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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겸 May 04. 2019

부모의 역할을 말하다.

평일 아침 9시 즈음이면 어김없이 핸드폰으로 아내의 문자가 온다. 아내는 딸아이를 등원시키고 나면 이렇게 문자를 보낸다. 그리고 가끔씩 딸의 등원 모습이 담긴 사진이나 동영상을 같이 첨부해서 보내기도 한다. 5인치의 LED 화면으로 딸의 등원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시나브로 엷게 퍼진다. 세상에 태어나 내 품에 안겨 첫인사를 하던 아이가 벌써 이렇게 컸다. 간혹 야근으로 집에 늦게 오는 때면 아이는 이미 쌔근거리며 자고 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아이 옆에 앉고는 오른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슬며시 보담듯이 넘겨준다. 이 순간이 내게는 신비롭고 기적 같다. 부모가 되었다는 것이 신기롭다. 더 놀라운 것은 한 번 더 느껴본 적 없고 경험한 적 없는 지고지순한 사랑이 내 모든 곳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를 바라보기만 했을 뿐인데 말이다. 하지만 부모가 된다는 것은 녹록한 것만 아니다. 자식이 내게 주는 기쁨과 행복만큼이나 부모로서 겪어야 하는 변화는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

<등원길에 만난 고양이, "아 닝겐. 나의 늦잠을 방해하지마.">


아내는 아이를 뱃속에 있을 때도, 아이를 출산할 때도, 아이를 양육할 때도 고생을 참 많이 했다. 뱃속에 있을 때 배뭉침이 심해서 입원을 한 적이 있었고, 출산할 때는 자연분만이 어려워 제왕절개를 했다. 그때 제왕절개로 인해 몸이 퉁퉁 부은 아내가 너무나 안쓰러워서 원래 예약했던 회복실에서 가장 좋은 회복실로 변경 예약을 했다. 그 당시 비용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를 양육할 때도 아내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딸아이는 두 시간마다 밥을 달라고 울어댔다. 나와 아내가 번갈아 가면서 (유축기로 미리 준비한) 모유를 아이에게 먹였지만, 출근해야 하는 나를 위해 아내가 더 많은 수고를 한 것은 사실이었다. 먹는 시간이 4시간 간격으로 되었을 때 조금 살만한 듯했지만, 아이가 감기나 모세기관지염에 걸려서 열이 펄펄 나는 날이면 아내는 모든 시간을 온전히 아이에게 쏟아야 했다. 아내는 24시간 내내 오직 아이와 함께 였고, 어느 누구도 내가 오기 전까지는 그녀가 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을 하다 못해 3시간 편히 자는 시간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내는 신체적으로도 고생을 많이 했다. 출산 후 갑상선에 기능 저하증이 왔다. 그래서 몸이 쉽게 붓고 많이 피곤해했다. 추위를 자주 느꼈고 잠을 잘 못 잤다. 정기적으로 종합병원의 내분비과를 방문해서 진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면서 점점 나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치가 되는 때 까지는 근 2년이 걸렸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병원에 같이 가는 것뿐이었다.

