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겸 Jul 15. 2017

대신해주시면 안 될까요?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적음을 따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지 않고 항상 일관적인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대개 좋은 태도뿐만 아니라 좋은 행동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환영받는다. 형식이가 그런 사람이었다. 형식이는 나의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꽤 괜찮은 직장동료였다. 업무도 항상 똑소리가 났을 뿐만 아니라 독특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어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좋은 평판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형식이가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를 한참 만류했더랬다. 무작정 퇴사하지 말고 다른 곳은 구하고 결정해도 늦지 않는다고 권유했지만 그를 붙잡아 둘 수 없었다. 팀에서 자신의 성장과 변화를 갈망하여 지난 5년을 버텼지만 이제 더 정체되고 싶지 않다는 그의 의지가 너무나 강했다. 형식이가 회사를 떠나던 날, 나는 진심으로 녀석의 건승을 빌어주었다.


 형식이는 자신에게 권한과 책임이 더 많이 부여하는 회사를 찾기 시작했다. 몇 차례 반복된 입사 지원 과정이 있었지만 녀석은 당연하다는 듯이 당당히 유명 외국계 회사에 최종 합격하여 레퍼런스 체크(평판조회)만을 앞두고 있었다. 문제는 회사가 형식의 평판 조회를 해줄 사람으로 형식이의 전 팀장을 지목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당시 나의 팀장이었던 김 팀장에게 형식이의 평판과 이력을 확인할 셈이었다. 형식이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형식이는 레퍼런스 체크 목록에 김 팀장의 메일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었을 때 불안과 걱정을 느꼈다. 그로부터 약 이틀 후, 내가 작성한 품의서를 김 팀장 앞에서 보고하는 와중에 그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는 반복되는 스팸 전화에 짜증이 난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는 냉소적이면서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형식이가 저한테 먼저 전화해서 상황 설명하지 않으면,
레퍼런스 체크를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출처 - 레퍼런스 체크 코리아

형식이가 매우 난처한 상황에 직면했음을 나는 그때 알아차렸다.


 며칠 후 형식이에게 전화가 왔다. 녀석은 내게 그간의 사정을 말해주었다. 담담하지만 마른 목소리로 차분히 설명하는 녀석에게서 켜켜이 쌓인 절절한 분노가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형식이가 입사를 목전에 두고 있는 외국계 회사는 형식이의 평판조회를 직접 하지 않고 전문 대행업체에 의뢰했다. 그래서 전문 대행업체 담당자는 김 팀장에서 이메일 연락과 전화를 하루에도 수차례 했지만 김 팀장은 원론적인 이야기만 반복하면서 형식이의 레퍼런스 체크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 평판조회가 완료되지 않으니 입사는 계속 늦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계속 지나 일주일이 넘어가자 형식이는 더 안 되겠다 싶어 내게 연락을 한 것이었다.


"대리님이 대신해주시면 안 될까요? 대행업체 담당자도 상당히 난처해하고 있어요. 저에 대한 조회를 마치고 결과 보고서를 작성해서 회사에 제출해야 하는데 못하고 있으니 저는 입사를 못하고 있어요. 정말 부탁드립니다."


  분명 나는 형식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녀석의 평판조회를 대신했다는 말이 김 팀장의 귀에 들어갔다간 자칫 내가 부메랑이 될 수 있었다. 고민이 되었다. 나는 녀석에게 시간을 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출처 - 사람인, 머니투데이


  회사 비상계단에서 녀석과 통화를 끝내자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형식이의 평판조회를 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좋은 녀석이고 내가 해주는 것을 가볍게 여기고 지나칠 사람도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잘못해서 이런 사정을 김 팀장이 알게 된다면 그의 성정으로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나는 매우 난처한 상황이다 못해 그가 팀장으로 있는 동안 갖은 핍박을 받을 것이 뻔해 보였다. 하루 정도 고민을 하고 결국 나는 평판조회를 해주기로 했다. 입사를 앞둔 녀석의 길을 내가 막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다만, 내가 평판조회를 해준다는 것은 절대 노출하지 말아 줄 것을 몇 번이고 당부하고 약속을 받았다. 점심시간에 평판조회 업체 담당자에게 전화 연락이 왔다. 그는 급하다는 조회를 서두르지 않고 김 팀장에 대한 하소연을 내게 엄청 쏟아냈다. 그간 얼마나 답답했는지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약 5분 만에 형식이의 평판조회는 끝이 났다. 녀석은 며칠 후 입사가 결정되었다. 바로 그 날, 나는 본부 워크숍을 가는 날이었다. 워크숍 장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 김 팀장의 통화가 나의 귓전을 때렸다.


“형식아!
나는 네가 좋은 회사를 선택한 것인지 궁금해서 그랬던 거야.
설마 내가 나쁜 마음을 먹고 그랬겠니?”

  가끔 형식이와 만날 때마다 회자되는 이 이야기는 지금도 늘 유효한 안줏거리다. 형식이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한다. 왜 그렇게까지 자신에게 못되게 굴었던 이유가 뭔지 말이다. 물론 나 또한 지금에 와서 그 이유를 애써 찾아볼 생각은 없다. 이미 지나간 일은 지나간 것 그 자체로 남겨야 미련이 없다. 분노를 머금고 계속 안고 산다면 자신만 해치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자신의 쾌락으로 일삼으려고 한다면, 그 이상의 과보가 전혀 예상치 못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단죄할 수 있다는 것을. 그로부터 약 4년 후 김 팀장은 뜻밖의 조직개편에서 불명예스럽게 팀장에서 팀원으로 강등되어 다른 부서로 전보를 당했다. 그의 인사를 단행한 것은 그의 담당 임원이었다. 그가 팀장으로서의 마지막 날에 자신의 책상에서 짐을 정리하면서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애들아. 나 엑셀 잘 못하는데 혹시 엑셀 관련 책자 가지고 있냐?


- fin -


※ 글과 사진을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 및 무단 편집 이후 게시를 하면 법적 처벌을 받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상은 나의 욕망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