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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겸 Aug 23. 2015

행복한 선택과 만약이라는 사고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마스크를 쓰고 출근하는 것이 어색했다. 마스크를 썼단 이유만으로 여러 가지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별일 아닌데 호들갑을 떤다는 책망의 시선, 혹시 감염자가 아닐까라는 의심의 시선, 마스크를 쓴 사람이 나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안도의 시선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나와  관계없다는 방관의 시선이었다. 그러나 인재로 급변한 전염병의 띠가 전국을 휘감자 마스크를 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제 마스크는 불안과 염려의 상징이 아닌 예방과 보호의 상징이 되어 갔다. 덕분에 마스크 장사가 호황이란 소리도 들렸다. 나도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마스크 착용이 점점 익숙해졌다.

일반 부직포 마스크 <사진출처-구글>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자 문득 사람들이 이 상황에 둔감해지거나 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받아들이면 어쩌나 싶었다. 익숙해지면 더 이상 남의 일이 나의 문제로 다가오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이 계속 알아주기를 바랬다.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조차 못했던 사람들이 확진자가 되어 세상과 단절된 채 격리된 병실에 누워있거나 또는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시간을 가족과 나누지 못하고 고립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몇 겹의 의료 보호복을 입은 채 소명의식 하나로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은 전염병자가 아니라 '소리 없는 영웅'이라는 것을.

<사진출처 - 연합뉴스 기사>

 그러나 안타깝게도 병원 밖의 사람들 대부분은 그들의 삶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판단하기 어려운 사실과 종잡을 수 없는 추측으로 위장된 듯한 언론 기사가 조잡한 편집 기술로 재포장되어 세상 밖으로 수 없이  재생산되었다. 댓글이 달렸다. 침잠한 이성적 접근은 찾아보기 어렵고, 불가해한 책임론이 격한 감정과 함께 따라왔다. 누구 때문이라며. 무엇 때문이라며.


   • 보수/진보의 편 가르기 방법으로 상황을 정치적으로 맥락화하거나
   • 감염의 책임을 개인의 부주의로 돌리거나
   • 리더를 잘못 뽑은 전체 또는 일부 국민의 의식 수준에 있다고 하거나.
   • 반대로, 우리 모두의 책임이기에 모두 자성의 목소리를 키워야 한다고 하거나
   • 보수 성향이 강한 지역의 사람들이 인과응보를 받는다고 하거나
   • 극단적인 시나리오 예측 또는 주장을 통해 불안하게 하거나
   • 세대 간의 갈등으로 포장해 엉뚱한 방향으로 가거나
   • 특정 종교, 특정 종교인, 특정 종교 신도들의 책임으로 돌리거나
   • 현재 상황을 나름 분석하여 논리적으로 풀어내거나(대안은 대부분 없거나 조악했다)
   • 이 모든 것은 나와  관계없다는 방관의 시선으로 전체를 비난하거나


안타깝게도 저 대부분의 댓글들은 어떤 선택이 이런 결과를 마주하게 되었는지 파악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문제는 각자의 개별적인 주관적 판단에 근거한 불완전하고 미미한 시도라는 것. 사실 선택은 우리가 미쳐 인식하지 못하는 부지불식의 순간에 타의적이든 자의적이든 계속 있어 왔기에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알 수도 없고 가늠조차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택의 기준은 좀 더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과 바람이었다. 우리가 과거 어느 시점에 내린 어떤 선택이 현재의 무책임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면, 우리는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입 속의 즐거움을 위해 먹은 알사탕이 목구멍을 막히게 할 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자본주의 연혁 - 네이버 백과사전

행복하려고 내린 과거의 선택을 단순히 이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단정 짓기 어렵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는 결과를 이미 다 알고 있는 사후적인 논쟁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 나는 우리가 내린 선택보다 그런 선택을 모르게끔 강요하는 사회가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그런 사회에서 너무 오래 살아왔다. '남 만큼 행복'이 아닌 '남 보다 더 행복'을 외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말이다.

   • 가난은 무능력이고 부자는 존경받는 사회
   • 기득권의 추구는 선(善)이고 나눔의 추구는 우(愚)라고 생각하는 사회
   • 국민을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국민이 존재한다는 사회
   • 낙수효과를 통해 모두가 이익이 분배된다고 역설하는 사회
   • 협력 상호 경쟁이 아니라 독자 적대 경쟁을 조장하는 사회
   • 실패는 부정적이고 쓸모없고 오직 성공만 위대한 가치라는 사회
   • 사회의 모든 문제를 개개인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폄하하는 사회

   • 윤리와 상식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돈, 위선, 부패, 비상식이 통하는 사회


복잡하게 엉킨 축구공 만한 크기의 실타래에서 어떤 실(선택)을 골라 역으로 쫓아가도 실타래가 풀리지는 않는다. 설령 풀린다고 해도  일부일뿐이다. 그러나 그 자체에서 머물기만 한다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과거만을 추적하고 멈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우리는 '만약'이라는 생각의 시도를 해야 한다.우리가 한 선택이 가깝고도 먼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해 "만약 ~한다면"이라고 좀 더  숙고해야 한다.물론 과거의 선택이 현재의 결과를 예상할 수 없듯이, 현재의 선택도 미래의 결과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그러나 적어도 더 오래 가진 수 번의 고찰을 통해 나와 타인을 좀 더 숙고한다면 세월호나 메르스 사태와 같은 참담한 실수를 피할 수 있거나 또는 그러지 못했어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을지 모른다.그렇기에 우리는 현재 이 순간을 철저히 마주해야 한다. 최근 2년의 비극을 통해 우리는 충분히 우리의 현재를 직면하지 않았나? 우리가 얼마나 비정상적인 채 살아왔는지 말이다.

엉킨 실타래  <사진출처 - 구글>

할아버지가 지은 낡은 집이 있다. 나의 아버지가 태어나 자란 집이다. 내가 그 집을 조금씩 새롭게 수리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아이들이 그 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생각을 해보라. 낡은 집 구조(프레임)를 확인하고, 낡고 부서진 곳을 직접 찾아 확인하고(현재를 마주 보고), 어떻게 수리할지 생각하고(만약이란 사고를 적용하고), 톱과 대패를 들고 집을 수리하는 것(행동할 때)이다. 우리가 원하지 않은 비정상적인 프레임에 갇혀 산다고 해도 우리가 직면한 현재를 정확히 마주 보고 '만약'이라는 사고를  계속하며 행동한다면, 더 나은 세상을 만날 수 있다. 물론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 세대에서  마무리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마무리한다고 해도 누려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바라보자. 세상을 바꾸지 못해도 먼 미래에 있을 법한 가능성에 우리의 힘을 보탠 것이라고.



 -FIN-

※ 이 글은 2015년 6월에 쓴 글로 내용을 좀 더 보완했습니다.

※ Cover Picture, 아돌프 폰 멘셀의 "쇠 압연 공장" (아돌프의 더 많은 그림을 보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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