<아내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인지 이때 알았다>

또 다른 신체적 고생은 탈모였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딸아이는 잠을 잘 때 항상 엄마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손에 꼭 쥐고 자는 버릇이 있었다. 처음에는 쥐고 있기만 했지만 나중에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잠이 들었다. 아내는 아이가 잠이 들었다고 생각해서 내줬던 머리카락을 수습하면서 일어나면 아이는 기가 막히게 그것을 알고 잠을 깨고 울었다. 그 말인 즉 아내는 꼼짝할 수 없이 아이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것을 버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모든 스트레스의 총합을 결국 신체가 버틸 수 없었는지 아내에게 부분 탈모가 오고 말았다. 아내는 크게 실망하고 겁을 먹었다. 만약 머리카락이 나지 않고 이대로 평생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한 것이었다. 이 또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맥주효모와 우유를 1:2 비율로 섞은 음료를 만들어 주는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아내는 한 번도 아이에게 소리를 버럭 지르거나 아이 탓을 한 적이 없다. 간혹 정말 힘들 때 "좀!"이라는 단말마와 함께 짜증이 부리기도 했지만 아이가 엄마에게 한 짓들(?)에 비하면 그리 문젯거리가 되지도 않았다. 솔직히 아이를 보는 것보다 회사를 나가는 것이 더 나은 편에 속했다. 왜냐면 나는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집과 회사를 오가면서 변화된 환경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하나에 종일 매달려서 오는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산후우울증에 걸릴까 나는 늘 노심초사했었다. 다행히 내가 생각했던 것 그 이상으로 아내는 잘 버텨 주었다.


나도 아내 못지않게 고생을 많이 했다. 아내의 상황이 저러하니 아이 육아를 제외한 식사/장보기, 빨래 널기/켜기, 청소/정돈, 쓰레기/분리수거 등의 모든 일은 전부 나의 몫이었다. 이 모든 일이 끝나면 아내의 휴식을 위해 아이 돌봄까지 해야 했다. 그리고 아내가 적어도 3시간 이상 수면을 해주기 위해 새벽까지 잠을 미룬 적도 많았다. 늘 잠이 부족하니 회사의 생산성이 떨어질까 걱정도 했었다. 왜냐하면 매일 정시 퇴근을 하는 탓에 팀장의 눈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팀장의 갖은 해코지에 심한 고생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아내를 한시라도 빨리 도우려면 정시퇴근을 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아침에 조금 더 일찍 출근하거나 점심시간을 쪼개서 일을 했었다. 그럼에도 나는 예전처럼 아내 앞에서 회사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토로할 수 없었다. 아내가 배뭉침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나도 모르게 하소연을 했었다. 그때 아내가 나를 바라보는 얼굴을 보고 난 이후로는 아내 앞에서 어떠한 불평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게다가 아내가 자기 몸이 망가져 가며 아이 육아에 전념하고 있는데 내가 힘들다고 토로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에는 아내에게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하는 나였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결국 회사에서 몸과 마음이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집으로 가서 몸을 쓰고 마음을 달래지 못하다 보니 2017년 1월 집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3월에 출근길에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어지럼을 느끼고 쓰러졌다.


  내가 회사를 그만 두자 아내는 일자리를 구했고, 우리는 아내가 일하는 직장 근처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내가 다시 직장을 구하는 1년 동안 딸아이의 육아는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나의 독박 육아 첫날, 나는 퇴근하고 집으로 오고 있는 아내에게 문자를 보내 '소주 1병'을 사달라고 부탁했다. 과거 아내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때는 아내의 요청이 측은함만 느껴졌을 뿐 진실로 왜 그런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14시간 가까이 아이와 함께 있다 보니 그 이유를 머리보다는 마음과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아내가 사다준 소주 1병에 감격해하는 나를 보고 웃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하다. 또 어느 여름날의 오후에 아이가 갑자기 열이 39.4도까지 치솟은 적이 있었다. 문화센터를 다녀온 후에 미열이 있어 지켜보고 있었던 와중이었다.

