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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겸 Jun 25. 2017

공상은 나의 욕망이다

열두번째 이야기

  내가 대여섯 살쯤 되었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고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시는 시골로 보내졌다. 시골이 원래 그렇듯 그곳은 짙고 푸르른 산들이 병풍처럼 서 있고 그 아래로 엷고 넓게 펼쳐진 연록의 향연이 펼쳐진 논밭이 있었다. 시골집 앞에는 커다란 밤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 아래에 앉아 정면을 보면 읍내의 정경이 한눈에 보였다. 나는 그곳에서 초등학교 2학년이 되기 전까지 유년 시절을 보냈다. 나는 시골집이 있는 동네에서 가장 나이 어린 녀석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보다 두서너 살 많은 형을 쫓아다니면서 그들이 하는 것은 좇아 해보려고 했었다. 한 번은 포도 서리를 하러 가는 형들을 쫓다가 도랑에 엎어져 우는 채로 집에 돌아왔는데, 그 모습을 보고 기가 찬 할머니가 나를 흠씬 혼내시고 솟옥만 입히고 머리에 키를 씌운 채 대문 밖으로 내쫓으셨다. 도랑에 넘어져 놀란 마음에 바지에 실례한 탓이었다. 이런 일이 다반사가 되어가자 지치신 할머니가 나를 강하게 밀어붙이신 거였다. 그 시절 이불에 노오란 지도를 그려보지 않은 아이가 없었을 테니 나 같은 처지의 아이가 많았을 성싶다. 어쨌든 다반사가 되어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큰 손주에 대한 걱정이 많으셨던 것 같다. 손주를 사랑하는 마음에 하는 걱정이셨겠지만 접근 방법이 요즘과 달랐다. 아이가 충분히 느낄 만큼의 다정한 말투와 사랑스러운 표정을 하기보다는 짧고 단호한 말투의 주문들을 자주 거셨다.


“하지 말거라. 조용히 하거라, 진득하거라. 얌전이 있어라”

이런 주문들은 훈육의 한 방법으로 흔히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양육자는 자신의 아이가 스스로 위험을 자각하고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 수 있기를 바라며 이런 주문을 사용한다. 그러나 양육자가 아이(행위자)와 아이의 행동(행위 자체)을 동일시하여 주문을 과도하게 사용하거나 억압하면 아이는 호기심이 제거할 뿐만 아니라 죄의식으로 자리 잡아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을 괴롭힌다. 안타깝게도 나의 할머니는 주문으로 끝내지 않으셨다. 늘 자신의 처지와 자식에 대한 연민과 한탄을 고스란히 담은 한숨과 잔소리를 혼잣말하듯 내게 쏟아 내셨다. 나는 할머니가 그러실 때마다 얼어붙곤 했다. 그렇다고 두 분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두 분은 나를 사랑하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를 없었을 것이다. 다만, 두 분은 내가 타인보다 민감한 아이라는 것을 모르셨고, 당신들이 알고 있는 제일 나은 방법으로 훈육을 하신 것뿐이셨다.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적 억압의 시대에 태어나 혼돈의 한국 전쟁과 격동의 독재 시대를 견뎌 내셨던 당신들에게 손주가 가져야 할 미덕은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을 구분하는 것이었을 게다. 그저 두 분은 몸으로 절절히 체험한 훈육을 손자에게 한 것뿐이었다. 그래야 손자가 거친 세상에 살아남기 때문이다.


