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문을 톡톡, 두드리는 중인가- 생각하며 시계를 봤다. 8시 35분. 아, 좀 더 잘까. 싶어 하얀 이불을 오른손으로 어깨까지 추켜올렸다. 낯선 한옥의 갈색 천장이 가물가물 감기는 눈에 스쳤다.
싫어.
나도 직장도 너도 세상도 가족도 친구도.
과거도 현재도 미워
내일같은 건 있을 수 없어
당장 살고싶어. 당장. 도망치고 싶어.
덤덤한 입가 안에 삼킨 하루 끝자락이었다. 금요일이라고 남겨놓은 일이 머리와 가슴 안을 뜨겁게 괴롭혔다. 속이 답답했다. 핸드폰 속에는 유명 아이돌의 자살 기사가 눈을 어지럽혔다.
이대로 집에 가면 난 죽고말거야.
너무 죽고싶고 말거야.
해내고 말거야. 죽음을. 마지막을.
정신을 차려보니 엉망진창인 자취방에서 에코백을 꺼내 짐을 싸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정신을 차려보니'라는 말을 싫어하는 사람인데, 헛웃음이 나왔다. 이토록 맥락없는 세상의 벼랑 끝까지 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스스로를 괴롭히는 나에게서 선택한 도망자의 여행지는, 인적 드문 북스테이 강화도 책방이었다.
지금은 왜 안 돼?
그래 지금. 도망은 지금이야.
일분 일초도 망설이지 않을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 곳으로 가자.
정신없이 검색했다. 지금 내가 당장 생각나는 것들.
책, 북스테이, 고양이, 시골.
당장 예약 가능한 인적 드문 곳.
대중교통이 불가능할 것.
누구도 쉽게 찾아내지 못할 것.
무얼 얻을 수 있을까, 스스로 도망치는 최선의 길목에서 애써 떠오르는 답을 무시하며 지하철과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탔다. 급하게 싼 짐의 무게가 어이없을만큼 오른쪽 어깨를 짓눌렀다.
내려놓으면 이렇게 가벼워지는 걸. 알면서도 난 왜 그럴까?
주저하다가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지하철 출구에 있는 '비상대피로'를 사진으로 남기며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등 뒤의 하얀 탈출구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당장 떠날 수 있어. 네가 결심만 한다면. 나와 같이 떠나자. 세상 반대편으로
죽음을 눈 앞에 쥔 채로, 지친 냄새를 숨기길 힘을 잃은 채 3번째 버스를 탔다. 뜨겁고 어두운 생각이 몸을 집어삼켰다.
내가 선택한 길목의 끝에서 나가자.
다 책임지다 야근에 찌든 직업인도 아니고
애인 없어 외로운 스물 몇 살도 아니고
밤길이 무서운 연약한 여자도 아니고
부모를 잃은 엄마를 위로하는 딸도 아니고
어버이날을 맞이해 총대를 메고
언니오빠를 채근하는 동생도 아니고
매일 술 없으면 잠에 못드는 인생회피자도 아니고
지방에 머무르는 친한 친구들을 대신해
멋진 삶을 전시하는 개척정신베프도 아닌
사람으로.
그냥 하나의 생명으로.
죽기 전에, 삶을 내던지기 전에 한 번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해 보자.
그리고 나서 죽자.
생각 공장을 멈추기 전에 차라리 얼만큼 돌릴 수 있는지 공장을 과부하시켜보자. 올 한 해 성과급을 태워버려보자. 성실하게 나빠지는 스스로를 멀리서 바라보며, 내가 속삭였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사람치고는 꿈이 작다?
맞다, 난 살고 싶다. 그래서 여기 온 거다.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이른 기상을 했다. 주어진 도망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지- 이게 다 돈 주고 산 거야. 시골 한 구석에 박힌 독립서점의 이틀. 이게 내가 나를 시험할 주 무대이니까 더욱 성실해져야지.
성실병이 도진 젊은이의 우울증은 돈지랄로도 고쳐질 수 없다. 머릿속에는 벌써 어젯밤 사장님이 추천해 주신 산책로를 몇 시에 걸어봐야 할까- 계획을 짜고 있었다.
'초지대교를 지나면 연락해요.'
'광명에서 오려면 당산에서 7000번 버스를 타요. 그게 제일 빠를 거예요.'
'오늘도 늦게까지 있을 거라 괜찮아요. 늦게 와도 잘 수 있어요.'
지하철을 갈아타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탔다. 그 다음부터는 마을버스가 끊겨있지만 상관없다. 까만 밤, 모르는 산골짜기에서 누가 채가든 노숙을하든 몇 시간을 걸어 책방에 도착하든 상관없어. 도로 집에 들어가 영혼이 썩어나가는 것보다 나았다.