<39.4 도인데 빨갛게 뜨지 않는거냐?>

혹시 나 혼자 병원에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리 싸놓은 가방을 메고 양손으로는 아이를 안고 주차장까지 뛰어갔다. 그리고 차로 15~20분 걸리는 종합병원 소아응급실로 차를 빠르게 몰았다. 아내에게 간단히 문자를 보내자 아내는 회사 교육 중에 나와서 병원으로 오겠노라 했지만, 나는 그렇지 말라고 부탁했다. 아내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나도 아내에게 똑같이 배려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아빠니까 응당 아이를 책임지고 보살피고 싶었다. 소아응급실에 도착해서 수납을 하고 대기실에서 진료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데 온 몸이 불덩이처럼 뜨겁다고 느껴졌다. 출발하기 전에 먹은 해열제가 효과가 없을 정도로 아픈 걸까 마음속으로 걱정이 일기 시작했다. 마침내 아이를 응급실에 데려가는데 아이가 기겁을 하며 운다. 다시 아이를 겨우 겨우 달래고 진찰을 받았는데 병명이 요즘 유행하는 구내염이다. 응급실에 침대를 배정받았다. 나는 기저귀만 빼고 옷을 전부 벗기고 미지근한 물수건으로 아이 열을 달랬다. 그 사이에 약도 먹고 주사도 맞았다. 그 여린 딸아이의 손에 굵은 조사 바늘이 들어가는 것을 보니 미간과 함께 마음도 찌뿌러졌었다. 어서 빨리 나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내가 침대 옆에 앉아 아이를 바라보며 가슴을 졸이는 와중에 딸은 실컷 뽀로로 영상을 보며 싱글벙글했다. 마침내 열이 떨어지자 그날 저녁에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도 피곤했는지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잠이 들고 말았다. 그래도 해열제와 약을 교차로 먹어야 했기에 다시 깨워 먹이고 침대에 눕혔다. 그제야 안방 화장대에 비친 나의 얼굴과 몸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와 얼굴에 땀이 절어서 소금기가 보일 듯했고 옷도 땀에 젖어서 몸에 철썩 달라붙어 있었다. 어찌나 땀냄새가 나던지 그때 그 냄새를 여전히 잊을 수 없다. 아내가 퇴근 후 내 몰골을 보자 우리는 둘 다 울듯하며 웃었고 서로의 수고와 배려에 감사하고 격려했다. 우리는 그렇게 부모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이를 재우고 나서 마시는 맥주는 꿀존맛!>


그렇게 부모가 되어가면서 부모 역할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였고, 그중에 크게 세 가지가 바뀌었다.


첫째, 전통적인 부모 역할의 구분을 거부하기로 했다. 

남편의 역할과 영역이 바깥일에 있고, 아내의 그것들이 집안에 있다는 생각을 버렸다. 나는 남자로 태어나서 결혼하기 전까지 남성과 여성의 역할과 영역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고 교육을 받았다. 경제, 사회, 문화, 관습적인 면에서 직간접적으로 교육을 받았는데, 실제 부모가 되어 보니 반드시 그것을 꼭 따를 필요가 없다고 결론짓게 되었다. 남자라서 또는 여자라서 응당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개인의 성격, 장단점 및 특성에 맞게 더 잘하는 것이 있으면 더 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나는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고 잘한다. 요리도 하나의 창작의 결과물이고 나는 그 과정을 즐긴다. 그래서 내가 집에서 요리를 한다. 아내와 딸이 내가 만든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을 보면 더 행복하다. 반면에 아내는 요리에 취미도 없고 못한다. 그보다 설거지다 낫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요리보다 설거지가 싫다. 그래서 내가 요리하면 아내가 설거지한다. 그게 효율적이다. 또 우리가 여행을 가게 되면 모든 여행의 계획과 짐은 아내의 몫이 된다. 아내가 계획을 짜고 짐을 꾸리고 여행을 가는 모든 과정을 즐긴다. 이건 내가 잘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나는 운전만 하면 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게 되자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부모로서 함께 할 수 있었고, 부모의 역할을 더욱더 확장시킬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정하고 나눌 것인가는 순전히 우리 부부의 몫이었다. 우리의 주변의 시선이나 판단이 아니고 말이다.


둘째, 집안일을 허드렛일이라 여기지 않기로 했다. 