  조부모님이 내게 금지 주문을 사용하실 때마다 나는 그들의 말에 순종하려고 노력했다. 사랑과 보살핌을 지속적으로 받아야 생존할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에게 양육자는 어쩌면 절대자와 같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공상뿐이었다. 공상하기는 뜻밖에 나와 잘 맞았다. 게다가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그저 한 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창밖에 풍경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상상하는 것이었다. 당시 나의 공상은 나의 상황을 멋지게 반전시키는 역전의 스토리가 대부분이었다. 로봇 태권브이의 파일럿이 되어 악당을 물리치고 유명해져서 부모님을 만나거나 부모님이 엄청난 부자가 되어 자동차에 과자와 장난감을 한껏 싣고 나를 데리러 오는 꿈 등이었다. 아마도 이혼한 부모와 떨어져 조부모와 사는 아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상상이었을 게다. 그러나 그런 상상을 하고 나면 당장 부모님이 내 옆에 없다는 사실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몰래 울기도 했다. 몇 년 후, 공상은 어느 정도 현실이 되었다. 도시에 자리를 잡으신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나는 도시에 살게 되었다. 차도 없고 과자와 장난감도 없었지만, 아버지와 같이 산다는 것은 무척 행복했다. 도시는 시골을 어떤 것으로도 압도하는 곳이었다. 차도 많고, 사람도 많고, 건물도 많고, 가게도 많고, 친구들도 많았다. 아버지를 따라 새로운 학교에 전학하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다. 녀석들과 방과 후에 운동장이나 빈 공터에서 실컷 뜀박질을 하고 놀거나 딱딱한 하드바를 하나씩 손에 들고 매우 과장된 공상으로 빚어낸 이야기를 서슴없이 지어내며 놀았다. 예를 들어 북한이나 일본이 쳐들어오면 숨겨진 비밀기지에서 로봇 태권브이가 출동하는데 그 기지가 여의도 국회의사당 지하인지 동해 바다 독도 밑을 두고 서로 자기가 옳네 하며 옥신각신했다. 그 당시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꽤 신빙성 있는 상상이었다.


  고학년이 될수록 방과 후에 태권도, 주산, 미술, 음악, 컴퓨터학원 등을 다니는 친구가 많아졌다. 아직 우리 집은 나를 학원에 보내줄 형편이 되지 못했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친구들과 놀려면 그들이 학원에서 돌아오기를 집에서 기다려야 했다. 집에 있어도 마땅히 할 것이 없었다. 같이 살던 막내 삼촌이 나를 돌봐주시기는 했지만, 취업을 위해 국가자격증 공부를 하시던 터라 매일 나와 시간을 보내주실 수 없었다. 텔레비전도 있었지만 볼 수 없었다. 요즘은 150개가 넘은 방송 채널에서 온종일 쉼 없이 방송이 쏟아지지만, 당시에는 공중파 방송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오전 10시가 되면 오전 방송이 끝나고 오후 5시 정도 되어야 오후 방송을 볼 수 있었다. 그때부터 집에 있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매일 학교 숙제를 등한시하던 아들이 갑자기 존 F. 케네디 전기를 읽고 있는 모습을 보신 아버지는 책을 한두 권씩 집에 가져오셨다. 처음에는 전기나 위인전만 가져다주시길래 내가 불평을 했더니 나중에는‘자연과 어린이’, ‘새 벗’,‘월간 항공’ 등의 책을 가져다주셨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책 읽는 것이 좋았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공상하는 재미가 있었다. 눈으로 들어오는 문장과 문단들이 머릿속에서 재구성되어 새로운 3차원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물론 친구들과 노는 것이 더 즐겁기는 했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한 달 동안 나는 동네 신문보급소에 신문 배달을 했다.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신문을 돌리고 받은 돈이 삼만 오천 원이었다. 태어나 처음 벌어본 돈이었다. 나는 이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하는 흥분된 상상을 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돈을 가져가셨다. 그리고 다음 날 아버지는 라디오 카세트를 사 오셨다. 금성에서 나온 최신형 모델로 당시 유행하던 오토리버스 기능까지 탑재된 라디오 카세트였다. 나는 플레이가 끝난 카세트테이프를 뺏다 다시 넣어 플레이 버튼을 눌려야 하는 수고로움에서 자유가 되었다. 나의 책상 위에 있던 무전기 같은 검은색 라디오는 이제 뒷방 신세가 되었고, 그 자리에 이 작고 신통한 라디오카세트가 차지하게 되었다. 지금은 동시에 두 가지를 일하지 못하는 둔한 중년의 남자가 되었지만, 당시는 사춘기에 접어들어 감수성이 남 못지않게 젖어있던 10대 소년이었다. 학교에 돌아와서 저녁 6시가 되면 책상에 앉아 라디오를 켜고 공부를 하거나 하고 싶은 것을 했다.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무언가 열중하다가 DJ가 최신 유행 가요나 팝송이 틀어줄 거라고 말해주면 모든 것을 멈추고 카세트 녹음 버튼을 기가 막힌 타이밍에 누를 준비했다. 행여 잘못 눌러 간주 부분을 놓친다든지 하면 어찌나 속이 상했는지 모른다.