도시의 야경은 강화도로 들어서는 초지대교를 지나자 한꺼번에 사라졌다. 더 이상 밀릴 차도 없어 버스는 한 밤을 바람같이 달렸다.
더 멀어져라, 더 빨리 사라지게.
위험방지턱을 멈추지 않고 운행한 탓에 급하게 싼 짐이 가방 위로 불쑥 튀어나왔다. 손바닥에 힘을 꾹 주어 구겨진 채로 눌러버렸다.
정리따위 필요없다. 반듯한 모든 것들이 밉다.
이게 한국인가, 싶은 인천 마전역의 끝에서 이게 인천 도시라고, 다시금 놀란 온수리의 버스정류장에서 이것보다 더한 시골이 강화도에 숨어있다고?
혼란스러운 컴포트 존 러버 촌년의 3시간 대중교통 여행길 끝은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검은 투싼이었다.
"여기를 어떻게 알고 왔어요?"
-책방 투어를 하고 있거든요. 갑자기 떠나고 싶어서 너무 멀지 않고, 당장 예약이 되고, 이틀동안 잘 수 있는 곳을 찾았어요. 그랬더니 여기가 나오더라고요.
"그래요, 여기가 책방. 내려서 따라와요. 저녁은 아직이겠네?
뭘 이렇게 많이 사왔어? 밥은 같이 먹으면 된다니까. 지금 배고프겠네?"
반말과 존댓말이 어색하게 섞인 단발 파마머리의 여사장님을 만났다.
밤 8시, 길을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견하다 생각하는 나였기에 배고픈 것 정도야 별 것 아니었다.
삶에서 길을 잃은 사람은, 배도 안 고프다.
술과 카페인은 무지 고프고.
내가 1년동안 자연스레 체득한 사실이다.
살은 빠지지 않더라. 비워지는 칼로리는 알코올이 대신해주었다. 술살로 늘어가는 뱃살은, 내가 보기에도 늘어지게 못생겼다. 이틀에 한 번은 꼭 맥주라도 삼켜줘야 한다. 흐릿한 정신이어야 살아지는 세상이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멀쩡하게 살아가는 일은 특별한 힘을 가진 금수저들만 가능한 일이다- 생각한다. 현실에서 멀거니 떨어진 나와 달리, 책방과 오늘 잘 곳을 소개시켜주느라 사장님은 무척이나 빠르게 오늘과 내일에 필요한 말을 쏟아냈다. 뒤에서 책방에 놓인 책들을 손 끝으로 멍하니 스쳐보았다.
"무슨 책을 좋아해요? 어떤 작가 좋아해요?"
혼자 가둔 생각의 골방에서 오늘의 시간으로, 불쑥 말을 건네는 사장님 덕분에 생기를 되찾았다. 저 질문이 나를 남몰래 좋아하는 멋진 청년에게서 나왔다면 참 좋았을텐데. 난 당장 사랑에 빠졌을텐데. 그랬으면 내일 살아갈 힘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생각하며 답을 골랐다.
무의식중에, 사실은 약간의 의식 속에 또 나의 고질병이 도진다.
진짜 나를 보여주지 않기 병. 통칭 다른 사람 기대 혼자 상상하고 그대로 꾸며내기 병.
남들은 그걸 사회성이 좋다고 하고,나는 그걸 내 영혼의 죽음이라고 부른다.
아직은 사장님의 취향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일단 단서를 얻어내보자.
- 저는 그런 말 들으면 언제나 힘들어요. 어떤 종류인지, 어떤 작가인지에 따라 다른걸요.
"그래? 사실 나도 그래! 누가 좋아하는 작가 누구냐 물으면 진짜 힘들어."
- 어떤 의미로 다들 물어보는 지는 알겠는데, 좀 힘든 질문이에요.
다행히 내 답이 오답은 아니었다.
남들은 둔하고 둥글어서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나는 사실은, 누구보다 예민한 사람이다.
그래서 더욱 모든 사람들의 경계선을 밟지 않는 무던한 대답을 유추할 수 있는거다.
이런 나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은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다.
심지어 가장 친하다고 이야기하는 고등학교 친구들에게도, 몇 년동안이나 일주일에 두 세번씩 술을 퍼마시던 동료에게도 비밀이다. 자기 부정의 탑 시크릿이랄까.
"컵라면 사 왔으면 물은 여기서 끓여 먹으면 돼요. 밥도 줄까?"
- 네, 주세요. 감사히 먹겠습니다.
" 이 밤에 라면에 밥까지? 그래요. 나는 밥 대신 저녁에 아이스크림을 먹어. 그래서 남들도 다 그런 줄 알지 뭐야?"