남편이 바깥일을 하면서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반면, 아내는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집안일이 자칫 바깥일보다 가치가 못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쉽게 아내에게 상처 줄 수 있는 말이 "집에서 하는 일이 뭐냐? 청소 빨래가 뭐 그리 힘드냐? 바깥일이 더 힘들다. 너만 힘드냐?" 등의 말이었다. 그러나 집안일이 돌아가지 않으면 바깥일도 멈추게 되어 있다. 집안일이 안정하게 돌아가야 바깥일이 그 바탕 위에 더 많은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김승호 사장의 최근 저서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에 보면 배우자에 대한 다음 내용이 나온다.


"배우자는 사업가의 실제적 동반자다. 배우자는 자신이 사업을 하는 동안 가정에서 빈자리를 이끌고 실질적 조언을 주는 이다. 위험을 묵히는 배짱으로 지원하거나 적극적인 지지로 사업을 함께 하는 동업자다. 그들이 없었다면 당신의 사업도 없었다. 그럼에도 사업가의 배우자를 성공에 묻어가는 무상혜택 수혜자처럼 대한다."


1년 동안 나와 아내의 역할이 바뀌면서 식사/장보기, 빨래 널기/켜기, 청소/정돈, 쓰레기/분리수거 등의 모든 집안일은 허드렛일이 아니었다. 실제 내가 해보니 바깥일 하는 만큼이나 힘들었다. 예를 들어 사무실에서 보고서나 기안서를 쓸 때만큼 식사와 장을 보는데 머리를 쓸 것이라고는 생각을 잘 못했다. 하지만 정해진 예산 안에 일주일치의 식단을 짜고 그에 맞게 구매하고 그 내용을 가계부에 정리하는 것은 내가 회사에서 사업 예산 안에 재화/용역의 계약을 하기 위해 기안서를 작성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회사 일은 남의 사업이고 집안일은 나의 사업이었다. 무엇을 더 꼼꼼하게 하겠는가? 해보지 않으면 몰랐던 것이지 집안일의 가치를 결코 폄하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셋째, 부모는 아이의 친구이자 버팀목이다.

아내는 딸이 태어나서 자신의 가슴 위에 놓인 순간부터 아이의 사랑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아니, 자신의 몸속에서 생명이 꿈틀거리는 꼬물이 시절부터 사랑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아내처럼 아이와 직접 연결되는 뭔가가 부족했는지 사랑이 아내처럼 오지 못했다. 그저 아이의 아빠니까 책임을 다해야지 라는 사명감이 먼저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한 1년 덕분에 나는 아이에 대한 사랑이 아내의 그것보다 모자라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나는 지난 1년 동안 딸과 내가 함께한 모든 에피소드를 사진과 동영상으로 기록해 두었다. 대단하지 않지만 크고 작은 우리 둘만의 소소한 추억들이 담긴 사진과 영상을 가끔씩 딸과 함께 볼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딸은 나를 가장 친한 친구라고 부른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아빠로서 이보다 더한 찬사가 있나 싶다.

그 모든 에피소드에는 내가 아이에게 대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나는 안전에 대한 것을 빼고는 아이가 하는 모든 활동을 간섭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이가 도덕과 예절에 대한 인식보다 본능의 추구가 더 자연스러운 시기에 아이가 벽 또는 베란다 창에 크레파스질을 해도 절대 뭐라고 하지 않았다. 한 번은 집에 왔는데 아이가 내 개인 책장에 온갖 그림칠을 하는 것을 발견했는데 혼내지 않았다. 만약 내가 그것을 보고 혼내거나 다그친다면 아이는 움추러 들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아이의 신체적, 인지적, 정서적 발달이 커가고 ,말을 하기 시작하고, 어린이 집에서 사회적 관계에 대한 욕구가 커지는 것을 보면서 그림을 도화지에서만 그리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가르쳤음) 이 시기부터 아이의 본격적인 훈육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훈육을 할 때도 아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자지 않겠다고 떼를 부리고 말을 안 들으면 나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딸. 그래 좋아 자고 싶지 않고 놀고 싶으면 놀아. 그런데 엄마와 아빠는 이제 불 끄고 잘 거야. 자고 싶으면 여기서 자고 놀고 싶으면 나가서 혼자 놀아. 어떻게 할래? 네가 선택해."