  소설책을 읽으면 주인공과 그 주변에서 함께 사건이 벌어지고 그것을 매개로 등장인물의 감정선을 읽어내는 것 자체가 상상을 크게 자극한다. 라디오도 그런 비슷한 효과를 발휘한다. 아마 청각만을 통해서 전달되는 정보가 얼마나 뇌를 자극하고 상상력을 극대화하는지 라디오를 자주 들었던 세대는 알 것이다. 청취자가 예쁘게 만들어 보낸 엽서를 DJ가 뽐내면서 설명해주면 도대체 얼마나 그리 예쁜지 궁금해하며 상상한다. 또는 경기도 어디에 사는 익명의 청취자가 보내준 가슴 아픈 사연을 들을 때면 그 청취자와 사연의 상대방의 절절한 이야기에 공감하면서 머릿속에 그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그만큼 라디오는 나의 친구였다. 그러나 나도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학입시가 다가오자 라디오를 듣는 횟수나 시간을 점점 줄어들었다. 당장에 대학에 들어가려면 공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공상은 뜬구름 잡는 것으로 여겨져 잠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대학을 입학한 그해 겨울에 외환위기가 닥치자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군대에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오뉴월에 눈이 내리는 전방에서 26개월을 채우고 제대를 했다. 일반적인으로는 나는 복학을 해야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현실이 그렇게 허락하지 않았다. 여전히 외환위기의 여진이 내게 전해지고 있었다. 어렵게 대학을 겨우 졸업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죽을 둥 살 둥으로 매달려 1년 만에 겨우 어느 중소기업에 취업했지만 3개월 만에 도망치듯이 그만두어야 했다. 다시 아르바이트하면서 학원과 도서관만 오가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다시 뒤처진 것 같았다. 나를 가볍게 제치고 이미 저만치서 열심히 달리고 있는 동기들을 보면 뒤처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남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었다. 적어도 대학 동기들의 뒤꽁무니를 쳐다만 보고 싶지 않았다. 엄혹한 현실 앞에서 공상은 사치였다. 공상과 현실을 구분 못 해서 밥벌이를 못 하는 천둥벌거숭이는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공상을 멈추는 대가로 결핍과 몰입을 얻었다. '남들만큼'이 아닌 '남들 보다'라는 성공의 결핍이 나를 채찍질했고, 그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몰입이 나를 더 부추겼다. 그렇게 한 10년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렸다.


 어느덧 나는 국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성공이라 말할 수 없으나 대학 동기들 뒤꽁무니를 쳐다보지 않아도 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나는 한계를 체감하고 있었다. 조만간 그 두텁고 높은 한계라는 벽이 내 코앞까지 닥칠 거라는 것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몸서리를 치고 나면 공허함이 찾아왔고 곧이어 불안이 쫓아왔다. 그럴 때면 나는 내가 달성한 과업을 스스로 치켜세우며 공허와 불안을 잠재우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점점 힘이 부쳐갔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그러던 어느 늦은 밤, 나는 사무실에서 혼자 야근을 하고 있었다. 지방 출장을 다녀온 탓에 당장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적해 있었다. 겨울이어 해가 금세 지는 탓에 바깥 밤은 꽤 길게 느껴졌다. 겨우 일을 마치고 사무실 벽에 걸린 디지털 시계를 보니 밤 10시를 넘긴 터였다. 집으로 가는 퇴근 버스는 11시에나 있어 당장 퇴근할 수가 없었다. 당장 딱히 할 일도 없고 밖은 추운지라 사무실에 인터넷을 하다가 버스를 타러 나갈 요량이었다. 그렇게 인터넷을 하다가 우연히 어느 동영상을 보고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그 따뜻한 사무실 안에서.