숨소리마저 적막한, 혼자만의 시간을 상상했던 나의 기대와 달리 자연스레 라면에 물을 부어주고서는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식탁에 함께 앉는 사장님이 부담스럽다- 생각했다. 일요일까지 머물러야 했기에, 식사 이야기가 없어 혹시 몰라 혼자 먹으려고 역 앞에서 샀던 빵 몇개를 건넸다.
-이거, 선물이에요. 목소리 듣고 나서 혹시 이런 것 좋아하시나 하고 샀어요.
팥앙금은 진짜 선물 맞는데, 에그타르트는 사실 내 것이었다. 봉지에서 빵을 꺼내다 눈을 마주쳐버린 탓에 손이 멈추질 못했다. 난 결국 모두 꺼내고 말았다.
"목소리만 듣고도 선물을 주는 사람은 나 말고 또 처음보네~ 너무 고마워요."
이만하면 게스트 대접 다 했겠지? 나도 충분히 이틀 묵을 손님으로의 예의는 갖췄으니 들어가시려나 싶었는데 어디 사냐, 고향이 어디냐, 몇 살이냐, 직업이 뭐냐까지 꼬치꼬치 캐묻는다. 아이스크림을 밤 10시 25분에 라면 먹는 사람 앞에서 까먹는 할머니가 어디있냐 대체?
답답한 마음을 눈에 숨긴 채, 수저 소리가 들릴까 나는 조심히 라면 면발을 끊어 먹는다. 헙- 하고 삼키는 소리가 아무래도 신경쓰인다.
사실 누구보다 묻는 말에 예의바르게 대답하는 내 모습이 제일 싫다.
"나는 손님들이 와서 책을 사라 그러면 손님들이 물어, '아니, 저는 책을 안 읽는데요?' 그럼 내가 이래. '내가 책을 읽으라 그랬어요? 사라고 했지?'"
-사장님, 너무 재밌어요! 사장님 말씀 철학책 같아요. 사장님은 캐릭터같고요.
"어머 그래? 안 그래도 여기 날 그린 캐리커쳐도 있어. 외국애가 그려준건데, 쿠바애야. 나는 우아하게 살고 싶은데 사람들은 날 재미있게 보더라?"
-아, 그런가요? 사장님이 매력적이셔서 예술가들이 좋아할 것 같았어요.
이건 내가 상상한 도피처가 아닌데,
역시 세상은 다시 한 번 내 뜻대로 하게 두지 않는구나.
그럼 그렇지,
라면을 다 먹고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멀거니 밥을 먹나 쳐다보는 사장님의 눈을 위해 국물에 밥을 말았다. 여기에 그동안 왔던 손님 이야기, 손녀 이야기, 아들 내외 이야기가 섞여 체할 것 같은 과식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자조 속에 갇힌 청춘의 가면을 벗어야겠다, 다짐한 것은 늦은 저녁의 끝물이었다.
사회성 자동 모드로 맞춰놓은 나의 몸뚱이가 사장님께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을 던졌으며, 사장님이 대답을 하던 대화들 끝에서 의외의 반응을 맛봤다.
"그래, 그런 걸로 치고 얼른 그거나 먹어."
이 시그널, 혹시 내가 원하던 시그널이었나? 싶어 얼굴을 쳐다보자 무료한 얼굴을 숨기지 않은 어른의 눈빛이 나를 채근했다. 이 사람도 사장으로 필요한 사회성 자동 모드가 장착된 것 뿐이었구나? 사실은 당신도 손님의 이야기들이 진심으로 달갑지는 않았구나, 깨달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당장 필요한 내 시간에서, 내 가면을 그만 벗어야겠다.
- 사장님, 저 혼자 밥 잘 먹어요, 그만 들어가셔도 돼요.
자리에 앉자마자 입에 맴돌았던 이야기를 꺼내니, 드디어 그말을 해줘서 고맙다는 듯 벌떡 일어나 그럼 좋은 밤 되라며 책방으로 사라졌다.
맞아- 나 지금 남 신경쓸 때가 아니야.
난 지금 인생구조대를 찾아 헤메는 구명선 위다.
바다에 살고있는 물고기들과 무인도를 앞에 두고, 물고기의 안부는 어떻고 무인도가 들어올 나를 싫어하지는 않을지 눈치를 볼 겨를이 없는 사람이다.
더 솔직해지자.
내가 선택한 삶이니 스스로 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해.
이렇게 세상을 만든 것도 너고, 앞으로 삶을 결정하는 것도 너야.
그렇게 날 괴롭히던 문장들에게서 벗어나자. 솔직함으로 탈출하자. 시도라도 해 보자.
되뇌이며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드라이기가 없는 탓에 머리가 젖은 채였다. 분홍색, 보라색 짝짝이로 신은 사장님의 크록스 신발을 떠올렸다. 멀거니 쳐다봐도 아무렇지도 않게 신발은 발을 감싸야 신발이지라는 태도가 무던히 묻어나는 발걸음.