<세이펜. 렛츠 스타트! 세이펜 배고파요 밥주세요!>

대부분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이는 억울한 표정을 짓기는 하지만 결국 자기가 더 좋은 것을 선택한다. 하지만 이렇게 말했는데 아이가 더 놀겠다고 하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했다. 일관성 있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래야 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나중에 커서 부모가 무슨 제안이나 의견을 해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번은 진짜 아이가 자지 않고 거실에서 혼자 "Saypen"을 가지고 몇 권의 책을 더 보고 온 적도 있었다. 물론, 나도 아이가 크게 잘못하면 그만큼 크게 혼을 낸다. 회초리 등의 체벌을 절대 가하지 않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얼굴로 아이를 혼내는 것이다. 아이에게는 큰 협박이나 다름없지만 아이가 부모를 권위적으로 보지 않을 경우에는 한번 그 기를 꺾어준다. 아이의 수면 교육도 그렇게 해서 바로 잡았다. (아이의 수면교육에 대해서는 따로 쓰기로 하겠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아이가 잘못할 때 그 잘못이 뭔가 더 잘하려고 했다거나 혹은 잘 몰라서 하는 실수 같은 경우는 혼내기보다 왜 그랬는지 감정을 잘 보담아 주려고 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부엌에서 엄마를 돕겠다고 하다가 물을 바닥에 크게 쏟았는데 이미 아이의 얼굴을 보니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아는 표정이었다. 그때 아내와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괜찮아. 우리 OO가 엄마 도와주려고 했는데 실수를 한 거구나. 그리고 네가 뭘 잘못한 것을 아는 것 같으니 혼내지 않을게. 대신 같이 치우자."


우리가 이렇게 양육하는 것은 아이가 자아현실감, 자아존중감, 자아통제감을 갖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가 하는 모든 것에 우리는 간섭하지 않고 신뢰하면서 뒤에서 든든한 버팀목 같은 배경이 되어주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말자. 우리가 이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가 완벽하게 이상적인 부모는 절대 아니다. 나는 그저 내 부모가 내게 했던 그들의 실수를 통해서 내가 배운 것을 그대로 했을 뿐이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셨지만 나를 믿지는 못하셨던 것 같다.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하면 칭찬과 격려보다는 꾸중과 걱정이 먼저 앞쓰셨다. 내가 무엇이 되겠다고 하면 부모님은 안되면 어떻하냐에 더 신경을 쓰셨다. 어쨌든, 나는 그저 내가 겪은 것들을 절대 아이한테 하기 싫을 뿐이다. 나의 부모를 원망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들이 가진 능력 이상으로 나를 최선을 다해서 키워주셨다. 다만 그것이 당신들의 시대의 평균에 근접하지 못했을 뿐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적어도 평균을 조금 넘게 아이를 키우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받지 못했던 것을 아이에게만큼은 해주고 싶은 보상심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좋은 부모가 되려면 부부 사이가 좋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부 사이가 좋으려면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서로가 최선을 다해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고 결혼한 것이 아니다. 연애 시절에는 몰랐던 차이를 결혼 생활을 통해 알게 되고 나서 갈등도 많았지만, 사랑해서 만난 우리이기에 대화와 타협으로 서로 맞추어 갈 수 있었다. 그 안에 내가 포기한 부분도 많고 아내가 포기한 부분도 많으며, 내가 얻은 부분도 많고 아내가 얻은 부분도 많다. 예를 들어 나는 이제 주말에 친구들을 만나서 온라인 게임을 할 수 없지만, 이제는 아이와 친구가 되어서 아내와 함께 주말에 놀러 다닌다. 이게 좋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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