정말 좋아하는 일을 그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하고 싶다. 그 일을 하고 있는 나를 생각했을 때, 설레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일을 찾으라.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 "내 인생의 혁신"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한 김동준 이노 캐피털리스트 대표


나는 단 한 번도 일하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설렘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회사에 다니고 있고 거기서 하는 업무가 분명 내가 하는 일이었지만 그런 감정을 가진 적이 없었다.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지난 10년간 성공이라는 길의 초입에라도 들어서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그 모든 시간이 왠지 허망하게 느껴졌다. 가까스로 나의 일에 대한 의미를 붙잡고 있던 내게 그 동영상은 매섭도록 날이 돋은 비수와 다름없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동안 멀미가 나듯 현기증이 일었다. 그 일이 있고 내가 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었는지 끝없이 자문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타인의 욕망을 나의 욕망이라 여기며 살았다. 타인들이 정해놓은 성공의 기준, 행복의 척도, 삶에 대한 태도 등을 어떠한 비판적 사고 없이 맹목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라캉은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삶을 평가할 수 있는 도구는 (자신의) 욕망으로 이룬 업적이나 성과가 아니라 타인의 삶을 통해서다"라고 언급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 권력, 미모 그리고 명예를 욕망한다. 코제브는 우리가 그런 대상들을 욕망하는 이유는 타자들이 그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이는 경험적으로 쉽게 확인된다.』

- 철학 대 철학 / 강신주 저


그렇다면 나는 한 번도 나의 욕망을 갈구한 적이 없었던가? 엄마 뱃속에서 갓난아이로 태어나 길러지고 성장하면서 나의 욕망을 한 번도 갈구한 적이 없었던가? 그리고 나는 나의 생존과 타인의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서 나의 욕구를 죽이고 타인의 욕망에 기대어 살기만 했던 것인가?


『갓난아이에게 최초의 타자는 곧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최초의 타자가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최초의 타자가 자신을 지속적으로 돌보아 주느냐의 여부이기 때문이다. 타자로부터 지속적인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갓난아이는 자신을 돌보는 타자가 자신에게 욕망하는 것을 행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자신이 김치 먹는 것을 좋아한다면, 갓난아이는 김치에 대한 자신의 불쾌감을 무릅쓰고 먹으려고 한다. 비록 괴롭긴 하지만 김치를 먹었을 때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 대 철학 / 강신주저-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 나는 늘 나의 욕망을 꿈꾸고 갈망했다. 시골집에서 조부모님 밑에서 자라면서 그들의 욕망을 따랐지만 동시에 공상을 통해서 나의 욕망을 갈구했었다.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들의 (부모의) 욕망을 따라갈 수 없었지만, 책을 통해 나만의 공상을 하며 나의 욕구를 채워갔다. 고등학교 입시와 대학 입시를 때문에 자주 들을 수 없었던 라디오였지만 그런데도 라디오를 통해 풍부한 상상력을 사춘기의 감수성만큼 채워갔다. 나의 공상이 나의 욕망이었다. 문제는 내가 냉혹한 사회에 들어서면서 진실로 내가 무엇을 소망하는지 외면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주체로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탓이었다. 그저 남들 보다 뒤처지지 않거나 남들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인들이 인정하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만 귀가 따갑게 들었을 뿐이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라캉

“자신의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 알기 위해서, 주체로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만 한다.” – 철학 대 철학 중에서 자크 라캉/ 에크리


  나는 김동진 이노캐피털리스트 처럼 설레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일이 내게 무엇인지 찾기 시작했다.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삶은 항상 불확실하며 불연속적이고 불완전하다. 불(不) 자가 3개가 들어찬 세상에서 불안은 어쩌면 당연하니 견녀낼 힘을 기르면 되는 것이었다. 그보다는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내가 어떤 상황에 어떤 감정을 보이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과 당위에 만족했다. 즉, 나는 누구이냐는 질문을 통해 주체자로서 나의 욕망을 찾아 실현해 나가고 싶은 거였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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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Painting : Wikiar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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