같다고 했고, 다른 동료는 타 사업부로 전보 통지를 미리 받은 것이 아니냐고 했으며, 또 다른 동료는 문 팀장이 사표를 내고 중국에 진출한 협력업체 고문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더랬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왜 홍 상무를 미워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의 얄팍한 추리와 편견으로는 그저 그가 자신보다 어린 임원을 보고 속된 말로 배알이 꼴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웹툰 '송곳'

  그러던 어느 날 기어코 일이 터지고 말았다. 옆 부서 사람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외주관리팀에서 계약한 아웃소싱 업체에서 납품한 제품에서 품질 문제가 발생했는데, 이에 대한 사전 대비책도 마련하지 못해서 결국 납품 지연으로 이어졌고, 이는 또다시 판매 이익에 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한다. 평소 조용하던 홍 상무 집무실에서 노발대발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구매 본부 모든 사람의 눈은 모니터를 보고 있었지만, 귀는 집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시절에 구매하다 보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보니 사고를 빨리 수습하고 난 후 약간의 징계를 받는 것으로 마무리되기도 했다. 물론 사고를 얼마나 빨리 수습하느냐에 따라 징계 수준이 달라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수습이 거의 완벽하면 경위서 정도이고, 수습에도 불구하고 손해가 발생했다면 약간의 감봉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위서도 아니고 감봉의 수준도 아니었다. 해당 사고가 사업부장에게 보고가 되었고 홍 상무는 호출을 받고 불려 가서 호된 질책과 경고를 받고 말았다. 내부적으로 원만하게 봉합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결국, 문 팀장은 외주관리팀장에서 불명예스럽게 물러나고 말았다.


  외주관리팀의 선임 파트장이 새로운 팀장이 되었다. 문 팀장은 더 외주관리팀에 있을 수가 없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자신에게 결재를 올리는 사람에게 자신이 결재를 올려야 하는 상황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그는 결국 개발구매팀에 팀원으로 가고 말았다. 처음에는 개발구매팀 사람들은 그의 축 처진 뒷모습이 안쓰러워 그를 위로했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버거워했다. 문 팀장은 구매 본부에 가장 많은 나이와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 팀장이나 선임 파트장이 팀원으로 그를 대할 수 있겠는가? 처음에는 그의 딱한 상황을 이해하고 수긍했지만, 이제는 부족한 TO를 깔고 뭉개고 있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알게 모르게 눈엣가시가 된 것이었다. 개발구매팀장이 보다 못해 홍 상무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홍 상무도 딱히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구매 본부 내 다른 부서들도 그를 원치 않았고 타 사업부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문 팀장은 버틸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그 상황에도 그를 버티게 하는 마지막 힘이 아니었나 싶다.

웹툰 '미생'

  그로부터 수개월 후, 사무실에는 회사가 또다시 조직개편을 할 것이라는 소리가 들려왔었다. 사람들은 지난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정도의 개편이라 여겼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내가 속한 사업본부 전체가 아주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사업본부 내 3개 사업이 정리되었다. 그로 인해 구매 본부의 규모와 인력 도정리 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 정도가 되니 사람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정리가 된다고 해서 해고를 당하는 게 아니다. 잘못하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타 사업본부의 타 부서로 쫓겨나듯 보내지게 된다. 임원과 팀장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이다. 그저 멀뚱멀뚱 있다가 자기 자리가 사라지는 것을 볼 수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게 단단한 동아줄인지 썩은 동아줄인지는 나중에 알게 되지만 일단 줄이라도 내려오면 서로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당시 나에게 무슨 줄이 있었겠는가? 상시 경력 채용으로 입사한 지 1년 채 안 되는 시점이었는데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내 의사와 상관은 없지만 보내질 곳은 있었다. 그러나 문 팀장은 그렇지 못했다. 앞서 말한 이유로 누구도 그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곳은 없었다.


  사업부를 떠나는 사람은 자기 책상을 정리하고 이사 박스에 짐을 꾸렸었다. 그리고 그 박스 위에 새로이 출근하는 부서의 이름을 크게 적어두었다. 그렇게 하면 그 짐이 다음 주에 새로운 책상에 놓일 것이었다. 짐 정리가 마무리되자 남겨진 사람들과 떠나는 사람들은 마지막 술 한잔으로 진짜 마무리를 하기로 했다. 회사 근처의 고깃집에 삼겹살이 익어가고 사람들이 술에 익어갈 즈음에 슬며시 문 팀장 이야기가 나왔다. 사람들이 전해 들은 바로는 다행히 그는 타 사업부의 지원부서로 발령을 받았다고 했다. 그곳은 시설 관련 지원 부서라서 예전과 같은 압박은 없을 거라고 했다. 사람들은 그로서는 나쁘지 않은 제안인 것 같다고 말도 덧붙였다. 그런데 그의 발령이 성사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이 다름 아닌 홍 상무라는 말이 나왔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홍 상무가 문 팀장의 보직 해임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느끼고 그에게 호의를 베푼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곧 그 두 사람의 관계가 내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 두 사람은 내 생각과 다르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인간적인 관계였다. 오래전에 문 팀장은 홍 상무의 담당 사수였다고 했다. 그러니까 홍 상무는 문 팀장의 부사수였다.

웹툽 '미생'

  수평적인 기업문화를 지향하는 요즘은 사수와 부사수의 개념이 희박하지만 한번 직장이 평생직장으로 여겨지던 시절에는 상명하복의 군대 문화를 그대로 이어받았던 수직적인 기업문화가 태반이었다. 그 시절 사수와 부사수의 관계는 단순한 직장 선후배 사이를 뛰어넘는 관계였다. 쉽게 말해 장인과 도제 또는 스승과 제자 같은 관계였다. 스승과 제자가 오랜 기간 정진하며 같은 곳을 향했다면 둘 사이에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는 정 같은 것이 각자 마음속에 스며들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곳에 있었다면 서로를 응원하는 관계로 남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의 얄궂은 장난으로 과거와 뒤바뀐 위치로 다시 만난 것이었다. 그렇게 만났을 때 문 팀장의 어떤 심정이었을까? 나는 그가 아니기에 어떠한 심정을 느꼈는지 절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간의 행동을 보고 미루어 짐작해보면 수치심과 겁이 나지 않았을까? 시간이 흘러 사수는 만년 팀장이 되었고, 부사수는 사수를 뛰어넘고 임원이 되었다. 문 팀장은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은 열심히 살아서 이만큼 왔는데 돌연 잘못 산 것 같은 수치심과 앞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겁이 났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누구라도 문 팀장보다 더 마음을 추스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단박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좋은 것으로 수용하는 것이 인간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과연 뼛속까지 아무렇지도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오히려 화를 내고 슬퍼하고 짜증을 내고 탄식을 하는 것이 인간답지 않은가? 그리고 인간은 그런 고통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기에 더욱 성숙한 인간으로 발돋음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문 팀장이 너무나 인간적이지 않았나 싶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자신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주변과 우리 자신에게 증명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주변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는 고통만큼이나 우리 스스로 의심이 들 때 불안을 느낀다. 문 팀장도 아마 그랬지 않았을까? 그는 신이 아니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것도 인간적인, 말할 수 없이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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